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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69화 (269/733)

<제269화> 후회와 애걸 (1)

데 마레 추기경은 서늘한 녹색 눈으로 체자레 공작을 위아래로 훑었다.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나?”

문지기가 황급히 마차 앞으로 달려 들어가서 낮은 목소리로 추기경의 귀에다 대고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공작도 문지기도 각자 나름의 이유와 해석으로 상대방이 아닌 자신이 경을 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상황 설명을 모두 들은 추기경은 짧게 ‘음’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체자레는 조마조마해가며 데 마레 추기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 다음 행동일 수도 있었다. 한 번 주먹질을 한 양반이 두 번은 못 하랴.

이번에도 맞아줘야 하나? 두 번은 좀 심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데 마레 추기경의 목소리가 체자레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따라 들어와.”

그는 멍청하게 대답했다.

“예?”

“따라 들어오라고.”

데 마레 추기경의 마차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안쪽으로 향했다.

체자레는 허둥지둥 추기경의 은마차를 따라 데 마레 대저택 경내로 들어갔다.

저택 현관에 도착하자 추기경은 우산을 받쳐주는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고, 체자레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말에서 내렸다.

현관의 처마 밑에 선 데 마레 추기경은 체자레에게 말을 건넸다.

“피사노 공작 각하.”

궁정에서 마땅히 사용해야 할 깍듯한 경칭을 붙이며 예를 표한 것이다. 깜짝 놀란 체자레 역시 마주 예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추기경 예하.”

- 삐이걱!

거기까지만 말한 추기경은 손수 현관문을 밀어 열었다. 추기경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자레 역시 미래의 장인어른 내지는 근미래에 자기를 폭행할 남자를 황급히 따라갔다.

추기경은 잠시 일 층 회랑을 체자레와 나란히 걸으며 침묵했다. 체자레는 이 침묵이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가 구겨졌던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기 직전에, 계단 초입에 한 걸음 올라선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공식적인 예는 다 표한 것 같으니 이제는 말 편하게 하겠네.”

체자레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요. 편한 대로 하십시오.”

추기경은 거기에 대해 겸양의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고, 싸늘한 녹색 눈으로 체자레를 노려보았다.

“난 솔직히 네놈 새끼가 아주 마음에 안 들어.”

체자레는 말문이 막힌 채 침만 꼴깍 삼켰다.

“그런데 내 딸 하나는 수녀원으로 영영 떠나버린 와중에 나머지 하나는 파혼한 노처녀가 돼서 이름에 흙만 묻는 꼴은 더더욱 마음에 안 들어.”

체자레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네놈 새끼⋯⋯ 아니, 자네가 들어가서 내 딸을 잘 구슬려 봐.”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내 말은 안 들을 거야.”

“⋯⋯.”

“빨리 성공하고, 썩 꺼져.”

데 마레 추기경은 그 말만 남긴 채, 홱 돌아서서 계단을 혼자 올라가 버렸다.

깎아지른 절벽처럼 높은 꺾은 계단 앞에 홀로 남겨진 체자레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홀랑홀랑 올라가던 계단이었지만 지금은 거대한 심판대 같아 보였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위를 향해 올라갔다. 계단 꼭대기에 있을, 그녀를 향해서.

* * *

- 똑똑.

체자레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을 하고 아리아드네의 서재로 향하는 문을 두드렸다.

데 마레 추기경이 집 안에 들여보내 주기는 했으되, 물을 닦을 수건을 준다든가 하는 일체의 호의가 담긴 신경은 써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집 안에 들어온 뒤로 여기까지 오는 건 쉬웠다.

수문장같이 구는 빨간 머리 하녀는 보이지 않았고, 나머지 하녀들은 체자레를 보자 유령이라도 만난 듯 깜짝 놀라 흩어졌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이 문제였다. 아리아드네의 서재로 향하는 떡갈나무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똑똑똑.

떨리는 손으로 재차 한 노크에도 역시, 답은 없었다.

“아리⋯⋯? 들어간다?”

그는 천천히 거대한 떡갈나무 문을 밀었다. 무거운 문이 경첩 소리를 내며 각도를 좁혔다.

- 삐이걱.

* * *

서류 더미에 파묻혀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던 아리아드네는 방 안에 들어선 불청객에 다소 놀랐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부츠로 그녀의 녹색 카펫을 밟은 채 처마 밑에 들어온 길고양이처럼 적갈색 머리를 부르르 털었다.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절로 뾰족하게 나갔다. 카펫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명히 저택에 못 들어오게 신신당부 해뒀을 텐데.

체자레는 당장 경비를 부를 기세인 자기 약혼녀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 아버지가 들여보내 줬어.”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한층 더 썩어들어갔다. 오호라, 아버지. 이게 아버지의 심중이군요.

그런 그녀의 속내는 옆으로 밀어놓은 채, 체자레가 말을 걸었다.

“우리, 대화 좀 하자.”

그는 아리아드네의 소파 쪽으로 움직였다. 앉으려는 기색 같았다.

카펫에 이어 벨벳 소파마저 빗물에 당할까 봐 기겁한 그녀는 책상 위에 있던 손 닦는 수건을 체자레에게 던졌다.

그는 순발력 있게 수건을 낚아채 얼굴과 머리를 닦았다. 그건 그녀가 그에게 수건을 준 이유가 아니었다.

