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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51화 (251/733)

<제251화> 오래된 악연

체자레도 레오 3세를 앞에 둔 아리아드네의 긴장을 느꼈다.

‘걱정하지 마’ 따위의, 간단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까 고민하던 체자레는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딱딱하게 굳은 티가 나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맞더라도 내가 먼저 맞을 테니까. 아가씨는 전속력으로 도망치라고.”

체자레의 너스레에, 아리아드네는 다시 한번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들이 이렇게 시시덕거리는 와중에 레오 3세가 루비나 공작 부인과 함께 무도회장인 ‘백합의 방’으로 이어지는 귀빈 통로 방향으로 다가왔다.

아리아드네와 체자레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왕국의 태양을 뵙나이다.”

아들과 아들의 약혼자이니 적당히 일어나라고 말할 법도 한데 레오 3세는 그들이 예를 다 갖추는 것을 끝까지 다 확인한 다음에야 그들에게 허락을 내렸다.

“일어나라.”

“은혜에 감사드리나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등 뒤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비나 공작 부인이 있었다.

수행원들이 그녀의 뒤에 길게 늘어서 정비나 마찬가지인 위세였다.

왕비나 쓰는 높은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머리에 얹고, 국왕의 처제 자격으로 국왕의 공식 파트너로서 국가 행사에 참여한다.

의전의 급도 왕비나 다름이 없었고 몸에 두른 것의 호화로움은 돌아가신 왕비님보다도 더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 자리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난겨울의 새 왕비 간택 사건으로 그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루비나 공작 부인의 자리를 위협하던 새파랗게 어린 것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의 손을 잡고.

“⋯⋯데 마레 여백작.”

신분이 낮은 사람은 형식적인 예를 취할 때를 제외하고는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다.

무도회 내내 아리아드네에게 말을 걸지 않고 투명인간 취급할까를 고민하던 루비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루비나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아리아드네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오랜만에 보는데, 먼저 인사라도 왔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루비나 공작 부인은 차마 ‘내가 불렀는데 네가 안 왔더라?’ 소리는 체면상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체자레의 눈썹이 대번에 올라갔다.

아리아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답했다.

“제가 거기까지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꼭 미리 알현 신청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히 공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말하는 유순한 정답이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가 뭔지 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레오 3세는 평소라면 예비 며느리에게 시비를 거는 루비나를 말렸을 법도 하지만, 한 마디도 안 한 채 이 상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이 상황을 수습한 것은 체자레였다.

“국왕 폐하, 그간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질 일이 뭐가 있다고.”

“역병도 물러가고 날씨도 풀리니, 이게 다 폐하의 은덕이 높아서 일어난 일 아닙니까. 저잣거리에도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지난가을과 겨울에 파종을 못 했기 때문에 봄 수확철은 공쳤고, 돌아오는 가을까지는 다들 꼼짝없이 보릿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처지였지만 남측과의 무역이 뚫려 지난겨울보다는 지낼 만했다.

레오 3세는 체자레의 공치사에 딱히 대답을 하지는 않았으나 표정을 보니 칭찬을 듣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던 듯했다.

“들어가지.”

“예 폐하.”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자, ‘백합의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왕궁 시종들이 입장을 알렸다.

- “국왕 폐하 입장하십니다—!!”

팡파르와 함께 일제히 그들에게 집중되는 시선.

‘아, 이게 이런 기분이었지.’

누군가에겐 척추 끝부터 올라오는 기쁨의 폭발일 일이었지만 아리아드네에게는 아득한 옛 기억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에게는 그저 일상처럼 익숙한 일일 뿐이었다.

“난 저 시선이 싫어.”

체자레가 투덜거렸다. 아리아드네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런 거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체자레는 약간 인상을 썼다.

알폰소가 있을 때는 그와 비교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서 기를 썼었다.

지금은⋯⋯. 그저 편안하게 데 마레 대저택의 응접실에서 노닥거리는 편이 더 좋았다.

이런 기분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서 체자레는 대충 대답했다.

“철들었나 봐.”

아리아드네는 살짝 웃었다. 사람은 역시, 바뀔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이내 무도회의 첫 춤을 출 시간이 다가왔다.

레오 3세와 루비나 공작 부인은 그런 일을 직접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체자레와 아리아드네 커플보다 더 신분이 높은 젊은이는 수도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의 시선 집중을 한몸에 받으며 무도회의 첫 왈츠를 췄다.

체자레는 평소와 같이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러운 무대 매너를 뽐냈고, 아리아드네도 이제는 완전히 재적응한 사교계에서 완벽한 춤을 선보였다.

첫 왈츠의 마지막 음표가 끝나고, 약간 숨을 헐떡거리는 아리아드네의 상기된 붉은 볼을 보며 체자레가 한마디를 건넸다.

“예뻐.”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요.”

붉은 예복과 드레스를 맞춰 입은 그들은 정말로 한 쌍의 선남선녀였다.

무도회에 참석한 모두가 체자레 공작과 데 마레 백작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첫 춤을 춘 이후로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레오 3세와 루비나 공작 부인이 버티고 앉은 귀빈석이었다.

체자레가 물었다.

“아무래도 저긴 불편하지?”

“괜찮아요.”

“가시방석일 거 같은데. 일단 나부터도 싫다고.”

체자레로서도 레오 3세와 오랫동안 동석해 있는 자리는 부담이었다.

원망과 분노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 무도회는 어머니께서 진두지휘하셨는데, 어머니라면 분명히 방 몇 개를 따로 떼어놓으셨을 거야.”

