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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52화 (252/733)

<제252화> 과거의 편린

발코니 커튼 밖에 누가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이사벨라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혼인을 구걸하는 거, 자존심 상하지도 않나요?”

이사벨라는 도발적으로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날씬한 실루엣이 달빛에 비추어 조각상처럼 돋보였고, 은사로 은은하게 무늬가 들어간 엷은 노란색 드레스는 지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커튼 밖의 아리아드네와 커튼 안의 이사벨라 둘 다, 귀를 쫑긋 세우고 체자레의 답변만을 기다렸다.

이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체자레의 오뚝한 콧날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요, 데 마레 영애?”

체자레는 천천히 물었다. 이사벨라는 의외의 답변에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럼,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체자레 공작님?”

체자레는 느른하게 답했다.

“그게⋯⋯. 나만 하고 있는 짓거리 같지도 않아서요.”

“네?”

“데 마레 영애, 지금 당신도 똑같은 활동 중이신 거 아닙니까?”

“!”

이사벨라의 자신만만했던 얼굴이 수치심에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녀는 체자레에게 톡 쏘아붙였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체자레는 약간의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이사벨라 데 마레 양께서 설마 별 친분도 없는 제가 사랑 없는 결혼을 할까 봐 인류애적인 걱정이 되셔서 절 굽어살펴주시고자 여기에 나타나신 건 아닐 거고.”

그는 말을 끊고 이사벨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동생이 빠져나간 자리에 본인이 들어가시려고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지금.”

체자레는 이사벨라를 보며 노골적으로 피식 웃었다.

“지금 이사벨라 양이 저에게 들이대시는 게 이번이 두 번째죠?”

‘!’

커튼 밖의 아리아드네가 귀를 쫑긋하게 세웠다. 그녀로서는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체자레는 지금, 작년 ‘봄의 축제’ 때 이사벨라가 그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던 일을 일컫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몇 번을 물어보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리건대, 전 이사벨라 양에게 관심이 없어요.”

이사벨라의 예쁜 얼굴이 다시금 새빨개졌다.

“지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체자레가 한 말은 맞는 말이라 두 배로 아팠다. 그래서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그때는 그저 무도회 파트너 제의에 불과했을 뿐이에요! 제가 언제 공작님께 청혼이라도 했나요?”

이사벨라는 언성을 높였다.

“저는 사실만을 말해요! 아리아드네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사실이에요! 전 자매니까, 당신이 모르는 아리아드네의 속내까지 다 알고 있다고요!”

하지만 체자레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두 분이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좋은 자매셨습니까?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는 사이인 거, 온 산 카를로가 다 아는데?”

체자레는 이사벨라에게 대고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낮에는 사이가 몹시 나빴던 동생이 혹시 밤에는 베개라도 들고 언니 침실로 찾아가 사랑하지 않는 약혼자에 대한 속내라도 이야기하던가요?”

이사벨라는 이를 악물었다.

“즈⋯⋯, 증거가 있어요!”

안타깝게도 아리아드네의 편지뭉치는 오늘 들고 오지 않았다.

바로 터트릴지 여부는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코너에 몰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 존재가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하지만 체자레는 이사벨라의 말을 한 치도 믿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 대한 증거가 도대체 뭐가 있을 수 있죠? 아, 혹시 일기장이라도 훔쳐보셨나?”

사교계에서 평생을 굴러온 남자의 혀끝은 신랄했다.

“약혼녀의 친혈육이라 상대라도 해 드리는 겁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앞으로도 듣고 싶지 않군요.”

그는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이사벨라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동생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데 마레 영애. 그래야 데 마레 백작의 영향력으로 혼처라도 구해 주지요. 지금 슬슬 급하실 것 같은데.”

“이익⋯⋯!”

이사벨라는 분에 겨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체자레의 말에 화난 이사벨라는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더 하는 것을 포기했다.

저 멍청한 쓰레기는 당해 봐야 한다. 체자레 같은 바보는 자기가 구해 줄 필요가 없었다.

“당신, 그 막말, 후회할 거예요!”

“사람은 모름지기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사벨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체자레는 입가에 초승달 같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제 기억에 이사벨라 데 마레 양은 이거보다는 좀 더 영리하셨던 것 같은데. 혼기는 찼는데 갈 데가 없으셔서 그러신가, 무리수를 마구 던지시는 꼴이 아주 짠합니다.”

이사벨라는 체자레를 노려보며 외쳤다.

“결혼하자고 했다가 대놓고 거절당하셨다면서요? 그 청혼, 절대로 성공 못 할걸요!”

하지만 체자레는 자신만만했다.

“두고 보지요. 영애가 맞는지, 제가 맞는지.”

체자레는 무도회장 쪽으로 몸을 돌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제 슬슬 이 자리를 마무리하겠다는 의도가 몸짓에서 보였다.

무도회장 내부에 가득 켜진 촛불 불빛이 반사되어 가뜩이나 붉은 그의 머리카락이 불타오르듯이 빨갛게 빛났다.

“이런 쓸데없는 일에 쓸 시간이 없어서. 이만 실례.”

체자레는 발코니의 커튼을 촤악 열어젖혔다. 약간의 짜증이 들어 있는 거친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 커튼이 걷힌 자리에는 피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리아드네가 있었다.

체자레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씨, 여기 있었어?”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그리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입맞춤을 피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남들 앞에서 체자레와 친밀해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언젠가 돌아올 알폰소를 다분히 의식한 행동이었다.

