<제244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빌라 소로토네의 국왕 근위대가 마법처럼 사라진 이후, 체자레는 몸 사리고 있으라는 아리아드네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다.
그는 수도의 흑사병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슬슬 시작되는 소규모 사교모임에도 일절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오타비오를 위시한 술친구들이 체자레의 얼굴을 보러 찾아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원망의 편지를 보낼 지경이었다.
친구들을 모두 쳐낸 체자레 공작은 엄한 곳에서 치대고 있었다.
“시키는 거 잘하고 있으니까, 나랑 놀아줘.”
빌라 소로토네에 찾아오는 친구들을 모두 물린 채 데 마레 대저택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백작의 약혼자는 열심히 일하는 신규 백작을 괴롭혔다.
“저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아리아드네는 장부를 맞춰 보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저는 누구랑 다르게 내가 놀아도 영지에서 소출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계속 일을 해야 수입이 생긴답니다.”
그녀는 펜으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종이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가며 그를 내쫓았다.
“전 굶어 죽기는 싫으니 그만 괴롭히세요.”
- 짤그랑!
그녀의 집중은 책상 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금화 자루로 인해 깨졌다.
“아가씨의 오늘치 일당!”
금화 자루를 내놓은 체자레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전액 두카토 금화, 순도 9할 9푼 6리! 이거 줄 테니까 오늘은 나랑 놀아줘.”
바로 그저께 일해야 한다는 핑계로 쫓겨나고 난 뒤에 절치부심해서 준비해 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이 정도에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제 시급, 이거보다는 비쌀 텐데요.”
체자레는 저 아리아드네를 상대로 흥정을 붙기보다는 좀 더 고전적인 방식으로 돌파하기로 했다.
그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은 아리아드네의 등 뒤로 다가가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그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부비며 치댔다.
“모자라는 건 내가 신나게 놀아 주는 걸로 채워줄게. 오늘은 나랑 놀러 나가자, 응?”
“어딜 만져요!”
“약혼까지 했는데, 뒤에서 껴안지도 못해?”
아리아드네는 시뻘게진 얼굴로 체자레를 쳐냈다.
그녀가 펄쩍 뛴 이유는 백허그 때문이 아니라 가슴께에 손이 닿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마 거기에 손대지 말란 소리는 하지 못하고 씩씩거렸을 따름이다.
체자레의 표정이 지나치게 순진무구해서,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자레는 잘생긴 얼굴에 천진한 미소를 띠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놀러 가자. 오늘은 마차를 준비해놨어.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며칠 전에도 놀러갔잖아요!”
“이번 주엔 오늘이 마지막이야, 응?”
아리아드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나절만이에요.”
“좋아!”
체자레가 더 큰 웃음을 지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이 잡힌 채로 체자레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리고 오늘 놀았으니 내일은 절대로 일할 시간을 확보해야 해요. 약속하실 거죠?”
“약속.”
그는 시원스레 웃으며 그녀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내 아리아드네의 얇은 실크 장갑 위로 체자레의 맨손이 엄지 도장을 찍었다.
* * *
체자레가 보여주고 싶다던 것은 산 카를로 외곽, 그들이 사냥대회 때 처음으로 단둘이 시간을 보냈었던 아르테 숲 근처에 있었다.
피사노 공작의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들어간 에트루스칸 북부의 겨울 숲은 고고한 상록수의 녹색 이파리와 추위에 얼어붙은 노란 관목이 교차되어 더욱 신비로워 보였다.
“이 근처였지? 우리가 황금 사슴을 봤었던 곳이.”
“그러네요.”
체자레는 마차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때 황금 사슴을 잡지 않길 정말 잘했어.”
“왜요?”
“대신 너를 잡았잖아.”
아리아드네는 물끄러미 체자레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턱을 괸 채 언제라도 황금 사슴이 뛰쳐나올 것만 같은 끝없는 숲을 주시했다.
“목적으로서의 왕위 따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이루고 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체자레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쑥스러운 것 같았다.
“너는 달라. 같이 하는 매일이 재밌어. 방 안에서 벽난로 타는 것만 같이 봐도 재밌어. 어떻게 그러지?”
아리아드네는 뭐라고 타박을 주려다가,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대신 그녀는 말을 돌렸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는데, 우리, 거의 다 도착한 건가요?”
체자레는 웃으며 말했다.
“눈치가 귀신인데? 다 오셨습니다, 아가씨.”
이윽고 말이 완전히 멈췄다. 마차가 정차한 곳은 조그만 계곡의 초입이었다.
“예쁘네요.”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벌써 감탄하긴 일러. 안쪽은 훨씬 더 예쁘다고.”
체자레는 마차에서 먼저 내려, 그녀를 들어 안듯이 에스코트했다. 그녀는 약간 불만스럽게 말했다.
“제 발로도 내려갈 수 있는데요.”
“그런 건 들어줄 남자 없이 혼자 있을 때 하라고.”
그는 마차에서 살뜰하게 모피를 덧댄 작은 블랭킷을 하나 더 챙겨와 아리아드네를 둘둘 감았다.
창졸간에 눈사람처럼 뚱뚱한 모양새가 된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에게 항의했다.
“웃기잖아요, 이거!”
“여기 이불 두른 아가씨 볼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내 눈엔 예뻐 보이니까 괜찮아.”
티격태격하며 그의 인도를 따라 들어간 계곡 안쪽에는 조그만 실개천이 흘렀고, 그 개천의 상류로 시선을 옮겨보니 아주 작은 소형 폭포가 있었다.
“여기는⋯⋯!”
아리아드네의 경탄이 터졌다. 체자레는 입가에 뿌듯한 미소를 띠고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예쁘지? 내 비밀 장소야.”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예뻐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녀도 아는 곳이었다.
