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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65화 (265/733)

<제265화> 이사벨라의 깨달음

“아, 아빠⋯⋯!”

이사벨라의 탄성을 뒤로하고, 데 마레 추기경은 가래가 끓어오르는 음성으로 체자레를 향해 내뱉었다.

“쓰레기 같은 놈⋯⋯!”

체자레는 거기서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긁어 부스럼일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체자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것뿐이었다.

“나와라, 이사벨라.”

추기경은 차가운 목소리로 딸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이 나타나자 원군이 왔다고 안도한 이사벨라는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로 추기경에게 애원했다.

“아빠, 공작님 좀 설득해 주세요. 어차피 가문과 가문 사이의 결합은 시집을 가는 딸이 누가 되어도 상관없잖⋯⋯.”

하지만 그녀가 맞닥뜨린 것은 영문 모를 아버지의 일갈이었다.

“입 닥치고 썩 나오지 못해, 이사벨라?!”

추기경의 큰 소리에 이사벨라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입을 바로 다물었다.

아버지에게 이런 취급을 당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특히 그랬다.

추기경은 큰딸의 손목을 잡은 채 성큼성큼 걸어 피사노 공작의 응접실을 떠났다.

빌라 소로토네에서 머무는 일분일초도 기분이 나쁘다는 기운을 팍팍 풍기는 채였다.

“추기경 예하, 돌아가시는 길에 저희 사람들이 동행을⋯⋯.”

데 마레 추기경을 이렇게 돌려보내는 것이 못내 찜찜했던 체자레가 공허한 제안을 했다.

“필요 없소!”

추기경은 단호하게 제의를 떨쳐냈다.

그의 딱 부러진 뒷모습을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마조마해 하고 있는 것은 체자레나 이사벨라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 * *

마차 안의 고요는 지극히 무서웠다. 이사벨라는 내장도 토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추기경이 ‘이-사-벨-라-!!!’라며 분노를 폭발시켰으면 덜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 마레 가문의 은마차 안에서 추기경은 입을 꾹 다문 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이사벨라는 감히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눈치만 살폈다.

- 이히히힝!

마차가 데 마레 대저택에 도착한 모양인지 정차를 알리는 긴 울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추기경은 비로소 입을 열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벨라 데 마레.”

“⋯⋯네, 아빠.”

“내 서재로 따라 올라와.”

이사벨라는 기세에 눌려 대답하지 못했지만 추기경은 답변을 기다리지 않은 채 2층의 자신의 서재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이사벨라도 주눅이 든 채 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아버지의 서재로 가는 길은 참으로 호화로웠다.

곳곳에 놓여 있는 대리석 조각이며, 천장에 그려져 있는 아기 천사의 프레스코화까지, 이 집에서 가장 위세가 등등한 곳이었다.

동시에 이사벨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다.

루크레치아가 죽은 후 이사벨라는 아버지의 서재에 출입하는 것이 단 한 차례도 허용되지 않았다.

‘엄마⋯⋯.’

새삼스레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었다. 루크레치아가 있었더라면 몸을 던져서라도 아버지의 분노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었을 것이다.

이사벨라는 새삼 눈물이 찔끔 나는 것을 느꼈다.

딸의 이런 감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 마레 추기경은 서재로 들어가 자기 책상 앞에 앉아 말없이 턱짓으로 책상 맞은편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가리켰다.

이사벨라는 조심조심 벨벳 천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으려고 매무새를 정돈하다가 뒤늦게 자기 코르피케의 단추가 잘못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의 흐트러진 차림새를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무시한 것인지, 착 가라앉은 말투로 이야기했다.

“너, 지금 상황이 파악은 되느냐?”

“⋯⋯.”

이사벨라가 답변하지 못하자, 그는 단정적인 어조로 툭 던졌다.

“넌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어.”

추기경의 눈매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자기 딸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창고에 쟁여둔, 유행이 지나 더이상 판매하지 못하는 귀중품을 보는 눈빛이었다.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산 카를로 최고의 재원, 하늘이 내린 절세의 미녀, 천사 같은 눈망울. 모두 한때 이사벨라를 수식하던 말이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걸 이렇게 한 번에 홀라당 날려 먹어?”

이쯤 되자 이사벨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빠!”

평판은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만 하면 끝 아닌가?

“아직 안 끝났어요. 아빠가 설득 좀 해 주세요. 체자레 공작이 마음을 바꿔먹어서 저랑 결혼하기만 하면⋯⋯.”

