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아름다운 시험관
아리아드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사벨라의 방을 떠났다.
아리아드네가 의외로 반항 없이 방을 나가버리자, 일부러 아버지 앞에서 아리아드네를 도발했던 이사벨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쟤가 웬일이지?’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가 데 마레 추기경 앞에서 그녀의 방을 마저 뒤져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할 줄 알았다.
‘저렇게 순순히 물러날 애가 아닌데?’
조그만 머리를 가열하게 굴리는 이사벨라의 귀에, 아버지의 준엄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이사벨라.”
“네?”
그녀는 데 마레 추기경을 돌아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말했다.
“난 널 주시하고 있다. 허튼짓하지 마라.”
이사벨라는 데 마레 추기경의 경고를 웃어넘겼다. 추기경의 경고는 언젠가부터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참, 아빠는. 제가 뭘 한다고 그러세요.”
그녀는 해맑은 미소로 데 마레 추기경의 경고를 흘려넘겼다.
“걱정 마세요. 이사벨라는 요새 참 모범적으로 살고 있답니다.”
그리고 사실, 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상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가 아버지 보는 앞에서 자기 방을 끝까지 뒤져 주기를 바랐다. 나오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없어진 몇 장의 편지는 지금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에게 가 있었다.
‘재밌는 건 같이 보자고 인심 한번 쓴 건데 그게 이렇게 잘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어?’
이사벨라는 양피지로 맞은 따귀를 슥 손으로 쓸었다. 살짝 붓기는 했지만, 감수할 만했다.
‘그 편지들이 나한테 없다고 아버지 앞에서 확인도 받았겠다, 완전 범죄지.’
그녀는 조만간 자신이 벌일 일의 결과가 너무나 기대가 됐다.
‘아리아드네. 네가 그렇게 희희낙락 잘난 척할 날도 이제 곧 끝이야.’
* * *
‘봄의 축제’ 무도회 이후로 수도의 화제는 단연코 체자레 공작과 발데사르 소후작의 결투였다.
- “시뇨르 라파엘이 글쎄, ‘체자레 데 카를로, 나와.’라며 장갑을 던지지 뭐예요!”
- “그거 직접 보셨어요?”
- “그럼요! 발조 백작 부인이 방을 받으셨잖아요? 그래서 그 방에 초대받아 가 있다가 바로 앞에서 소란이 나서 일 열에서 관람했죠!”
- “너무 멋있었겠다!”
- “전 사실 그렇게 가늘게 생긴 남자에는 관심 없었는데, 진짜 박력이⋯⋯! 다시 봤다니까요!”
맞은 편에 있었던 귀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 “그런데, 체자레 공작은 진짜로 도망친 거예요?”
- “그랬다니까요. 여자가 몇 번 말리니까 아주 그냥 물 만난 고기처럼 줄행랑을 쌩하니 치더라니까요.”
- “역시⋯⋯. 남자가 진중한 맛이 있어야지.”
- “바람둥이는 제 버릇 남 못 주나 봐요. 거기서 자기 여자를 지켰어야지 원.”
- “빠져주는 게 데 마레 여백작을 지키는 길 아니었으려나요? 본인이 제일 위험한 사람 같던데?”
- “깔깔깔, 하긴. 근데 데 마레 여백작도 그렇게 강단 있어 보이더니, 약혼자한테 싫은 소리 하나 못 하고 그렇게 당하고만 있어요? 순 헛똑똑이야.”
- “그러게나 말이에요. 똘똘한 줄 알았는데 아주 바보였어.”
체자레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아리아드네는 얼마나 멍청한지를 주로 토로하며 간혹 라파엘이 멋있다는 추임새를 넣어주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다.
체자레가 직접 자기 귀로 저 이야기를 들었다면 발작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천만다행으로 그는 빌라 소로토네에 틀어박혀서 혼자서 낮술을 벗 삼는 중이었다.
맨정신으로는 버틸 도량이 없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그는 비틀거리는 손으로 그라파를 가득 채워 허공에 건배했다.
“내 아가씨에게 건배.”
- 벌컥벌컥벌컥!
그는 단숨에 잔을 모두 비우고는 침실의 소파 위에 비스듬히 엎어졌다.
침대에서 기어 나와 소파 위에서 마시는 건 그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하하하⋯⋯.”
체자레는 지금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아리아드네가 미칠 듯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그를 받아 줄까?
알량한 자존심은 둘째 문제였다. 지금의 체자레에게는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받아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거절을 당하면, 데 마레 대저택의 문 앞에서 육중한 철문이 닫히면 그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예쁜 두 눈에 차올랐던 눈물을 기억한다.
날 울린 넌 끔찍한 남자라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 내 인생에서 꺼지라고 파혼을 선언하면 어떡하지.
어떻게 이어둔 인연인데, 어떻게 쟁취한 약혼인데. 체자레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리아드네가 지금 여기에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녀가 다가와, 당신을 사랑한다고, 나에겐 당신밖에 없다며 입 맞춰 주었으면, 아니, 결혼하자고 해줬으면 좋겠다.
영원한 결속,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혀서 성당에서 천신 앞에서 맹세하고 그녀와 나 둘이 절대로 갈라지지 못하는 하나의 유닛이 되었으면.
결혼반지는 그녀에게 채우는 나의 수갑이 되리라.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던 체자레에게 빌라 소로토네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데 마레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체자레는 귀를 비볐다.
“뭐?”
“데 마레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일 층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위로 모실까요?”