전생의 체자레가, 어린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은방울꽃을 보러 왔었던 장소.
“5월에 오면 훨씬 더 예쁘지만⋯⋯.”
“⋯⋯은방울꽃이 피죠.”
“알아?”
체자레는 놀란 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이런 계곡에는 은방울꽃이 필 것 같았어요.”
말할 수 없는 과거. 분명히 네가 거기에 있었음에도 공유하지 못하는 기억.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장갑 낀 손을 잡아 소형 폭포 쪽을 가리켰다.
“5월에는, 저 폭포 뒤에 있는 공간에 은방울꽃 덤불이 자라.”
“예쁘겠네요.”
그녀는 잠시 뒤에 덧붙였다.
“해도 안 들 것 같은데, 기특해라.”
해도 안 드는 음지에서 기어코 몸부림치며 피어나는 식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생명.
전생의 체자레는 은방울꽃이 ‘순종적이고 주인 하나만 바라보아서’ 아리아드네와 닮았다고 했었다.
시작점부터 틀린 이야기다.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야생 벌판에서 피는 은방울꽃은, 그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그녀와 꼭 같았다.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필사적으로 자라난 것은 체자레도 마찬가지였다.
돈 말고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꼬이고 엉키고 뭉쳐버렸지만, 죽을힘을 다해 살아남아서 지금 여기에 서 있다.
“난 어려서 이 장소를 처음 찾았어.”
그는 과거를 회상하듯이 말했다.
“언젠가의 사냥대회였을 거야. 그냥 이 꼴 저 꼴 보기 싫을 땐 여기 와서 처박혀 있다 돌아가고는 했어. 빌라 소로토네를 받을 때까지, 여기가 유일한 나만의 공간이었던 것 같아.”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공간에 과거의 자신을 데려왔었던 거구나. 나는, 그에게 조금은 소중한 사람이었을까.
역시,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봐도 그녀가 알고 싶어 하는 답은 나오지 않을 질문이다.
“보통 여기에 혼자 오면 어디에 있나요?”
체자레는 턱으로 개울가에 있는 넓적한 바위를 가리켰다.
“저기에 뻗어서 한참 낮잠을 자고 가고는 했어. 물론, 여름에.”
그는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겨울엔 춥지.”
아리아드네는 조금 웃었다.
“겨울엔 몸 덥힐 걸 마셔야 하겠군요.”
“응? 아가씨가 웬일이야?”
체자레는 당황한 눈치였다.
“술 싫어하잖아. 그래서 일부러 안 가지고 왔는데.”
“싫어한다고 누가 그래요?”
그녀는 주류를 딱히 즐기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저 술에 취한 체자레가 싫었을 뿐이다.
“뭐. 안 가지고 왔다니 그럼 오늘은 풍경을 감상하면 되겠군요.”
체자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가씨를 감상하고.”
“아, 좀!”
도무지 진지해질 줄을 모르는 남자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에게 물었다.
“있잖아요.”
“음?”
“죄⋯⋯. 아니, 죄라기엔 너무 거창한가. 잘못의 본질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요?”
“잘못의 본질?”
그녀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네 살짜리 어린애가 아무것도 모르고 창가에서 놀다가 물건을 떨어뜨렸어요. 그래서 그 물건에 맞은 지나가던 행인이 죽었어요.”
체자레는 인상을 찌푸렸다.
“반대로,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연쇄살인범이 있어요. 그는 바로 다음 날 같은 창가에 서서 사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다가 행인이 보이자마자 벽돌을 던졌죠. 하지만 조준이 잘못되어 행인은 실오라기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물었다.
“둘 중 누가 죄를 지은 사람인가요?”
체자레는 크게 생각하지 않은 채, 곧바로 답했다.
“당연히, 아이 쪽 아닌가?”
“왜죠?”
아리아드네가 던진 질문은 체자레 본인에 대한 심판이자 은유였다.
체자레는 자기가 전생에 저지른 짓을 모른다. 그는 몰랐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체자레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스스로에게 가혹한 심판을 내렸다.
“아이는 의도는 없었지만 사망이라는 결과를 발생시켰고, 연쇄살인범은 동기도 행동도 다 악하지만 결국 사람은 죽지 않았잖아.”
체자레는 거침없었다.
“결국엔 모든 것은 다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행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그렇군요.”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물줄기가 가느다란 폭포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다치게 한 체자레는 여기에 없지만, 그녀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상처에 대한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하는가에 대해, 체자레는 본인이라고 답한다.
그녀는 문득 하나의 질문을 더 던졌다.
“저 폭포는, 한겨울에는 얼어붙나요?”
“⋯⋯그렇진 않아. 수량이 줄어들기는 해도 약간씩은 흐르지.”
그는 덧붙였다.
“설령 얼어붙는다손 치더라도, 다음 해 봄이 되면 다시 녹아내리니까. 여름에는 수량을 다 회복해서 힘차게 쏟아져 내려오지.”
“⋯⋯그렇군요.”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회복된다. 계절도 돌아오고 햇살도 돌아오고. 웃음과 믿음도 돌아올까.
체자레가 권했다.
“5월이 오면, 우리 함께 다시 오자. 풍성한 폭포도, 은방울꽃 덤불도 보여줄게.”
“⋯⋯.”
아리아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 * *
모처럼의 외출에서 돌아온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손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응접실에서 한참 기다리고 계셨어요.”
“응? 누구?”
올 사람이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아리아드네는 망토를 벗어 산차에게 건넸다.
“목욕물을 받아 주겠어? 손님을 만나고 나면 바로 씻어야⋯⋯.”
“아리!”
그녀의 말은 남자의 외침으로 끊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사막을 다녀와서도 새하얀 피부가 하나도 타지 않은, 라파엘 데 발데사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