하지만 이사벨라의 문장은 끝을 맺지 못했다.

- 짝!

피부와 피부가 맞닿아 내는 파열음이 추기경의 서재를 가득 메웠다. 이사벨라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풍성한 아마빛 머리채가 흐트러져 그녀의 표정을 가렸다.

“넌 아직도, 이 지경이 되어서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분노에 찬 추기경이 드디어 언성을 높였다.

“남자가 죽어도 싫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널 그 자리에 욱여넣어?”

사실 데 마레 추기경이 레오 3세에게 쳐들어가서 내가 왕족으로 만들어 준 당신 아들은 내 딸을 책임지시라고 강짜를 부린다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이사벨라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속내를 정확하게 파악해서는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들으신 거지?’

이사벨라는 체자레의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을 정신없이 복기해보았다. 끝부분만 들으신 건가?

이사벨라가 정말로 캄파 후작의 내연녀라서 체자레가 그녀를 거부한 거라고 생각했으면, 이사벨라를 피사노 공작부인으로 넣어주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사벨라는 아버지의 착각만 교정해주면 제 아비가 여전히 자신의 편이리라 여겼다.

어쨌든 이사벨라는 이제껏—인생의 대부분간—아버지의 예쁜 보물단지였기 때문이다.

“아빠. 대화 맨 뒷부분만 들으신 것 같은데 다 봉합될 수 있어요. 체자레 공작은 그냥 빈정이 상해서 저렇게 나오는 거고 전 공작부인이 되지 못할만한 일을 저지른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전 캄파 후작과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고 체자레 공작도 그 사실을 알⋯⋯.”

“맨 처음부터 다 들었다!”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처음부터 다 들었다면, 순결한 장녀가 난봉꾼 체자레 공작에게 불운하게 배신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아빠가 왜 내 편을 들어주지 않지⋯⋯?

망가진 태엽 인형처럼 굳어 버린 큰딸을 보며 데 마레 추기경은 분노로 콧김을 뿜었다.

이사벨라는 오늘 이제껏 추기경이 만들어 온 모든 것에 먹칠을 하고 왔다.

단란한 가족, 훌륭한 교육을 받은 장남과 아름다운 장녀, 사교계에 이름이 드높은 차녀. 왕실의 방계와 혼담을 확정 지은 상황.

아리아드네가 피사노 공작과 혼인하고 나면 데 마레 백작위는 피사노 공작가가 소유한 작위가 되어버릴 테니 집안에 다시금 작위가 없어지게 되는 것은 불만이었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그 부분은 이폴리토를 귀족 가문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혼인시키는 것으로 해소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왕실과 사돈을 맺은, 수도에서 가장 기세가 등등한 추기경이라면 그 정도는 이룰 수 있었다.

이폴리토와 이사벨라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몇몇 가문을 추려놓고, 후보자들의 방계 친척들을 조사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니까 추기경의 입장에서, 모든 일은 그럭저럭 잘 돌아가고 있었다. 거기에 이사벨라가 똥물을 끼얹었다.

“뭐? 체자레 공작과 결혼을 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 너야 결혼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나겠지. 가문이 뒤집어쓸 오명은 어떻게 할 테냐!”

피사노 공작 체자레와의 결혼은 데 마레 가문에 어차피 약속되어 있던 일이었다.

가문 입장에서는 이렇게 수도의 웃음거리가 되어가며 이사벨라를 들이밀 필요는 전혀 없었다.

“네가 이렇게 사건을 저지르고 나면, 아직 미혼인 네 오빠는! 혼처를 빼앗긴 네 동생은!”

어떤 멀쩡한 가문이 이런 시누이가 있는 집에 제 여식을 보내려고 하겠는가?

아리아드네를 결혼시키지 않은 채 가문에 영원히 잡아두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였지만 그건 추기경이 합리적인 판단 하에서 결정할 일이었다.

이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대는 여식이 제멋대로 저질러버릴 일이 아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남자에게 공개장소에서 몸을 던지는 딸을 뒀다는 수치심과, 자신의 권위가 뭉개졌다는 분노와, 앞으로 뒤처리는 순전히 다 자기가 해야 한다는 울분이 순차적으로 몰려오는 와중이었다.

그는 울화를 눈앞의 원흉인 이사벨라에게 폭발시켰다.

“넌 순전히 네가 잘나서 내가 너한테 교육이며 교우관계며 각종 사치품을 다 몰아줬다고 생각했느냐?”

이사벨라가 멍하니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자기밖에 모르지!”

