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덫의 설계
체자레 공작이 약혼녀를 위해 생일파티를 연다는 이야기는 이내 온 사교계에 퍼졌다.
4월 말은 보통 데뷔탕트 무도회가 열리는 시즌이었기 때문에 새로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치는 어린 아가씨들이 화제에 중심에 서고는 했고, 개인적인 파티를 여는 귀족들은 가급적이면 늦봄과 초여름이 갈리는 경계인 이 시즌을 피했다.
주인공이 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자레 공작이 주최하는 데 마레 백작의 생일 무도회는 대번에 모든 관심의 중심에 섰다.
어린 영애들 따위,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저 커플에 비하면 누가 관심이나 있겠는가.
- “정말로 하인들 제복까지 다 콜레지오니에서 맞춘다고요?”
- “실내장식은 보석으로 한다는 소문이 들리던데요!”
- “예? 태피스트리나 꽃이 아니라? 체자레 공작이 이를 갈았나 봐요.”
- “데 마레 여백작, 너무 부럽다.”
- “부러워? 저번에 체자레 공작 하던 거 보셨잖아요. 칼 들고 씩씩대는 거 난 너무 무서웠어. 그래도 부러워요?”
- “하긴, 그건 그래.”
- “상처뿐인 영광이네.”
- “아니 그런데, 그 정도면 참고 살 만하지! 피사노 공작, 공식적인 왕의 조카잖아! 그리고 이 정도면 정말 반성하고 굽신대고 있는 중 아니에요? 그 체자레 백작이 이럴 줄 누가 알았어요?”
- “그것도 그렇긴 해.”
그리고 그 소식은 당연히, 이사벨라 데 마레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아드득. 이를 하도 갈아대서 어금니 옆의 연한 살이 너덜너덜했다.
“그런다고 네가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이사벨라는 지난 한 달간 무용하게 체자레의 꽁무니만 쫓았다.
빌라 소로토네로 보낸 이사벨라의 방문 요청은 묵묵부답이었고, 심지어 다짜고짜 찾아가도 봤지만 문전박대당했다.
이사벨라가 시도한 다음 단계는 ‘우연히 만나기’였다. 줄어든 인맥을 어떻게든 활용해서 어떻게든 체자레를 만나고자 그가 나올만한 자리에는 모두 나갔다.
오타비오와 클레멘테를 십분 활용했다. 그러나 체자레는 귀신같이, 그녀가 나오는 자리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 “오타비오! 사실 두 분이 안 친하신 거 아니어요?”
- “체자레 공작이 신출귀몰한 건 익히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그리고 저랑 보려고 오신 게 아니라 체자레 공작을 보러 오신 건가요?”
- “그런 건 아니지만……. 저야 클레멘테 언니를 보러 왔지요. 호호호.”
- “⋯⋯.”
그러나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구겨져 있는 미니핀,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를 이용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의 생일파티라니. 정말로 거기서까지 이사벨라를 피해 다닐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넌 생각 잘못한 거다, 체자레 데 카를로.’
이사벨라는 으득, 재차 이를 갈았다.
이사벨라는 사이가 아무리 나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데 마레 영애였고, 아리아드네의 친언니였다.
아리아드네의 생일 무도회에 그녀를 초대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날 체자레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면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사벨라는 머리를 굴렸다. 승부수⋯⋯. 그래, 승부수⋯⋯.
이미 저질러 버린 거, 끝까지 가거나 망하거나였다. 이미 순결은 체자레 공작에게 줘 버렸다.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새신랑은 첫날밤에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결혼 전에 수도원에 끌려가던가, 결혼 후에 시집간 가문에서 뒷방에 감금당하나 도긴개긴이었다.
이사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레티시아.”
이사벨라는 레오나티 자작가의 응접실에 앉아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의 쓸데없는 얘기를 두 시간 반이 넘게 들어주고 있던 차였다.
약간 눈치가 떨어지는 레티시아는 오늘 어딘가 다정한 이사벨라의 태도에 신이 난 상태였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평소에는 이사벨라가 자기를 하대하며 본인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서 항상 화제가 이사벨라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사벨라가 자기를 이렇게 대접해주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평소 이사벨라와 나누는 대화가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레티시아는 좀 둔감한 편이었다.
“우린, 친구죠?”
이사벨라는 레티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사벨라의 이목구비에는 여자라도 홀릴 수밖에 없는 호소력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반쯤 감격해서 말했다.
“당연하죠! 이사벨라 양.”
“호칭도 이야기도 편하게 해 주세요. ‘이사벨라.’”
“이⋯⋯. 이사벨라.”
레티시아는 저도 모르게 이사벨라의 말을 따라 읊었다.
