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시각
다시, 산 카를로.
다사다난했던 겨울이 가고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3월이 임박하자 온난한 기후인 산 카를로에서는 수선화를 비롯해 온갖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봉오리를 틔웠고, 모습을 감췄던 새들이며 작은 동물들도 골목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활동을 재개하는 건 사람도 동식물과 마찬가지였다.
역병이 두려워 겨우내 각자의 집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시장에 모여 물건을 거래하기도 하고, 성황당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다시 사교모임을 주최했다.
그 와중에 가장 신이 난 건 아무래도 결혼적령기 아가씨들이었다.
“이사벨라! 19번째 생일 축하해요!”
오랜만에 데 마레 저택을 방문한 이사벨라의 모자란 친구,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 자작 영애가 호들갑을 떨며 이사벨라의 생일을 축하했다.
이사벨라는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쟤는 왜 굳이 콕 짚어서 나이 얘기를 꺼내는 거야?
이사벨라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챘는지, 레오나티 자작 영애는 바로 풍성한 선물 꾸러미를 꺼냈다.
“당일에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예쁜 포장지 안에 들어 있는, 놋쇠로 된 작은 통이었다.
이제 슬슬 상인들의 거래도 정상화되어가는 터라 산 카를로의 거리에는 사치품 역시 흐르고 있었다.
겨우내 갇혀 답답하게 살던 사람들은 보복적으로 예쁘고 신기한 것을 사들이는 중이었다.
레티시아는 자랑스레 말했다.
“이게 뭐게요?”
이사벨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홍차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쾌활하게 답했다.
“사랑의 묘약이래요!”
“네?”
그⋯⋯. 책에나 나오는, 남자한테 먹이면 눈이 뒤집어져서 달려든다는 그 사랑의 묘약?
이사벨라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는 눈초리로 레티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막 마녀가 쓴다는, 그런 건 아니고요.”
레티시아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냥 기분이 좀 풀어지고 편해져서 연애에 도움을 주는, 뭐 그런 거래요.”
왕년의 이사벨라 같았으면 ‘난 남자 꼬시는 묘약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딴 건 못생긴 너나 써라’를 고상한 말로 돌려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레티시아에게 창피를 주려다가 멈칫했다.
‘내 미모가 상한 건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예배만 보러 가도 뭇 남성의 고개를 단체로 돌리게 했던 예전의 이사벨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남자들의 고개가 여전히 돌아가긴 했다.
그게 전처럼 선망의 시선인지, 아니면 경멸의 시선인지 분간이 안 가서 그렇지.
사람들은 요새 이사벨라를 쳐다보았다가도,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하며 킬킬대고는 했다.
감히, 전에는 눈도 못 마주치던 새끼들이.
그녀에게 만나자고 구애하는 남자도,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도, 질식하기 직전까지 선물을 보내던 남자도 싹 사라졌다.
아무래도 흑사병 탓에 사람을 만날 일 자체가 사라졌고, 이사벨라의 매력은 면대면으로 얼굴을 맞대야 발휘되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면이 컸지만, 당사자로서는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잠식된 나머지 그런 계산을 해 볼 여유가 없었다.
“흐응⋯⋯. 사랑의 묘약이라.”
이사벨라는 올해로 만 19세, 앞자리가 바뀌기 직전이었다. 산 카를로 기준으로는 정말로 꽉 찬 나이, 노처녀 한 치 앞이다.
결혼 자체는 일이 년 뒤에 한다손 치더라도, 지금이라면 약혼자 정도는 있어야 제때 결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사벨라에게는 약혼남은커녕 정기적으로 얼굴을 보는 남자조차도 없었다.
혼약은 집에서 알아봐 주어야 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아버지는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 방면으로는 전혀 언급도 없었고 노력하는 거 같지도 않았다.
결국 초조해진 이사벨라는 레티시아가 건네준 차를 받았다.
“⋯⋯고마워요. 쓸 일이 있을까 싶지만. 어쨌건 생일선물이니까.”
나이를 들먹인 것에 대한 눈치도 적당히 주면서, 이사벨라는 레티시아에게 생일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잘 마실게요.”
남 먹일 거 아니야. 내가 마실 거야. 그런 줄 알라고.
* * *
혼기에 대한 압박을 받는 사람은 이사벨라 데 마레뿐만이 아니었다. 더 급한 사람이 있었다.
“오타비오!”
