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그릇된 해석 (2)
따귀를 얻어맞은 체자레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하지만 패닉한 아리아드네에게는 그의 감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요!”
체자레는 밀려 들어오는 억울함에 심호흡을 했다.
조금 전 그 상황에서 밀어붙이고, 저지르고, 흐느껴 우는 여자를 살살 달랜 후 연락을 끊어버리는 건 식은 수프 먹기보다도 쉬웠다.
정말 잘해보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참았는데.
그녀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게 자신의 악명 때문일까 봐 걱정돼서, 그래서 힘겹게 참은 거였는데.
“뭐?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체자레의 언성이 슬슬 함께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손 안 댔잖아! 원하는 대로 다 해줬잖아! 뭐가 불만이야?”
아리아드네는 반대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녀의 왼손은 이제 새빨간 반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것을 넘어서서 선혈에 담갔다가 빼낸 것 같았다.
의사를 부르자는 산차의 말에,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된다며 의연한 척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참을 수 없을 때마다 왼손을 수세미와 비누로 박박 닦아냈다.
상한 피부는 그 위에 순차적으로 얹혔고 이제는 군데군데 각질과 고름마저 더께같이 쌓인, 참혹한 몰골이 되었다.
이건 혼인적령기 여인에게는 끔찍한 형벌이다. 사람 자체를 추물(麤物)로 만드는 되돌릴 수 없는 장애다.
⋯⋯이걸 체자레에게 들킨다면?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아리아드네는 체자레가 언성을 높이자 마주 소리를 질렀다.
“뭐가 손을 안 댄 거야! 자기 맘대로 다 했으면서! 내가 장갑 건드리지 말랬잖아!”
체자레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멈추지 않았으면, 마당에서 기르는 개처럼 고분고분하게 네 말에 넙죽 엎드리지 않았으면 네가 지금 내 앞에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었을 것 같아?!”
그는 한 걸음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서며 외쳤다.
“솔직하게 말해, 싫지 않았잖아. 발코니에서 지금까지 계속 뜨듯미지근하게 나오다가 지금 갑자기 왜 이렇게 구는 거지?”
체자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기어이 하면 안 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재미 다 보다가 뒤늦게 알폰소 새끼가 생각나서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떠나간 님을 위해 순결을 지키는 거야?”
“뭐라고요?”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체자레의 저 말은 그녀의 잘못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나는 마땅히 알폰소를 생각해서 체자레를 밀어냈어야 했었나.’
그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체자레 본인까지 포함한 남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 역시, 반쯤은 알면서도 체자레의 역린을 밟았다.
“당신,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이었지만 체자레는 그녀의 미간에 약간의 비웃음이 서려 있다고 느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지금 바다 건너서 대륙을 떠난, 편지에 답장 한 통 없는 배다른 동생이 그렇게 무서워?”
“닥쳐!”
체자레의 얼굴 역시 시뻘게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닥치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신이야!”
내가,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아리아드네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알폰소 왕자는 좋은 사람이다.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눈앞의 체자레보다, 그리고 이렇게 갈대처럼 흔들리는 아리아드네 본인 따위보다 백 배는 더 좋은 사람이다.
그녀는 달콤한 유혹에, 체자레의 아름다움에, 자신의 욕심에, 돌아오는 과거의 조각들에 휩쓸려 그만 알폰소의 손을—알폰소가 여전히 그 손을 잡고 있을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놓아 버리기 직전까지 와 버렸다.
당신은. 야속하게. 내 마음도 모르고.
전하지 못할 말이 입술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대신 뾰족하고 날 선 단어들이 튀어 나갔다.
“내가 망설이는 건 알폰소 왕자의 환영 때문이 아니라 당신을 못 믿기 때문이야!”
극한에 몰려서야 본심이 나왔다.
전생에 못났던 자신에게 너무나 차가웠던 체자레. 아름답고 기세등등한 이사벨라에게로 떠나버렸던 체자레.
약한 자에 대한 긍휼함이라고는 없었던 체자레. 냉정하게 사람의 가치를 따져서 가격표를 매기던 체자레.