이사벨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예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말도 편하게, 응?”
레티시아의 두 손을 자기 손으로 꼭 잡은 채였다.
레티시아는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세상에, 내가 이사벨라에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다니. 정말로 그래도 될까?
하지만 그녀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꾹 눌러 참았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청하는데 자기가 반문하면 멍청이 같아 보일까 봐서였다. 이사벨라가 재차 권유했다.
“아이, 레티시아.”
이사벨라가 먼저 본을 보였다. 결국 그녀는 이사벨라의 말을 얌전하게 따랐다.
“이, 이렇게?”
“그래, 편하게!”
이번에는 이사벨라는 활짝 웃었다. 레티시아도 따라 웃었다.
“너무 좋아, 진짜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아름다운 이사벨라가 자기를 진짜 친구라고 칭하고 있다. 레티시아의 가슴 속에 자부심의 불꽃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다, 당연하지, 난 네 진짜 친구라고!”
레티시아의 호언장담에, 이사벨라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는 믿을 수 있어. 하지만⋯⋯.”
그 밝아진 얼굴은 잠시였다.
“다른 애들은⋯⋯, 난 이제 사람에 대해 회의감이 들어.”
이사벨라는 한숨을 폭 쉬었다.
“줄리아도⋯⋯. 가브리엘레도⋯⋯. 어쩜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낯을 바꿀 수가 있지. 난 걔들이 진짜 내 친구인 줄 알았어.”
상대적으로 가문이 떨어지는 펠리시테나 코르넬리아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은 레티시아에게 거부감보다는 뿌듯함을 주었다.
내가! 대귀족인 줄리아나 가브리엘레보다 앞이라니!
흐뭇해진 레티시아는 두 배쯤 열성적으로 이사벨라를 거들었다.
“걔들이 싸가지가 없어서 그래. 어려울 때 손잡아줘야 진짜 친구지! 대귀족 애들은 의리가 없어.”
“그치? 대귀족 가정교육에 뭐가 있나 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라고.”
예쁜 여자의 고충이라던가 남자들이 들이대서 생기는 불편함 같은—이사벨라가 가장 좋아하는—화제에서는 합죽이가 되어버리는 레티시아였지만 대귀족 욕이라면 레티시아도 할 말이 많았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질시와 험담에 기반한 우정을 쌓아 올리다가, 만족스러운 대화의 총량이 차자 기쁜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댔다.
“레티시아⋯⋯.”
이사벨라는 레티시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상태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으, 응? 이사벨라?”
지나치게 가깝다. 하지만 동시에 뿌듯하다.
레티시아를 불편하게 만듦과 동시에 약간 기쁜 긴장 상태에 몰아넣은 이사벨라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비밀, 지켜줄 수 있어?”
레티시아의 두 눈이 커졌다.
비밀이라니. 이건 진짜 친구들이나 하는 거다.
언젠가 읽었던 소녀문학의 단짝 친구들 내용이 떠오르며 레티시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상에, 내가 이사벨라 데 마레의 단짝 친구라니.
“다, 당연하지 이사벨라!”
그녀는 가슴을 쾅쾅 쳤다. 소녀문학의 친구보다는 남자 주인공이 할만한 제스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왕 가슴을 두들긴 거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게. 나만 믿으라고!”
“레티시아⋯⋯.”
이사벨라의 자수정 눈이 감격으로 반짝였다. 이건 남자 주인공한테 감동했을 때 여자 주인공이 짓는 표정이었다.
레티시아는 역시, 롤이 조금 잘못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넘기기로 했다.
이사벨라 데 마레와 딱 붙어 있을 수 있는데 역할이 무엇이건 그게 무에 중요하랴.
“있잖아⋯⋯.”
이사벨라는 레티시아의 귀에다 대고 조심스레 최근 생긴, 자신의 최대 비밀을 속삭였다.
응접실 안에는 둘밖에 없었고 엿듣는 귀도 없어 보였지만 뭔가 큰 소리로 입 밖에 내기에는 망측한 이야기였다.
사실 이사벨라는 이번 사건에 대해 레티시아에게 이야기할지, 말지에 대해 상당히 오래 고민했다.
레티시아가 입을 털고 다니면 자기는 망한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결론은, 고였다.
“에에?!?!”
레티시아는 이사벨라의 속삭임을 들은 다음에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정말로?!”
이사벨라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자수정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인 채였다.
이 눈물은 반쯤은 가짜고 반쯤은 진심이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진짜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이사벨라는 대충, 동생의 서신을 가지고 체자레 공작을 위로하러 갔더니 체자레 공작이 자기를 반강제로 덮쳤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뜩이나 악명 높은 체자레 공작인데, 그게 최근의 왕궁 무도회에서 약혼녀를 강제로 덮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수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런 그가 이사벨라에게도 손을 댔다는 내용은 굉장히 체자레 공작이 할 법한 짓이라서, 레티시아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녀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근데 진짜로 도망갔다고?!”
