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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56화 (256/733)

<제256화> 시험

라파엘의 에스코트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몹시 어색했다.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에게 ‘정말로 체자레가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라는 해명을 하려고 했지만, 라파엘은 그녀의 이야기를 끊었다.

뭔가 다 안다는 태도였다.

“쉬어요, 아리. 지금 굳이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뭐라고 말해도 듣지 않을 태세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리아드네 역시 굳이 라파엘을 붙들고 자신과 체자레가 보기보단 가까운 사이임을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알폰소의 귀에 들어갈까 봐 그런 거야, 라고 손쉽게 생각해 버린 그녀는 굳이 그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해야 할 당면 과제가 너무 많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리아드네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자신의 서재였다.

- 드르륵!

거친 손길로 열린 책상 서랍에는 각종 서류와 필기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찾고 있는 것은 서랍 안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녀는 서랍 바로 위의, 당겨서 늘릴 수 있는 책상 선반에 켜켜이 쌓인 양피지 뭉치를 통째로 집어 들었다.

그녀가 알폰소에게 썼던, 하지만 차마 보내지는 못했던 편지들이었다.

- 사르륵.

아리아드네는 빠르게 편지 뭉치를 훑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이거였구나, 이사벨라 언니가 이야기했던 게!’

알폰소에게 쓴 그녀의 편지 뭉치는 앞부분은 대부분 온전히 남아 있었으되, 최근에 쓴 뒷부분은 싹 사라져 있었다.

“산차!”

아리아드네는 목소리를 높였다.

“네, 아가씨!”

“안나와 비센테, 그리고 믿을만한 하녀 두어 명을 더 데려와!”

산차가 방에서 급하게 설렁줄을 당겨 바로 연락이 되는 안나와 비센테부터 불렀다.

산차는 그들에게 하녀 두어 명의 이름을 더 대며, 그 친구들을 불러오라고 일렀다.

아리아드네는 분노한 얼굴로 산차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사벨라 언니의 방으로 가자.”

- 쾅!

아리아드네는 하녀장 산차와 자신의 직속 하녀들을 이끌고 이사벨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에구머니나!”

이사벨라의 방 안에 혼자 앉아서 주인 없는 휴식을 만끽하고 있던 이사벨라의 전속 하녀 시에나가 화들짝 놀라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아, 아리아드네 아가씨⋯⋯. 아니 백작님! 여기는 무슨 일로⋯⋯.”

“비켜!”

시에나를 거칠게 밀어낸 건 산차였다. 산차는 나머지 하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샅샅이 뒤져!”

“네!”

시에나는 짧은 비명을 몇 번 질렀지만 적극적으로 산차와 그 휘하 하녀들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데 마레 가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누가 실세인지를 파악할 정도의 눈치는 있었던 모양이다.

산차와 시녀들은 이사벨라의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목적물을 찾았다.

서랍을 뽑아서 바닥에 엎고, 장롱을 열어 옷가지들을 모두 탈탈 털어 원목 마루에 던졌다.

충성심보다는 자기의 노무가 걱정된 시에나의 ‘아이고, 아이고!’ 소리만 방을 메울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 희열에 찬 하녀 비센테의 목소리가 울렸다.

“찾은 것 같습니다, 아가씨!”

비센테는 이사벨라의 비단을 보관해놓는 장 맨 밑바닥에 깔려 있던 양피지 뭉치를 손에 쥐고 허공에 흔들었다.

“이거 맞나요?”

산차를 제외한 하녀들은 대부분 까막눈이었으므로, 양피지 뭉치가 자기들이 찾던 목적물인지 여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비센테가 건네준 양피지 뭉치를 받아 들은 아리아드네는 재빠르게 그것을 훑어보았다.

「사랑하는 알폰소에게,

날씨가 추워지니 네 걱정이 더욱 많이 돼. 예사크는 산 카를로보다 기후가 온화하다고는 하지만, 군인의 주둔지가 생활하기 편할 리가 없잖아⋯⋯(후략).」

심증이 사실로 변하자 아리아드네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분노했다.

“이사벨라!”

이건 선을 넘은 짓이다. 양피지를 넘기는 아리아드네의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대략 작년 12월부터 그녀가 알폰소에게 썼던 편지들은 대부분 다 여기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드문드문 몇 장이 빠져 있었다.

