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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68화 (268/733)

<제268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 끼리리리리릭— 철컹!

검은 애마를 타고 한달음에 데 마레 대저택으로 달려간 체자레는, 코앞에서 닫히는 철문을 보아야 했다.

“데 마레 가문에서는 일체의 손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저 철문은 체자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체자레가 얼굴까지 외우고 있을 정도로 자주 만나 그와는 구면인 문지기는 매우 송구스러워했지만 꽉 걸어 잠근 문을 열지는 않았다.

“나중에 다시 방문해주십사⋯⋯.”

“이건 데 마레 여백작의 뜻인가?”

체자레는 재차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의 의향일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문지기는 냉큼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공작 나으리.”

체자레의 미간이 구겨졌다. 여자 쪽에서 만남 자체를 거부한다니, 좋지 않은 신호다.

하지만 그는 프로페셔널이었다. 시간을 가지고 꾸준히 노려보면 빈틈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완강한 여자에게 괜히 강요하듯이 들이밀면 예후가 좋지 않았다.

“후⋯⋯.”

오늘은,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체자레는 잘 차려입은 치장이 아쉬워졌지만, 티 내지 않고 문지기에게 일렀다.

“다음번에 다시 오겠네. 내가 왔었다고 꼭 전달해 드리고.”

익숙한 얼굴의 문지기는 체자레와 눈도 못 마주친 채 인사했다.

“살펴 가십시오.”

* * *

문지기가 체자레와 눈도 못 마주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날이 아니었던 것이다.

활짝 열려 있던 데 마레 대저택의 정문은 피사노 공작만 나타나면 재빠르게 닫혔다.

“그것이⋯⋯.”

“오늘도⋯⋯.”

“송구합니다, 공작 나으리.”

체자레가 여섯 번째로 거절당한 날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초여름날이었다.

빌라 소로토네에서 출발했을 때는 분명히 해가 쨍쨍 나는 뙤약볕이었는데 데 마레 대저택까지 오는 길에 먹구름이 스멀스멀 몰려들더니 어느 순간 소나기가 가열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집에서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나온 얇은 여름 비단 외출복은 소낙비에 흠뻑 젖어 버렸다.

모자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붉은 머리카락도 빗물에 완전히 젖어 적갈색으로 변했다.

“오늘도 백작님께서 외부 손님은 거절하신다고⋯⋯.”

“⋯⋯여기서 기다리겠네.”

“예?”

“데 마레 여백작에게 전해 주게. 오늘은 만나 주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문지기는 초소 안에서 눈을 껌벅였다. 비가 엄청나게 내려 돌지붕 아래에 있는 그의 겉옷에도 물기가 튈 지경이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요?”

“눈도 아니고 까짓거 여름 소낙비인데 뭐 어때. 얼른 가서 말 전하고 와.”

문지기는 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양반이 소나기에 흠뻑 젖어 자기 근무지 앞에서 벌을 서겠다는 게 못내 부담스러우면서도 은근히 뿌듯했다.

공작 나리를 빗속에 세워 둘 힘을 얻은 것은 흡족했지만 저 양반이 비를 고스란히 맞다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 화살은 본인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져서 그는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백작님께 전달할 전갈이 있습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문지기는 아리아드네의 처소 앞에 서서 그녀의 전속 하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전속 하녀의 허락을 받은 후 백작님의 귀한 처소에 물기와 흙이 묻지 않게 몸을 털어내고는 아리아드네의 서재로 들어갔다.

데 마레 백작, 아리아드네는 창가에 놓인 본인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석고상처럼 자리를 지키는 그녀 옆에서 하녀장인 산차가 대신 분주하게 움직이며 그녀가 찾는 장부며 서류들을 정리해주는 중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의 젊은 여주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아리아드네는 단정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울고만 있을 거라는 산 카를로 호사가들의 추측을 말끔히 비켜나간 모습이었다.

삼단 같은 검은 머리는 깔끔하게 틀어 올렸고, 외부인을 만날 약속 따위는 없었지만 당장 왕궁으로 외출해도 무방할 만큼 정성 들여 화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관찰자라면 먹구름이 드리운 탓에 대낮인데도 켜놓은 촛불에 비친 옆얼굴이 깊은 수심이 서려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최상의 기술자의 손을 빌린 분칠도 까슬해진 피부를 다 가릴 수는 없었다.

입술에는 각질이 올라와 있었고 손에는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데 마레 대저택에서 일하는 문지기는 그런 주의 깊은 관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 톨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여주인에게 감탄하며 그가 올려야 할 보고를 올렸다.

“체자레 공작님께서 또 오셨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고작 그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늘 있는 일이잖아.”

데 마레 백작은 자기 시간을 몹시 소중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사용인에게 허튼 짜증을 내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문지기는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마저 고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오늘은 만나주실 때까지 돌아가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아리아드네의 짜증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러나 눈치 없는 문지기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자기의 연민을 은근슬쩍 덧붙였다.

“이게⋯⋯. 매일 오실 기세고⋯⋯. 오늘은 비도 오는데⋯⋯.”

“그런데?”

“빗속에 서서 계시다가 감기라도 걸리시면⋯⋯.”

주인의 속내를 알아챈 건 역시나 하녀장인 산차 쪽이었다.

“피사노 공작이 감기에 걸리면 오히려 좋죠.”

“예?”

“앓아누우면 우리 집 앞에서 비 맞은 개처럼 처량한 척하는 꼴은 그만 봐도 될 거 아니에요!”