추기경은 오늘 이사벨라의 쓸모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차녀, 아리아드네는 머리가 굵어져서 아버지를 배제한 채 자기만의 독자적인 계획을 짜는 일이 잦았다. 그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아리아드네가 획책하는 짓거리들은 추기경이 간단하게 제지할 수 있는 사이즈를 벗어나 있었다.

추기경은 그래서 차녀의 장난질은 못 본 척 넘기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가 그렇게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리아드네는 예측이 가능한, 합리적인 상대방이었고 기본적으로 말귀를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기의 장녀가 이제까지 예쁜 체스 말인 줄로만 알았다.

제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틱틱거렸고 사소한 사건‧사고들은 쳤지만 어디까지나 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부릴 수 있는 심통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 저지른 일을 보니 이건 완전히 시한폭탄이었다.

‘이 애를 피사노 공작부인 자리에 올려두면, 본인과 남편의 가문에는 손해가 되지만 친정에는 도움이 되는 일을 시켰을 때 과연 순순히 따르려고 들까⋯⋯?’

무능해도 괜찮았다. 심지어 못나도 괜찮았다. 아버지가, 가문이 꽂아 넣어주면 된다.

하지만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것은? 실격이었다. 쓸 수 없는 말이다. 추기경은 일갈했다.

“그 예쁜 얼굴로 가문에 이득이 되는 혼처를 물어와야 가문이 영원불멸하게 되는 거지! 아니, 시집을 간 후에도 가문에 충성해야 가문에 도움이 되는 거지!”

가문. 영원불멸할 데 마레 가문.

데 마레 추기경이 집착하는 단 하나, 가문.

이사벨라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그 공허한 단어를 입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려 보았다.

도정이 덜 된 밀처럼 꺼끌거리는 질감이 입속에 못내 걸렸다.

데 마레 추기경은 연신 화를 냈다.

“너 혼자 잘 먹고 잘살라고 내가 그 많은 투자를 한 줄 알아?!”

내가 예뻐서, 그래서 그 아름다움에 취한 아버지가 날 사랑해서 편애하는 줄 알았다.

“네가 누린 그 모든 것들이 네 분수에 가당키나 한 줄 알아?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서 콧대 빳빳이 세우고 돌아다녔지?!”

이사벨라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데 마레 추기경은 본인의 계산에 빠져 있었다.

“둘째에 비해선 발가락 때만큼도 못 따라가는 못난 것!”

아팠다. 단어가 아팠다. 비단 아리아드네와 직격으로 비교를 당해서만이 아니었다. 이상한 깨달음이 왔기 때문에 아팠다.

‘데 마레 가문’은 이사벨라의 것이 아니었다. 그 가문은 추기경의 것이었고, 이폴리토에게 약속된 것이었지만, 아리아드네가 강탈해 간 것이었다.

작위가 아리아드네에게 내려왔을 때, 이폴리토는 진심으로 분노했지만 이사벨라는 미운 애가 잘 될 때 어련히 느낄 법한 질투 외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가문은 원래부터 이사벨라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항상 의구심이 들었다. 아빠는 날 사랑하시는 걸까?

그렇게 고개를 쳐든 의심은 풍요로운 물질 속에서 풀이 죽고는 했다.

언제나 가장 좋은 것, 가장 예쁜 것, 가장 비싼 것은 아라벨라는 당연하고, 이폴리토조차도 아닌 이사벨라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그게 조건부로 주어지기는 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가 또래 여아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그 타고난 미모로 입소문에 오를 때, 태도나 품행에서 칭찬받을 구석이 있을 때 이사벨라에게 더욱 풍성한 보상을 주었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이제까지 자기에게 왔던 것이 조건부 사랑인 줄 알았다. 내가 예뻐서, 그래서 날 사랑하는 조건부 사랑.

하지만 갑자기 이상한 깨달음이 왔다.

이제까지 그녀가 받았던 건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아 올 가축 가마우지에게 주는 사료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사벨라가 오늘 후려 맞은 따귀는 물리적인 따귀뿐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뺨을 부여잡고 있던 이사벨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했잖아요.”

“뭐?”

“아빠가, 나더러 산 카를로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가 되라고 했잖아요!”

입을 꼭 다문 채 덜덜 떨던 이사벨라는 갑자기 작정한 듯이 떨치고 일어나서 데 마레 추기경에게 마주 악을 썼다.

“나더러 알폰소 왕자의 왕자비가 되라고 아빠가! 그랬잖아요! 근데 아빠가 나한테 뭘 해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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