‘없어진 거야⋯⋯? 아니면, 다른 데 숨긴 건가?’

숨도 못 쉬고 이사벨라의 방 정 가운데에 우뚝 서서 양피지를 넘기는 아리아드네의 귀에, 째질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방 주인이 뒤늦게 무도회에서 귀가한 것이다.

그녀의 무도회 파트너였던 친오빠 이폴리토를 문간에 세워 놓고, 이사벨라는 성큼성큼 걸어와 아리아드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내 방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적극적인 방지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던 시에나가 뒤늦게 제 주인에게 호소했다.

“제가 막으려고 해 보았는데, 아리아드네 아가씨의 기세가 워낙 흉흉하셔서⋯⋯.”

하지만 시에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이사벨라조차도 그런 시시껄렁한 상벌 따위는 나중에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만 똑바로 노려보면서 외쳤다.

“남의 사생활을 맘대로 침범하기나 하고, 네가 아무리 집안 관리를 맡고 있다고 해도 이건 선 넘은 거야!”

- 팍!

요란한 소리가 이사벨라의 방 안을 울렸다. 아리아드네가 손에 쥐고 있던 양피지 묶음으로 이사벨라의 뺨을 때린 것이다.

이사벨라는 뺨을 부여잡고 분노한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방 안이 일순 고요해졌다.

“괜찮아, 이사벨라?!”

주제에 친동생이라고, 방 문간에 서 있던 이폴리토가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는 이사벨라를 부축하며 아리아드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제정신이야? 어디다 대고 다짜고짜 손을 올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가 시에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폴리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사벨라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선을 넘어? 사생활 침해? 그거 내가 할 말이야!”

아리아드네는 으레 관행적으로 이사벨라에게 해 주던 존대마저 집어치웠다.

남의 편지를 들여다보다니,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아리아드네의 손에 쥐인 양피지 뭉치가 뭔지 이사벨라도 금방 알아차렸다.

“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지만 이사벨라는 언제나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이사벨라였다.

“⋯⋯아리아드네, 너도 참 독하다.”

“뭐?”

“친자매 사이에, 편지 좀 봤다고 이렇게 화를 내?”

이사벨라는 자기 방을 빙 둘러보았다.

“그거 답장이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일기장처럼 혼자 끄적거린 거던데. 일기장 좀 봤다고 언니 방을 이렇게 뒤집어?”

그녀는 예쁜 얼굴에서 입술을 뾰족 내밀고는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네가 하도 아무 얘기 안 해 주니까, 내가 친해지고 싶어서 그냥 좀 본 건데. 그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아리아드네는 이마를 짚었다.

맞다, 이사벨라는 이런 계집애였지. 언제 어디서든 피해자인 척이 가능한 사람이 그녀의 언니, 이사벨라 데 마레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궤변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편지, 이거 나머지 어디 있어.”

“뭐?”

“이게 전부가 아니잖아. 빠진 것들, 어디 있냐고!”

“얘, 그걸 왜 나한테 따지니?”

이사벨라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반문했다.

“네가 어디 잘못 둔 거 아니야? 난 여기 있는 게 진심으로 전부야.”

아리아드네는 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산차를 돌아보았다.

“산차, 마저 뒤져!”

“네, 아가씨!”

그러자 아리아드네 휘하의 하녀들은 마치 한 사람의 손발이 움직이는 것처럼 호흡을 척척 맞춰 마저 이사벨라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야, 야⋯⋯!”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지 당황해 버렸다.

이사벨라는 급한 나머지 자기한테서 두 번째로 가깝게 있던 하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은 산차라서 자기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 너! 그 손 떼!”

그러나 그 하녀는 산차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팔을 흔들어서 이사벨라를 떼어냈다.

“죄송합니다, 큰아가씨.”

하는 운동이라고는 고래뼈가 들어간 코르셋과 패티코트를 입고 걷기 외엔 없는 이사벨라는 하녀의 간단한 팔짓에도 무력하게 떨려나고 말았다.

그녀는 예쁜 자수정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원군을 불렀다.

“오빠!”

그러나 함께 있던 이폴리토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야!”