- “네 가슴은 너무 크고 쳐져서 젖소인 줄 알았대!”
귓가에 낭랑한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렸다. 저 말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디토 단위로 그녀를 쪼개어서 평가하던 체자레가 과연 그녀의 왼손을 본다면 자신의 반려로 그녀를 받아들여 줄까?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외침을 정반대로 받아들였다.
그의 화려한 과거 때문에 지금의 순정도 믿지 못하겠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다.
“한 번 잘못하면 영원히 끝이야?”
방탕한 생활은 모두 청산했다. 술도, 친구도, 카드 모임도 죄다 끊었다.
예전과 비교하면 체자레의 생활은 수도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비운 일상 하나하나에, 아리아드네가 들어차 있었다.
“다 약혼 전에 있었던 일이야. 내가 어디 당신이랑 만나면서 한눈판 적 있었어?”
그는 분노에 차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간 했던 노력은 전부 다 헛수고였다.
“과거는 이미 흘러간 과거잖아! 내가 당신과 약혼한 이후로 진짜 집에서 키우는 개인 양 부르면 헐떡이며 달려가고 꿇으라면 꿇고 구르라면 구른 건 기억도 안 나지!”
그는 답답함에 가슴을 쾅쾅 쳤다.
“여기서 나한테 뭘 더 바라? 도대체 내가 뭘 더 해야 나를 믿겠어? 성황청에 뛰어가서 면죄부라도 사 올까?!”
체자레의 위협적인 언동에 아리아드네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일단 언성부터 낮추라고요!”
하지만 분노한 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소리는 네가 먼저 질렀어!”
이제는 슬슬 정말로 무서워졌다. 아리아드네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체자레를 올려다보며 반쯤은 비난을, 반쯤을 호소를 섞어 말했다.
“날 사랑한다면서 이렇게 강압적으로 굴기에요?”
“사랑?! 하!”
그러나 그 단어가 체자레의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그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사랑, 그래 말 한번 잘했다!”
그는 상처와,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그래, 고귀하신 데 마레 여백작께서는 이 미천한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이까?”
그의 눈에서 불이 번득였다.
“당신을 구하려고 목숨까지 걸고 달려갔던 이 우매한 족속에게 그대께서는 아직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씀을 내려주신 적이 없사옵니다?”
연극 톤의 빈정대는 말투 속에 그가 입은 상처가 절절히 흘렀다.
“난 하루에 골백번, 아침 먹을 때, 점심 먹을 때, 저녁 먹을 때에 맞춰서 꼬박꼬박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아, 횟수가 그거보다 모자랐다면 그건 이 미천한 자의 본의가 아니었다오. 그대께서 하도 찬바람이 쌩쌩 부셔서 감히 사랑한다는 말씀을 못 올렸을 뿐이지.”
그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녀에게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함께하자고.
그리고 매번 농담하지 말라며 체자레의 고백을 수작 취급하며 차갑게 쳐냈던 것은 그녀였다.
“⋯⋯날, 사랑하긴 해?”
체자레의 물빛 눈이 아리아드네를 간절하게 쫓았다.
“응? 아리아드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나한테 너를 허락할 거야.”
아리아드네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녀는 울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알폰소를 완전하게 저버리게 된다.
그게 그녀가 내심 정해놓은 선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한 걸음 더 나아가기에는 체자레를 충분히 믿지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관계 진전은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그녀는 끝까지 허락한 후 갑자기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듯 순식간에 어두워졌던 체자레의 애정을 기억한다.
사냥에 성공한 포식자는 배가 꺼질 때까지 아주 잠시 옆에 엎드려 있다가 어슬렁대며 다음 사냥감을 찾아 떠났다.
약혼자의 집에 무방비로 맡겨져 있던 아리아드네는 심심풀이 도시락 같았다.
약혼 기간이 길어지면서, 배가 고픈데 마땅한 상대가 없었을 때 체자레는 집으로 돌아와 배를 채우고는 이내 다시 떠났다.