공공장소에서는 예법에 맞는 에스코트 외에는 손조차 잡지 않으려고 들었다.

하지만 이사벨라가 그 자수정 눈에 독기를 가득 채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체자레 데 코모를 가지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로. 과거와 현재가 겹쳐졌다.

아리아드네는 그 유혹에 굴하고 말았다.

“⋯⋯!”

이사벨라의 시선이 그 입맞춤을 정통으로 노려보았다.

사슴처럼 가녀린 이사벨라의 전신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이런 굴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녀는 결국 아껴두려고 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버렸다.

“너, 네가 이러는 거 알폰소 왕자님은 아시니?”

편지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건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이사벨라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리아드네에게 시선을 똑바로 고정했다.

“네 애인은 지금 자기 여자친구가 이복형과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고!”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아리아드네가 아닌 체자레였다.

“하하하하, 잠시만. 설마 데 마레 영애께서 제게 해주고 싶으시다는 제보가, 제 약혼녀가 알폰소 전하와 사귀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까?”

이사벨라는 체자레의 태연자약함에 놀라면서도 강단 있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녀는 체자레를 노려보며 외쳤다.

“내 야심만만한 여동생은 왕자비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당신 따위에게는 자신을 허락할 리 없죠!”

이사벨라는 체자레를 향해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돌진하시는 가엾은 분.”

하지만 체자레는 이사벨라의 비웃음을 미소로 되받았다.

“언제 적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예?”

이사벨라는 의외로 굳건한 체자레의 믿음에 당황했다.

“아리가 알폰소 전하와 친밀하다는 사실은 애초에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체자레는 이사벨라가 사냥대회에서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

그는 철석같이 아리아드네를 믿은 채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고.”

그는 아리아드네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지금 그녀는 제 약혼녀이고.”

체자레는 자신과 같은 옷을 맞춰 입은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감싸 안은 자신의 팔에 힘을 주었다.

“아리아드네는 피사노 공작 부인이 될 겁니다. 과거는 과거로 끝난 겁니다.”

체자레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아리아드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자주색 눈에 노여움을 드러내며 여동생에게 외쳤다.

“너, 정말로 체자레 공과 생각이 똑같아?”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가 알폰소에게 보낸 편지들을 본 적이 있다.

당연히, 그녀가 체자레를 거절할 거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아닌 거 알고 있어!”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못된 충동을 느꼈다.

고해성사는 모든 일이 끝나고 신부님께 가서 하면 그만이다. 굳이 이사벨라 앞에서 할 필요가 있겠는가.

“언니⋯⋯.”

아리아드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 조그만 미소가 떠올랐다.

“언니가 이 사람 가지고 싶어 하는지 몰랐어.”

“뭐?”

“가지고 싶었으면 약혼 전에 미리 얘기하지 그랬어.”

이사벨라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 참담한 자조가 서렸다.

반면, 아리아드네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상황이 닥쳐오자 멈출 수가 없었다.

여성적인 매력으로 이사벨라를 이기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저 체자레가 자신의 편을 들어서.

이것은 완전히 체제의 전복이었고, 아리아드네의 인내와 신중함으로도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흥분이었다.

“지금은 이미 늦어버렸는데.”

- “체자레가 나를 찾아와서 애원을 하더구나. 너와 약혼을 했던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고. 너를 안으면서도 내 상상을 하며 안았다고.”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 “너는 누구에겐가 이렇게 허기진 갈망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있니?”

- “네 머리카락은 시꺼메서 갈가마귀 같다네.”

- “이게 너와 나의 차이야.”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체자레를 톡톡 쳤다.

체자레는 약혼녀가 부르는 몸짓에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음?”

- 쪽.

아리아드네가 체자레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벼운 버드키스였지만, 그녀가 회귀한 후로 체자레에게 먼저 시작한 최초의 스킨십이었다.

이사벨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도자기 같은 새하얀 피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졌다.

분이 하늘에 뻗쳤는지, 예쁜 눈가에는 눈물마저 맺혔다.

“너⋯⋯! 너⋯⋯!”

체자레는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약혼 당사자들끼리 예에 어긋나지 않는 애정표현 중인데 어디 문제라도?”

이사벨라는 악이 오른 표정으로 체자레에게 씹어 뱉듯이 외쳤다.

“병X!”

분노로 예쁜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흡사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 같았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얼굴 근육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후회하게 될 거야!”

이사벨라는 큰 소리로 내지르고는, 발코니에서 달아나듯이 달려 나가 버렸다.

체자레는 가볍게 웃었다.

“퇴치한 것 같은데?”

“⋯⋯그러네요.”

그는 아리아드네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이거, 고무적인데? 우리 수줍은 아가씨가 처음으로 나한테 먼저 키스해 준 거 아니야?”

“조용히 해요. 그거 키스 아니에요.”

“역사적이잖아? 안 그래?”

“아 좀!”

아리아드네의 짜증에 체자레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 미안. 그만 놀릴게. 우리 쉬러 갈까? 어머니께서 잡아두신 방을 하나 뺏었어.”

아리아드네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실감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다소, 아니 몹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체자레의 에스코트를 받아 무도회장을 가로지르며, 왕궁 시종이 들고 돌아다니는 쟁반 위에서 과실주를 한 잔 집어 쭉 비웠다.

체자레가 그걸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게, 다 이상한 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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