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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66화 (266/733)

<제266화> 이사벨라의 추락(1)

“내가 있는데 그 머리 검은 사생아는 도대체 왜 데려와!”

이사벨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리아드네가 눈앞에 있었더라면 찢어발기기라도 할 기세였다.

아니, 아리아드네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추기경을 향한 울분일는지도 몰랐다.

“내가 제일 예쁜 딸이라며. 우리 이사벨라가 최고라며. 다 거짓말이었어?!”

추기경은 차가운 눈으로 큰딸을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너 흥분했어.”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이사벨라는 울부짖었다.

“내가 제일 예쁜 딸이라면서 왜 저 하녀 배에서 낳은 천한 것을 데려와서 우리 집에서 키워?”

아리아드네는 애초에 이사벨라를 위한 백업으로 수도에 데려온 아이이니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분노가 두서없이 치밀어올랐다.

“쟤가 알폰소 왕자한테도 꼬리를 치고 나한테서 체자레 공작도 뺏어가는데 왜 아빠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냐고요!”

“이것이 정녕!”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뭔데!”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해 주었다.

뭐든 오냐오냐하며 기른 것은 물론이요, 성직자의 딸로서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 최고의 교육, 아버지의 인맥으로 밀어 넣어 준 산 카를로 최고의 영애들과의 친교까지, 모두 데 마레 추기경이 자신의 큰딸에게 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가 가장 간절히 원하던 단 한 가지는 결코 준 적이 없었다.

네 존재 자체로도 특별하고 감사하다는, 부모로서의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내가 제일 예쁘다며! 내가 제일 사랑 받을 만하다며! 얼굴도 내가 더 예쁘고 몸매도 내가 더 날씬하고 나는 귀한 금발이고 쟤는 하녀 소생의 흔해 빠진 흑발인데 왜! 아빠는! 쟤만 밀어줘? 쟤만 편애해?!”

이사벨라가 따지고 드는 것은 사실 이사벨라와 아리아드네 사이의 단순 미추(美醜)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사벨라가 추구하도록 요구받았던 각종 가치의 문제였다.

예쁘면 좋은 남편감을 데려올 수 있고, 시집만 잘 가면 뭐든지 다 괜찮다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받고 묵과할 수 없는 것을 허용받으며 자랐다.

그런 이사벨라는 배운 대로 했을 뿐이었다. 최고의 혼처를 붙들기 위한 가장 빠르고 짧은 루트를 택했다.

질타는커녕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 추기경은 이사벨라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인생이 망했다고? 사회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날 망친 건 아빠야!”

피사노 공작은 그녀를 책임져 주지 않을 것이다.

체자레가 제멋대로 파헤친 이후에 무참히 버리고 가버린 그녀를 이제는 그 어느 남자도 욕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욕망의 대상이 되도록 길러졌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욕망에 기대어 살아가는 법밖에 몰랐다.

그녀에게 주어질 모든 영광은 타인이 그녀를 욕망하기 때문에 건넬 무언가였다.

자기 손으로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이사벨라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타인의, 남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던 삶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세상이 끝났다.

그리고 그녀를 이렇게 키운 건 데 마레 추기경과 이제는 죽어서 책임소재에서 자유로워진 루크레치아였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문이 닫혀버린 이사벨라는 평생 자제하던 마지막 끈까지 풀어헤치고 악을 썼다.

“당신을 저주해!!”

이사벨라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데 마레 추기경은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긴가민가했지만 갈피가 정확하게 잡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파랗게 어린 딸에게 패륜적인 이야기를 들었다는 분노가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고 싶지 않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누가 뭐래도 객관적으로 산 카를로에서 자신의 여식에게 가장 큰 투자를 한 남자가 맞지 않는가.

“배은망덕한 것!”

- 짝!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의 따귀를 재차 갈겼다.

첫 번째 따귀를 맞고는 망연자실하게 어깨를 떨던 이사벨라는 두 번째 따귀를 맞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 앞에서 목청을 돋워 악을 썼다.