루비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으스댈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성격이었다.

전 같았으면 분명히 체자레에게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며 미리 줬겠지만, 오늘은 아리아드네가 체자레의 파트너라서 그런지 따로 언질이 없었다.

“내가 가서 하나 받아 올게. 잠깐 기다리고 있어.”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귀빈석 쪽을 흘긋 바라보고는 말했다.

“귀빈석 쪽으로는 굳이 갈 필요 없고.”

아리아드네가 무도회장을 헤매다가 라파엘 데 발데사르 같은 날파리가 꼬이는 편이 그녀를 혼자 레오 3세의 눈앞에 두는 것보다는 낫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요.”

이렇게 아리아드네와 떨어지게 된 체자레는 루비나 공작 부인을 찾아 무도회장을 누볐다.

그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피사노 공작!”

“아, 반갑습니다. 살바티 후작. 혹시 저희 어머니 못 보셨나요?”

“여어, 체자레!”

“그래그래, 안토니오.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지. 지금은 바빠.”

‘신분이 낮으면 말을 걸 수 없다’는 규칙의 예외는 평소의 친우 등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예외를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알폰소 왕자에게보다는 체자레 공작에게 유독 더 많았다.

체자레가 알폰소보다 사람들에게 더 살갑거나 친근한 것도 아니었다. 낮추어 보는 마음의 발로였다.

전 같았으면 발끈했겠지만 체자레는 다 좋은 마음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으니까.

인파를 뚫고 루비나 공작 부인을 찾아가던 체자레에게 어떤 여자 목소리가 날아왔다.

“체자레 공작님. 잠깐만요!”

이건 친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체자레는 그 여자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데 마레 영애?”

체자레를 불러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아리아드네의 친언니, 이사벨레 데 마레였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체자레 공작님. 당신 지금 헛심 쓰시는 거예요.”

* * *

이사벨라는 무도회에 와서 만난 오타비오로부터 체자레의 프러포즈 관련 굴욕을 전해 들었다.

“어머!”

“전 체자레가 여자한테 차이고 온 것도 처음 봤고, 그렇게 의기소침한 것도 처음 봤습니다.”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는 요새 비뚤어지고 싶었다. 결혼을 앞두고 하는 마지막 반항이었다.

그래서 파트너인 카멜리아를 뒤에 세워두고 친오빠인 이폴리토와 함께 나타난 이사벨라와 시시덕거렸다.

이사벨라와의 대화 물꼬를 틀만 한 관심사로는 단연 요새 개심했다고 말이 많은 체자레 공작 이야기가 잘 먹혔다.

“술 다 끊고 몇 개월 동안 놀아주지도 않았는데, 글쎄 그날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그라파만 붓더라니까요!”

체자레가 아리아드네에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사벨라는 자기가 되레 화가 났다.

‘깜냥도 되지 않는 계집애가, 어딜 나도 못 가지는 체자레 공작을 거절해?’

하지만 화 따위로 가뜩이나 제한된 대화 시간을 더 잡아먹을 수는 없었다.

뒤에서 암사자같이 분노한 카멜리아가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분노의 정도가 계속 올라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왜 차였대요?”

“그게, 고백을 너무 멋없이 했지 뭡니까!”

이사벨라는 그게 원인이 아닐 거로 생각했다.

진짜 원인은,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콧대가 지나치게 높아 왕자비가 아니라 공작 부인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애는 애초에 사치품이나 보석 같은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많기는 했으되 그저 순전히 도구나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만 보았지 이사벨라 본인처럼 예술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그런 형이상학적 심미안이 없었다.

예술애호가의 눈이 아니라 천박한 상인의 눈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사람은 프러포즈라던가 이벤트 같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아름다운 일들에 큰 가중치를 두지 않는 법이다.

“흐응⋯⋯.”

체자레 공작과 대화를 해 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마침 같은 무도회에 참석 중이다.

급하게 온 기회라 준비물을 챙겨오진 못했지만 한번 던져볼 만은 했다. 이사벨라의 눈이 빛났다.

* * *

귀빈석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곳에 있자니, 무도회장이 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갈 곳이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붉은 드레스는 100 피에디 밖에서도 시선을 확 잡아끌었고, 그녀는 지금 온 수도 사람들의 관심 제1순위였으며, 레오 3세와 루비나 공작 부인, 그리고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모르거나 스쳐 지나갔던 정도의 사람들을 피하려니 정말로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친한 사람을 찾아 그 옆에 딱 붙어 있으려다가 실패한 아리아드네는 전략을 바꿨다.

‘발코니에 숨어 있어 볼까⋯⋯.’

그녀는 정원 쪽 벽면으로 붙어 빈 발코니를 헤아려보았다. 이런 곳은 아무 데나 불쑥 들어가면 안 된다.

젊은 연인이 미리 점거하고 있으면 피차 못 볼 꼴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비교적 조용한 발코니 하나를 점찍어 귀를 기울여 보았다. 선객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체자레 공작님.”

아리아드네의 귀에 아주 익숙한 이름과,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꽂혔다.

꾀꼬리같이 청아하고 여성스럽게 사분사분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던지는 다음 대사는 점입가경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

아리아드네는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저 둘은 그녀에게 몹시 익숙한 조합이기도 했다.

‘⋯⋯체자레. 이사벨라 언니.’

아리아드네의 눈이 발코니를 가리고 있는 얇은 커튼 한 장을 뚫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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