이사벨라 데 마레보다 세 살 위인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는 약혼자에게 이글거리는 눈빛을 던졌다.
“이제는 우리 이야기를 해 볼 때가 됐어요. 결혼식은 도대체 언제 올릴 건가요?”
카멜리아는 올해로 만 스물두 살, 제아무리 약혼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산 카를로 기준으로는 진짜 완연하게 늦은 결혼이었다.
“사람들이 다 수군거려요! 콘타리니 가문은 카스틸리오네 가문과 연을 맺을 생각이 없다고요!”
새로 시작한 사교 시즌은 카멜리아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새해가 밝아오자 모두가 카멜리아에게 건네는 덕담은 ‘그래서 올해는 결혼해?’였기 때문이다.
간혹 심술궂은 치들은 걱정을 빙자해서 한마디씩 더 보태고는 했다.
‘너희 가문에서 약혼 선물로 콘타리니 가에 투자했었잖아. 요새는 콘타리니 백작가에서 벌이는 사업이 다시 잘 풀리는 것 같던데⋯⋯. 그 돈 갚아버리고 약혼을 없었던 일로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얘!’
오타비오는 어이없다는 듯이 카멜리아에게 통박을 놓았다.
“카멜리아. 왜 그렇게 조급하게 굴어?”
왜 이렇게 예민해?
“이제까지는 흑사병 때문에 결혼식을 올릴 상황이 안 됐던 거잖아?”
“이젠 끝났잖아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카스틸리오네 가의 응접실을 울렸다.
“저는 이제 기다리는데 질렸어요!”
“아니,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차차⋯⋯.”
“약혼만 4년째라고요!”
카멜리아는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고함을 질렀다. 울화통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외침이었다.
“오타비오.”
카멜리아가 갑자기 돌변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타비오를 불렀다.
소리지를 때보다 두 배는 더 무서웠다.
“으, 응? 왜, 카멜리아.”
“전 날씨가 다시 추워지기 전에는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고 싶어요.”
그녀는 결의에 찬 눈으로 오타비오를 쏘아보았다.
“집에 가서 콘타리니 백작님과 일정 협의를 하고 오세요. 만약 다음 달까지 구체적인 일정이 나오지 않을 경우⋯⋯.”
“아, 않을 경우⋯⋯?”
카멜리아는 승부수를 던졌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콘타리니 가에 빌려드린 사업자금을 회수하라고 할 거예요.”
오타비오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 * *
“체자레 공작 각하! 얼굴 뵙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오타비오는 너스레를 떨며 정말 몇 달 만에 간신히 들어온 빌라 소로토네의 응접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거기, 마실 것 좀 없어?”
캐비닛 옆에 서 있던 체자레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네 술고래야? 지금 대낮이야.”
오타비오는 눈을 크게 뜨고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아니, 위대하신 주당 체자레 각하께서 대체 언제부터 술 마시는 데에 시간을 가리셨다고?”
체자레가 술 마시는 시간을 안 가리던 건 아니었다. 몹시 정확하게 가렸다.
다만 낮술이 체자레의 주전공이었고, 아침에 마시는 술은 부득이할 때에만 마셨으며, 저녁에 마시는 술은 좋아하진 않았지만 사회생활의 윤활을 위해 너그럽게 허용했을 뿐이다.
체자레가 대꾸조차 하지 않자 오타비오는 읍소 전략으로 선회했다.
“아, 그러지 말고 한 잔만 줘. 나 오늘 진짜 술이 필요하다고.”
“헛소리하지 말⋯⋯.”
“카멜리아 양이 올가을 전까지 자기랑 결혼 안 하면 우리 집에 빌려준 자금 회수하겠대.”
“!”
체자레는 조용히 잔을 하나 꺼내 그라파를 가득 채워 오타비오에게 건네주었다.
오타비오는 그라파가 발포주라도 되는 양 크게 한 모금 넘겼다.
“캬!”
그는 입가를 닦고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나, 이렇게 유부남 되나?”
“방식이 좀 강압적이기는 하지만.”
체자레는 자기는 물잔을 든 채 오타비오 맞은 편에 앉았다.
“카멜리아 양과는 사실 이제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어? 약혼한 지 진짜 오래된 것 같은데. 카멜리아 양도 과년한 처자고, 자네도 나이가 찼고.”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오타비오는 그라파 잔을 들어 꿀떡꿀떡 마셨다. 순식간에 잔에 담긴 독주가 반 넘게 비워졌다.