“응⋯⋯.”
드디어 이사벨라의 눈에서 도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레티시아는 화가 나서 길길이 뛰었다.
“아니 뭐 그런 쓰레기 같은 자식이 다 있어?!”
이사벨라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물론 이사벨라는 자기가 레티시아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에서만큼 흠결 없는 피해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첫 경험을 내준 남자가 눈 떠보니 침대 옆자리에서 줄행랑을 쳤다는 사실은 그녀에게도 큰 상처였다.
절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가 그놈을 아주 확!!!”
레티시아는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가만두면 안 돼, 그런 무뢰배 놈은!!!”
이사벨라는 가냘프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레티시아는 남의 일이니만큼 당당하게 초강수를 권했다.
“추기경 예하께 말씀드리는 건 어때? 남자가 말이야,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사벨라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두 손을 내저었다.
“안 돼, 안 돼!”
이사벨라는 기겁하며 답했다.
“아버지께선 절대로 내 편을 들어주시지 않을 거야!”
소리를 빽 지른 그녀는 이내 서글프게 읊조렸다.
“⋯⋯그 사람은 내 여동생의 약혼자잖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는 아리아드네만 좋아해.”
데 마레 추기경이 이사벨라와 이폴리토를 멀리하게 된 것은 감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연속해서 악수만 두었기 때문이었지만, 이사벨라의 세계에서는 저렇게 정리되어 있었다.
사실 그것만은 아니라는 걸, 데 마레 추기경은 감정적으로 아리아드네를 편애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영민한 이사벨라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굳이 현실을 직시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마음 편한 게 최고다.
“지금 내가 동생의 약혼자를 건드렸⋯⋯, 아니, 당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버지께선 날 가만두시지 않을 거야.”
반쯤 비틀린 현실 인식 위에서 이사벨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를 위해 아리아드네와 혼처를 서로 바꿔 주진 않을 것이다.
남자 쪽에서 이사벨라보다 아리아드네를 원하고 있다면 특히 그랬다.
‘아니, 심지어 아리아드네 본인이 파혼하고 싶다고 해도 안 들어 주실지도⋯⋯.’
이사벨라는 작위를 가진 아리아드네를 결혼시키기 꺼려 하는 데 마레 추기경의 속내를 몰랐다.
그녀의 세계에서, 집안의 딸은 당연히 결혼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초로 이사벨라가 생각하기에는, 데 마레 추기경 입장에서는 지금 차기 권력자로 유력한 체자레 공작을 잡아둘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예전에 아리아드네와 연결점이 있던 알폰소 왕자가 아리아드네의 공개 약혼으로 아예 물 건너가 버린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체자레 공작을 잡아두려면 딸들의 의사보다는 체자레 공작의 의사를 들어주는 편이 성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남자란 동물은 웬만큼 코너에 몰리지 않는 이상 절대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는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금 체자레 공작이 원하는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아빠한테 말하는 건 선택지가 아니야. 날 수도원에 처박아버리실 거라고.”
레티시아는 이사벨라의 조그만 머릿속에서 분주하게 돌아가는 계산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아버지가 성직자이시니 순결을 잃은 딸을 용납하지 못하시겠지, 라며 혼자 납득을 마쳤다.
“⋯⋯레티시아, 난 네 도움이 필요해.”
“응?”
레티시아는 눈만 껌벅였다.
아니, 내가 체자레 공작의 어머니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 귀족이라 체자레 공작 대신 순결을 잃은 이사벨라와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진짜 친구’ 이사벨라가 부탁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만 감정에 북받쳐 장담하고 말았다.
“뭐든지 말만 해!”
“있잖아⋯⋯.”
이사벨라는 다시금 레티시아의 귀에다 대고 그녀의 계획을 속삭였다. 레티시아의 얼굴이 어벙해졌다.
“아니, 어려운 일은 아닌데⋯⋯.”
레티시아 본인은 ‘아버지에게 이르라’라는, 존재하는 가장 통쾌한 해결책을 이사벨라에게 제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사벨라가 하는 이야기는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되기만 한다면 체자레 공작은 발을 뺄 수 없다.
‘통쾌함’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그 숫자는 하늘을 뚫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험부담을 정말로 지겠다고……?
“진짜로 괜찮겠어?”
이사벨라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신호를 보낼게. 그때⋯⋯. 부탁해?”
레티시아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그 이후 3주, 체자레 공작이 주관하는 무도회의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