“아빠가 뭔데! 아빠가 나한테 뭘 해줬는데! 내 인생 망쳐놓고 뭐가 잘나서!”

데 마레 추기경은 분노에 몸을 떨며 큰소리로 외쳤다.

“너란 아이는 갱생이란 것이 안 되는 아이로구나! 쓸모도 없어진 것, 기왕 이렇게 된 것 수녀원에라도 들어가 버려!”

수녀원. 귀족 가문의 딸이 갈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곳.

데 마레 추기경은 ‘수녀원’이라는 단어를 입에서 내뱉어 놓고 그 단어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는 사실에 잠시 전율했다.

결혼적령기 딸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벌이었다.

루크레치아가 살아 있었다면 대번에 추기경의 발치에 매달려 내 딸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고 절절히 빌었을 것이다.

내 딸의 인생을 망치지 말아 달라고, 그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던 아가씨들의 가장 안 좋은 말로인 그 인세의 지옥에 내 딸을 밀어 넣을 수 없다고.

하지만 이사벨라는 그녀의 모친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보다 훨씬 혈기방장했고, 콧대가 높았으며, 모 아니면 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지금의 그녀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가라면 못 갈 줄 알아요?”

- 퉤!

이사벨라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냈다. 귀한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라 길거리 시정잡배라도 된 것 같은 몸짓이었다.

“날 자식으로 보기는 했어요?”

이사벨라는 핏발 선 눈으로 데 마레 추기경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아니, 사람으로 본 적은 있어요?”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의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자기가 가진 것은 모두 자식들에게 퍼부어주었다.

어촌 마을의 고아 소년이었던 시몬은 고아원의 수사님이 자기에게 해줬던 것보다 열 배, 아니 백배 천배가 넘을 만큼의 금전을 이사벨라에게 들이부었다.

그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부모·자식 간의 애정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을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몹시 드물다.

“본인부터가 날 사람이 아니라 마구간의 종마처럼 봤으면서 이제 와서 나한테 인간의 도리를 바라?!”

이사벨라는 아버지에게 악다구니를 썼다.

“가문을 위해 희생하라고?! 그건 내 가문이 아니잖아요!”

“이, 이⋯⋯.”

가문은 모두의 가문이어야 했다. 그는 이 목표는 자기 자식들이 당연히 모두 공유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춥고 배고플 때 그들을 돌봐줄 울타리는 가문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문에 속하지 않은 사람, 가령 고아 같은 아이의 인생은 정말로 고달프다.

“아버지도 참 딱하시지, 그 잘난 가문, 아들한테 주지도 못하고 검은 머리 사생아한테 홀라당 먹힐 것 같던데 그 가문을 나더러 보위하라고요?”

- 칵, 퉤!

이사벨라는 재차 침을 뱉었다. 좀 전보다 핏물이 덜 섞였고 분노와 혐오가 진하게 배어 있는 가래침이었다.

“데 마레 가문 따위, 죽어버려!”

“뭐라고?”

“이딴 가문 망해버리라고요!”

데 마레 추기경은 부들부들 떨면서 재차 손을 들었다.

세 번째 따귀를 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더 이상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 부웅!

아버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이사벨라는 상체를 뒤로 빼서 때리는 손을 피했다. 헛손질을 한 데 마레 추기경은 볼썽사납게 비틀거렸다.

“이, 이 고얀!!!”

추기경의 손을 피한 이사벨라는 각종 욕설이 섞인 저주를 퍼부었다.

“이 쓰레기 같은 가문, 내가 내 손으로 없애버릴 거야! 불태워 버릴 거라고!”

그녀가 ‘숙녀들의 도시 이야기’를 필사하면서도 교과서 외적으로 갈고 닦았던 각종 욕설이 현란하게 펼쳐졌다.

주로 아버지가 얼마나 모지리 같은지와 아리아드네의 끔찍한 인성에 대한 모욕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부들부들 떨며 이사벨라의 저주를 들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길렀던 딸이, 품속의 보물 같았던 딸이, 가문 전체가 산 카를로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추문을 일으켰다.