이사벨라의 얼굴이 재차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이폴리토가 자기를 버리고 줄행랑을 친 건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폴리토는 그 정도로 의리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금방 다시 나타났는데, 구원자를 데리고였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이폴리토가 데려온 원군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난장판이 된 이사벨라의 방을 보며 이 상황을 대충 감을 잡은 상태였다.

“이사벨라. 동생 보석이라도 훔쳤니?”

이사벨라는 펄쩍 뛰었다.

“아빠, 저를 뭐로 보고!”

데 마레 추기경은 내심 ‘너를 너로 보니까 묻는 거지’라고 대답하고 싶은 혓바닥을 꾹 잡아 눌렀다.

자식 교육은 참 어렵다.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는데 비위까지 맞춰야 하다니.

“아니에요, 보석 같은 게 아니에요. 아리아드네 일기장을 사실 제가 몰래 봤는데, 쟤가 고작 그걸로 엄청 화를 내면서 방을 뒤집어엎잖아요!”

아리아드네는 울컥해서 내뱉었다.

“말을 할 거면⋯⋯!”

‘제대로 해’가 그녀가 마무리하려고 했던 온전한 문장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가 한 짓이 그저 시시한 소녀들 사이의 설왕설래가 아니라, 자기 약혼자에게 가서 약혼을 파기시키라며 이간질을 한 사건이라고 아버지에게 호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득, 두 가지 생각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난 체자레와의 약혼을 정녕 유지하고 싶은가? 그리고 난 아버지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그녀가 알폰소 왕자와 친밀했었다는 사실은 데 마레 추기경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는 몰랐고, 나중에 랑부예 구휼원의 자금을 성황청 자금으로 둔갑시켜 예사크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

‘아버지가⋯⋯. 예사크로 자금을 보내는 것에 순순히 협조해 주실까?’

모르는 척하고 랑부예 구휼원의 비자금을 데 마레 가문의 재산으로 편입하라고 압력을 넣을 수도 있었다.

비자금의 조성자와 그 내역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대강의 개요만 알고 있는 사람은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다.

그 돈의 출처는 부정한 돈이며, 돌려달라고 따지고 나올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횡령하기에 최적의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 번의 생애를 되돌아왔지만, 어린 시절 그녀에게 상흔을 줬던 사람들, 그리고 그 중 특히 루크레치아와 데 마레 추기경은 가늠하기가 무섭고 힘들었다.

“⋯⋯.”

아리아드네가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도 아리아드네의 하녀들은 이사벨라의 방을 열심히 뒤졌다.

그들은 아리아드네의 사람이었지, 데 마레 추기경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

자기가 들어왔는데도 눈치라고는 전혀 보지 않는 아리아드네의 하녀들에게 심기가 상했는지, 데 마레 추기경은 산차를 위시한 하녀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이만큼 했으면 됐어. 거기까지 해.”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아리아드네도 마음을 정했다.

체자레와 어떻게 될지, 흘러가는 대로 둬 보기로.

아득바득 모든 변수를 제거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에게 사랑을 호소하지도, 분노를 토로하지도 말고, 그냥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강물의 흐름을 따라가 보기로.

그것이 운명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아리아드네는 순순히 대답했다.

“산차, 우린 이만 돌아가자.”

“예? 하지만 아직 찾지 못했⋯⋯.”

“이만큼 찾았으면 됐다.”

그 말이 떨어지자 하녀들은 순식간에 산차를 중심으로 모여들어서 섰다.

물론, 그중 아무도 자기들이 만든 난장판을 정리하지는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를 쏘아보았다.

“다신 내 물건에 손대지 마.”

이사벨라는 얄밉게 답했다.

“쪼잔하기는. 자매 사이에.”

“난 분명히 경고했어.”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를 혐오에 가까운 감정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여동생의 경멸과 혐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악의 속에서 꽃을 피우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이사벨라는 화사하게 웃었고, 아리아드네는 그런 이사벨라를 뒤로하고 그녀의 방을 떠났다.

- 쾅!

“저, 저저, 작위 하나 받았다고! 아버지가 계신데 무엄하게⋯⋯!”

저 멀리서 이폴리토의 추임새가 들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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