“깔고 앉아요.”

“앉게는 해주네?”

“아니다. 그냥 서 있어요.”

체자레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초대에 감사하며, 감사히 앉겠습니다.”

그는 수건을 조심스럽게 접어 바지에서 묻어나오는 물이 녹색 벨벳 소파 커버에 닿지 않도록 추스르고는 앉았다. 체자레의 매력은 저거였다.

가끔, 말을 하면 듣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귀신같이, 섬세한 배려들을 덧붙였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안다는 듯이. 앞으로는 비단길만 펼쳐질 거라고 약속이라도 하는 듯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들이었다.

그녀는 체자레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딘가 비뚤어진 자세와 표정이었다.

체자레는 아리아드네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아직 다 식지 않았다는 미세한 신호였다.

정말로 정이 떨어진 여자들은 진짜로 무감각해진다.

아리아드네가 정말로 모든 애정이 다 소진된 상태였다면, 평소와 똑같이 단정한 자세로 앉았을 것이다.

저 부루퉁한 표정은 달래 달라고 조르는 거였다. 체자레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사과부터 던졌다. 새의 깃털처럼 부드러운, 솜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를 노려보았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미간을 구기고 연한 미소를 띤 채였다.

“진짜 날 죽여버린대도 할 말이 없어.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

여기까지 들은 아리아드네는 기가 막혀서 대답했다. 바로 대답하지 않은 건 순전히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지금 사과 따위로 당신이 한 짓을 때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체자레가 얼른 답했다.

“내가 뭘 한다고 아픈 마음이 치유되진 않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뭐든지 다 할게.”

체자레의 물빛 눈에는 호소력이 넘쳤다. 명실상부하게 수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의 이목구비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내가 진짜 다 잘못했어.”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아리아드네는 코웃음을 쳤다.

“뭘 잘못했는지 알기나 해요?”

“⋯⋯약혼녀 생일파티에서 다른 여자랑 놀아난 것도 내 잘못이고, 그 다른 여자가 당신 언니인 것도 정말 다 내 불찰이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사람들 앞에서 다 보이게 그런 것도 진짜 미안해. 당신 얼굴에 결과적으로 먹칠하게 됐어.”

그는 황급히 추가했다.

“이건 진짜 내가 두고두고 갚을게.”

체자레의 품 안에는 폴리싱된 ‘린빌의 백조’가 들어 있었다.

붉은 공단 상자 안에 소중히 넣어두었는데 지금은 이걸 꺼낼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상자 안에 물이 차 있는 건 덤이다.

“평생 당신에게 잘 할게.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표정에서는 설득당한 티가 나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체자레는 티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댄 채 자세를 낮게 숙였다.

“나 정말 정신 차렸어. 추기경 예하께 정말 많이 혼났어.”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조곤조곤 호소했다.

“주먹으로 얼굴을 치시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에게 데 마레 추기경이 빌라 소로토네에 와서 자신을 두들겨 팬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아리아드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사벨라는 바로 끌려가서 말 할 기회가 없었고 데 마레 추기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아버지의 그 주먹은, 이사벨라를 위한 주먹이었을까, 나를 위한 주먹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본인의 분을 풀기 위한 주먹이었을까.

체자레는 계속해서 그녀를 설득했다.

“나 빗속에서 진짜 반성 많이 했어. 나 매일매일 여기 와서 문 앞에 지키고 서 있었어. 이야기 들었지?”

“⋯⋯.”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갈게. 당신한테 잘하는 거로 다 갚을게.”

잠시 다물고 있던 체자레가 작게 말했다.

“잃을 뻔 하고서야 깨달았어, 당신이 얼마나 나한테서 차지하는 의미가 큰지.”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아드네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러나 자기 옷이 여전히 젖어 있는 것을 깨달은 체자레는 그녀 옆에 앉는 대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그냥 여자 그 이상이야.”

체자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여자는 많아. 심지어 예쁜 여자도 많고, 집안 좋은 여자도 많아. 그런데⋯⋯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한 명뿐이었어.”

진심인 태가 묻어나왔다.

“이사벨라 일을 겪으면서 느꼈어. 그냥⋯⋯. 다 달라. 당신은 그냥 여자 한 명, 그 이상이야.”

빗속에서 반나절 넘게 서 있던 체자레의 손은 냉기가 흐르게 차가웠다.

아리아드네가 끼고 있던 실내용 얇은 장갑을 뚫고도 그 온도가 느껴졌다.

“당신은 부족한 나를 지도하는 등대야. 나침반이고, 방향추야.”

체자레의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의 움켜쥔 주먹 안으로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당신은 모자란 나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그는 덧붙였다.

“꼭 말로 지도해주지 않아도, 당신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주먹 손 안에 자기 손가락을 하나 간신히 비집어 넣고는 안도의 한숨을 얕게 쉬었다.

“제발. 이 모자란 사람에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줘. 응?”

이때까지 체자레의 자기 고백을 말없이 듣고만 있던 아리아드네는 드디어 입술을 열었다.

체자레의 내려 깐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선고를 듣는 자의 기분으로 그녀의 움직임과, 숨결과, 체온을 시시각각 따라가고 있었다.

감히 얼굴을 들어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엄두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선고는 체자레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파혼해.“

체자레가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그의 표정이 얼어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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