텅 빈 침실에서 더럽혀진 시트와 함께 눈뜨던 과거를 기억한다.
옆 사람이 남기고 간 온기는 차갑게 식어버리고, 뒤처리는 온전히 그녀만의 몫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못 믿겠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날 믿을 거야?”
답답함에 사무친 이번 생의 체자레가 외쳤다.
“가슴이라도 갈라서 심장이라도 꺼내 보여줄까?”
그는 항상 차고 다니는 사냥 칼을 찾아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레오 3세의 몸수색 덕에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옆의 테이블에 놓인 편지 개봉용 나이프를 들어 가슴에 들이댔다.
“내 심장을 보여주면 날 믿어 줄래?”
“쓸데없는 짓은 그만해요.”
“답답해서 그래!”
그는 뭉툭한 편지 나이프로 가슴을 찔렀다. 날이 전혀 서 있지 않았지만 쇠붙이는 쇠붙이였다.
체자레의 열린 셔츠 사이로 나이프가 들이박혔고, 나이프는 날붙이라기보다는 몽둥이처럼 그의 가슴팍을 타격했다.
피멍은 족히 들 강도로 그는 재차 가슴을 찔렀다.
“꺅!”
아리아드네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만하라고요!”
체자레는 그녀의 호소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반쯤은 말릴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반쯤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방문을 열려고 했다.
그녀가 아닌 누군가가 나타나면 체자레를 말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를 자극하는 것 외로는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 철컥, 철컥철컥.
하지만 당황한 나머지 문손잡이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체자레는 아리아드네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자신을 두고 떠나려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였다.
“하!”
절망적이었다. 결국엔 혼자 남는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를 버렸고, 텅 빈 궁에 영원히 혼자.
“⋯⋯결국은 너도 다른 여자들과 똑같아.”
체자레의 낮은 혼잣말에 아리아드네가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등 뒤로 계속 문고리를 열려고 시도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가 피 맺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다들 좋다고 하지. 어디까지나 함께하겠다고. 그러다가 내가 진짜로 어떤 놈인지 알게 되면 다 도망쳐 버리지.”
울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건간에 당신은 날 떠날 거고, 난 결국 혼자고.”
- 철컥, 철컥, 삐그르르르.
반복적으로 문고리를 열려고 시도하자 계속 잘못된 곳에 걸려 멈추던 문고리는 결국 우연찮게 아귀가 딱 맞아 들어갔다.
문이 부드럽게 열렸고, 체중을 뒤로 실어 문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문이 열리자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러나저러나, 탈출 성공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참았지만 넘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 털썩!
호화로운 드레스와 장식품, 사람 체중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바깥 복도는 방을 배정받은 귀한 손님들과 그들 눈에 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호사가들이란 호사가들은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이 무도회장에서 사람이 엉덩방아를 찧는 이벤트를 놓칠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 넘어진 사람이 피사노 백작의 약혼녀, 데 마레 백작이라면 더더욱.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 “어머,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요?”
- “데 마레 여백작⋯⋯?”
- “옷차림이 왜 저래⋯⋯?”
아리아드네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문간에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옷차림 역시 엉망이었다.
파틀렛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벗겨져 있었고 코르피케도 단추가 반쯤 열려 있는 상태였다.
누가 보아도 방에서 도망치려다가 스텝이 꼬여 넘어진 모습이다.
그리고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체자레의 모습 역시 정상적이지 않았다.
얼굴은 시뻘게진 상태였고 셔츠 앞섬은 풀려 있었다. 분노해서 씩씩거리는 와중에 손에는 나이프마저 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아⋯⋯. 젠장⋯⋯.’
사람들에 둘러싸인 아리아드네는 지금 자신의 몰골과 체자레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깨달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
체자레를 데리고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갈까? 아예 무도회에서 떠나 버릴까?
빠르게 방도를 고민하던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 지금 이게 무슨 일이예요!”
그녀의 몰골을 보고 혼비백산한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인파를 헤치고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