“젠장, 이것 봐, 체자레. 난 지금 팔려가는 기분이라고.”
오타비오는 카멜리아가 그에게 최후통첩한 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협박 아니야? 자산 회수를 하겠다니. 그걸 회수해 가면 아버지 앞에서 내 낯이 뭐가 돼!”
콘타리니 가에 그걸 변제할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은 오타비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카멜리아는 너무 드세! 여자가 말이지, 도대체 양보해 주는 맛이라고는 없어!”
체자레는 ‘내가 여자라도 4년 동안 약혼을 질질 끌면서 결혼할 기미조차 안 보이면 들이받겠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런 체자레의 속도 모르고, 오타비오의 토로는 계속됐다.
“또박또박 대들기나 하고, 화도 많이 내고, 참한 맛도 없고⋯⋯.”
“오타비오.”
체자레가 오타비오의 말을 끊었다.
“성격 문제 아니잖아. 성에 안 차는 거잖아.”
체자레는 그렇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 오타비오는 더 성격이 더러운 여자도 자기 마음에만 들면 비위를 아주 제대로 맞추며 만나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
오타비오는 조용해졌다.
“내 말이 틀렸어?”
체자레의 반문에,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아.”
오타비오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상인의 딸과 결혼하기 싫어.”
그게 정말 솔직한 진심이었다.
“카멜리아 예쁘지. 돈 많지. 다 좋아. 좋다고. 그런데 남작가? 작위도 급이 안 맞을뿐더러, 카스틸리오네 남작가가 제대로 된 영지가 있는 가문도 아니고 그냥 장사 좀 해서 돈 번 집 아닌가?”
오타비오는 취기가 좀 올라온 김에 아무렇게나 지껄여댔다.
“오래된 대귀족이 아닌 바에야 아예 권력이라도 빵빵하던가. 자네처럼.”
사생아라서 뿌리는 없지만 잘 나가니까 어울린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체자레는 눈썹을 치켜들었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오타비오가 취했다는 게 너무 노골적으로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아, 인간 됐다. 훌륭한 나 같으니.’
체자레가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는 와중에 오타비오는 중얼거렸다.
“내가 아까워. 내 인생이 아까워. 팔려가는 결혼과 누리지 못한 내 젊음이 아까워.”
혼자서 횡설수설하는 오타비오를 내버려 둔 채, 체자레는 새로운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여자들은 왜 결혼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거지?”
비단 오타비오에게 당장 결혼식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는 카멜리아뿐만이 아니라, 체자레가 만났던 수많은 여자들도 그의 입에서 ‘결혼’을 가리키는 뉘앙스가 나오는 즉시 모든 무장을 해제시키고 허물어졌다. 결혼이 그렇게도 좋은가?
“미혼 영애로 자유롭게 사교계에서 활보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유부녀가 되면 한 남자에게 매이게 되는데 말이야.”
“쯧쯧, 체자레.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모르나?”
그 체자레 공작에게 드디어 저 멘트를 칠 수 있게 된 오타비오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여자란 말이지! 태생적으로 결혼을 원하게 되어 있어!”
취기가 오른 오타비오는 잔을 흔들며 외쳤다.
“그냥 본능에 새겨져 있는 거야! 결혼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고!”
체자레는 오타비오의 개소리에는 귀를 닫기로 했다. 저놈은 맛이 갔다.
그리고 애초에 멀쩡할 때도 들을 만한 소리를 자주 하는 놈도 아니다.
“그거 다 마시면 꺼져.”
“체자레!”
오타비오가 하도 징징거려서 술이 당길 지경이었다.
아니면 코앞에서 낮술을 마시는 놈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술이 당기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사람이 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체자레는 혀끝에서 당기는 톡 쏘는 알코올의 유혹을 이겨내리라고 결심했다.
‘그래. 결혼.’
약혼을 한 지도 삼 개월여가 지났다. 결혼까지 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뭐, 좀 급하다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애초에 약혼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해치웠는데 결혼이라고 몇 년 끌 필요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그는 결혼하기 싫다고 소파를 데굴데굴 구르는 오타비오를 흘긋 쳐다보았다.
‘복에 겨워 방 안에서 똥을 싸는 놈 같으니.’
내가 저놈보다는 먼저 식을 올리고야 말리라, 라고 체자레 공작은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