산차는 속사포처럼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그 양반 나타날 때마다 문을 닫아걸어야 하니 우유배달이며 식재료 조달도 다 이른 아침에만 받아야 해서 얼마나 귀찮은지 알아요?”

아리아드네는 산차보다 한술 더 떴다.

“문을 왜 닫아걸어?”

문지기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아, 아니, 백작님께서 체자레 공작님께 데 마레 대저택은 일체의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전하라고 하셔서⋯⋯. 그분 빼고 나머지 사람들이 다 드나드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이상하긴 한데, 우리가 그 사람한테 굳이 안 이상하게 굴어야 할 필요가 있어?”

“네?”

어버버 하는 문지기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리아드네는 친절하게 덧붙여 주었다.

“어차피 본인도 알 텐데. 죄다 핑계라는 거.”

산차가 맞장구를 쳤다.

“뇌가 반쪽만 있어도 모를 수가 없죠.”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뇌가 반쪽만 있는 거 같기는 해.”

“그건 그래요.”

“어쨌건, 그냥 그 사람은 세워 두고 다른 사람은 다 열어줘.”

“피사노 공작님 때문에 우리가 불편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아리아드네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산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차, 참말로 그래도 될까요⋯⋯?”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야?”

문지기를 향한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요사이 데 마레 대저택 안에서 데 마레 백작의 말은 법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닙니다!”

문지기는 잽싸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체자레 공작이 뭐라고 할지 두려웠지만, 어쨌건 문지기에게 봉급을 주는 사람은 데 마레 가문이었고, 그 데 마레 가문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것은 아리아드네 데 마레였다.

* * *

- 쏴아아아.

잠시 잦아드나 했던 여름비는 다시금 세차게 지표면을 두들겼고, 들어가나 했던 체자레 공작은 단단히 닫힌 정문 앞에 망부석처럼 서서 그 비를 죄다 맞을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께서⋯⋯. 아무런 답변을 안 주셔서⋯⋯.”

차마 ‘너만 빼고 다 들어오라고 하셨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전할 수 없었던 문지기는 주인의 전갈을 에둘러 전했다.

문지기는 호통이나 분노 세례를 걱정했지만, 체자레 공작은 의외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을 뿐이다.

“그렇게 하지.”

그는 그래서 늦은 오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저물고, 먹구름 사이로 저녁노을이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몰아치는 소나기와 간헐적인 부슬비 사이에서 꼿꼿이 말 등 위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문지기가 제아무리 제 주인의 의사를 뭉뚱그려 전달했다고 하더라도 여기는 아리아드네가 다스리는 땅이었다.

밖에서 공작이어도 이 저택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아리아드네의 의사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결국엔 체자레에게 와서 닿았다.

그가 벌을 서는 와중에 와인 배달을 온 상인이 도착했다.

체자레에게는 닫혔던 그 철문은 와인 상인이 오자 활짝 열렸다.

산 카를로 시내에서 장사를 크게 하는 와인 상인은 물에 폭삭 젖은 공작새 같은 몰골을 한 체자레 공작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오크통을 가득 실은 마차와 그걸 끄는 당나귀 두 마리를 채찍질하며 저택 안쪽으로 들어갔다.

체자레 공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다음에 나타난 것은 고용인들의 가을 유니폼을 의논하기 위해 온 마도바 리넨의 마리니 부인이었다.

그녀는 와인 장수같이 체자레 공작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흘긋 본 것만으로도 누구인지 파악을 다 끝내고 표정 관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체자레는 손으로 온통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만 안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정말 죽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추위와 더위를 뚫고 충심을 보이는 건 체자레가 기꺼이 할 의향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꼴을 산 카를로의 또래 청년에게 들키는 건, 그것도 사랑의 라이벌로 유력한 상대에게 들키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체자레가 노리는 것이 다른 여자였다면 그는 말머리를 돌려 일단 퇴각했다가, 다른 안전한 날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리아드네의 마음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성패가 걸려 있다.

그리고 이건 결코 만만한 게임이 아니었다. 이길지 질지가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그리고 져도 되는 게임 역시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반드시 사야 했다.

그래서 체자레는 오도 가도 못 한 채 자기의 불안 속에 사로잡혔다.

- 다그닥 다그닥!

데 마레 대저택으로 올라오는 포장된 돌길에 세 번째 인기척, 아니 말의 기척이 들렸다.

체자레를 앞질러 들어간 두 손님은 하나는 당나귀, 하나는 짐말을 타고 들어가서 말발굽 소리가 상당히 투박하게 났다.

하지만 이번에 올라오는 사람은 귀족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들어도 경쾌한, 승마용 말의 기척이었다.

‘두 마리? 마차인가?’

젊은 남자는 대부분 다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다닌다지만 오늘은 비가 몹시 오는 날이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집을 출발해버린 체자레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날씨에는 젊은 남자도 마차를 탄다.

‘⋯⋯정말로 발데사르인 건 아니겠지?’

체자레의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그 와중에도 새로 등장한 마차는 기세 좋게 데 마레 대저택의 정문을 향해 다가왔다.

- 이히히힝!

급기야 지척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체자레는 차마 고개를 돌려 마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가 뻣뻣하게 굳어 앞만 보고 있는 사이, 마차가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정차했다.

“⋯⋯날씨가 궂은데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마차 창문 안에서 들렸다.

체자레가 사신(死神)이라도 만난 것 같은 낯빛으로 천천히 마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아니었다. 그런데 발데사르만큼 만나기 싫은 상대였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마차 안에 탄 사람은 다름 아닌,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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