그 행위는 자신이 그토록 강조해왔던 형제애와 가문에 대한 충성의 등에 찌르는 배신의 칼날이었다.

그리고 그 금쪽같은 딸은 자기의 잘못이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있다.

“다 아버지 때문이잖아!!!”

이사벨라의 째지는 목소리가 데 마레 추기경의 귀를 때렸다.

“내가 당신 자식이라는 사실이 끔찍해!!!”

- 쨍그랑!

추기경은 견디지 못하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화병을 거세게 밀어 떨어뜨렸다.

이사벨라는 사기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시 입을 닫았다.

반쯤은 아버지의 수위가 올라간 폭력에 위협을 당했기 때문이지만, 나머지 반쯤은 그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몹시 불길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 소리는 레티시아가 빌라 소로토네의 발코니에서 밀어 떨어뜨렸던 도자기를 생각나게 했다.

오페라의 막이 열리는 것을 알리던 소리였다.

지금 이 도자기 깨지는 소리는 두 번째 막이 열린다는 신호 같았다.

문제는, 이 두 번째 오페라는 이사벨라가 준비한 오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사벨라 데 마레.”

데 마레 추기경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사벨라의 풀 네임을 불렀다.

“그래, 네가 내 자식이라는 사실에 그렇게나 불만이 크다면.”

그는 책상에서 사무용 나이프를 꺼내 자신의 머리카락을 새끼손가락 하나만큼 잡아 잘랐다.

그의 가느다란 모질의 백발이 힘없이 잘려져 나왔다.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자.”

추기경은 자른 머리카락을 이사벨라의 면전에 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외치던 이사벨라는 입을 닥친 채 아버지가 뿌리는 머리카락을 맞았다.

“넌 내 정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니 성황청 문서고에 보관된 출생신고서도 따로 없구나.”

정확하게는, 부모님의 혼인서약서 아래에 기재된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혼인서약서를 가질 수가 없으니 이사벨라도 이폴리토도 그 아래에 기재될 수가 없다.

그들은 자기 이름만 덩그러니 있는, 부모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출생신고서만 가질 수 있었다.

“가거라, 산탄젤로 수녀원으로.”

산탄젤로 수녀원은 산 카를로 북쪽 외곽에 위치한 악명 높은 수녀원이었다.

수도에서 물의를 일으킨 귀족가의 영애들은 다 산탄젤로로 유배당했다.

“성을 떼고 이름만 달아줄 테니 그렇게 가거라.”

추기경은 설렁줄을 당겼다.

밖에서 조마조마해하며 안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집사 니콜로와 그 아래의 하인 두엇이 곧바로 추기경의 서재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예하.”

“다 들었지.”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 쪽으로 턱짓을 했다.

“모셔다 드려라.”

아버지의 말에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이사벨라가 짐승처럼 외치며 추기경에게 달려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는 흉맹한 맹수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가녀렸고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집사 니콜로와 하인들이 대번에 뛰어들어 이사벨라를 저지했다.

집사가 이사벨라를 몸통으로 막자 하인들이 각기 팔 한쪽씩을 잡아 그녀를 철통 봉쇄했다.

이사벨라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온몸을 뒤틀었다.

“아이고 아가씨, 고정, 고정하세요⋯⋯!”

“아가씨는 누가 아가씨야!”

데 마레 추기경의 역정이 서재를 메웠다.

“오늘부터 이사벨라는 우리 집안과 상관없는 사람이다! 일분일초도 저택에 머무르게 할 생각이 없으니 지금 당장 마차에 태워서 산탄젤로 수녀원으로 보내!”

“아아악!! 아악!!!”

이사벨라의 몸부림이 한층 더 거세졌다. 하인들이 꽉 붙든 팔뚝에 검붉은 멍이 들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주할 거야!! 저주할 거야 이 더러운 집안 같으니!!!”

“저주는 내 지붕 밖에서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

추기경은 차가운 눈으로 일갈했다.

“썩 끌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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