체자레는 술김에 인지가 온전하지 못해서 하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데 마레 영애께서 오셨다고?”
“예, 그렇습니다.”
“하, 하, 하하하하하하하!”
이게 꿈이냐 생시냐. 뒤늦게 알아들은 체자레는 크게 웃었다.
“그래, 데 마레 양! 데 마레 양이라면 언제든지 뫼셔야지!”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남은 잔의 절반을 비웠다. 그리고 인간의 속내란 참으로 간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직전까지 얼굴만 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혼자 빌고 있었는데, 막상 아리아드네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억울하게 맞은 따귀가 생각났다.
하인이 손님을 모셔오기 위해 방을 나간 사이 체자레는 한심해진 자신의 처지를 되뇌었다.
“내 뺨을 때리고, 온 사방천지에 날 쓰레기로 만든 다음에 다른 놈의 부축을 받으며 사라지셨지만⋯⋯. 내 감히 어찌 그녀를 원망하겠나!”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반어법이었다. 그는 킬킬 웃으며 재차 아무도 없는 허공에 건배를 올렸다.
이 순간만큼은 그라파가 아니라 발포주가 훨씬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묵직하게 사람의 이지(理智)를 뭉개는 독주보다는 상쾌하게 폭죽처럼 터지는 스푸만테가 여신의 찬양에는 훨씬 더 어울린다.
“사랑에 목숨 건 못난 놈은 그녀께옵서 부르시면 황송해하며 달려가고, 그녀가 가라시면 눈치 보며 내빼야지! 하하하하하하!”
홀로 독백하던 체자레의 귓전에 옥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청량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그날 아리아한테 뺨도 맞으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술에 너무 취해 헛것이 들리는지 고개를 흔들어 본 체자레는 눈을 찡그리고는 자신의 침실에 들어온 상대방을 유심히 관찰했다.
여자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아마빛 고수머리가 발랄하게 흔들렸다.
목례라기엔 지나치게 격식이 없었지만 평생을 규칙을 무시하며 살아왔을 그 여자에겐 몹시 잘 어울렸다.
체자레는 뒤늦게 상대방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사벨라 데 마레⋯⋯?”
“못 알아보실 만큼 취하지는 않으셨네요.”
이사벨라는 상큼하게 웃으며 체자레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초대 따위는 없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런 걸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다.
체자레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였다.
“당신이 여길 왜⋯⋯?”
“공작님께서 올려보내 주셨잖아요. 데 마레 영애를 올려보내라고.”
체자레는 그제야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술이 확 깨는 것만 같았다.
아리아드네가 그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기분이 극도로 나빠진 그는 빈 잔에 그라파를 가득 채우고는 반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입술에 묻은 독주를 닦아낸 그는 이사벨라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용건만 간단히.”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애초에 못 올라오게 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왔다며 잠시나마 기대가 하늘을 찔렀던 스스로도 부끄러웠고, 앞에서 깔짝대고 있는 이사벨라는 순도 높은 짜증만을 유발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지금은 저런 골칫덩이를 상대하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이사벨라는 화난 기색조차 없이 그라파 잔을 턱짓하며 화사하게 웃었다.
“어머, 저한텐 권하시지도 않나요?”
체자레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잠시 쳐다보더니, 빈 잔을 하나 꺼내서 성의 없이 반쯤 따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이사벨라 쪽으로 잔을 밀었다.
- 드르륵!
독주 잔이 흔들리며 넘쳐서 이사벨라의 드레스 자락을 적셨다.
그녀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독주 잔을 받아 꿀꺽, 한 모금을 마셨다.
“으, 쓰다.”
그라파를 목구멍으로 넘긴 이사벨라는 작은 새처럼 파르르 떨었다.
어떤 남자라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기란 참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사벨라는 약간의 기대심을 가지고 체자레를 살짝 곁눈 짓 했다.
하지만 그는 고주망태로 취한 상태에서도 이사벨라를 경계심 넘치는 태도로 노려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원래 이어져야 했을 뒷말인 ‘빨리하고 꺼져’를 간신히 삼킨 상태였다.
이사벨라는 내심 실망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예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보셔야 할 게 있어서요.”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몇 장의 편지 뭉치였다. 체자레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취한 사람한테 글을 읽으라고 내밀다니, 영애도 참 악취미군.”
“대낮부터 취해계실 줄은 몰랐죠.”
이사벨라는 편지 뭉치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심하더니, 그중 한 장을 골라 체자레에게 건넸다.
“읽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는 종이를 받지 않은 채 이사벨라를 노려보았다.
“이것만 읽으면 돌아가겠나?”
“이걸 읽으시고도 저와 더 대화하실 생각이 들지 않으신다면 두말없이 돌아갈게요.”
체자레는 마지못해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종이를 읽기 시작한 그였지만, 편지를 한 글자 두 글자 읽어나갈수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알코올이 체내에서 깡그리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사랑하는 알폰소에게.
체자레는 오늘도 나를 만나러 왔어. 아주 오랜만에 델라토레 후작가의 사교 살롱이 소규모로 열렸는데, 약혼자로서 에스코트하러 온 거야. 거절할 핑계가 도저히 없더라.
그의 손을 잡으며 널 생각했어. 넌 언제 돌아올 거니?
1123년 12월 15일,
당신의 아리아드네.」
체자레의 손이 떨렸다. 편지 때문인지, 아니면 취기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또랑또랑한 예쁜 목소리가 말했다.
“저런. 제일 약한 걸로 보여드린 건데 벌써 이러시면 어째요. 어째, 한 장 더 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