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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71화 (271/733)

<제271화> 두 딸

데 마레 추기경은 집안이 어수선한 걸 조금 늦게 알았다.

“무슨 일이야?”

추기경의 질문에, 집사 니콜로는 조심스레 단어를 골랐다.

“그⋯⋯. 피사노 공작께서 조금 전에 떠나셨습니다.”

“이야기는 잘됐다고 하나?”

꼴 보기 싫은 놈을 딸 설득하라고 손수 집 안에까지 들였다. 그리고 그놈은 깎아놓은 것처럼 잘생긴 주제에 기름병에 담갔다가 빼낸 것 같은 뺀질거리는 놈이었다.

제아무리 까탈스럽다지만 그래도 결국엔 열여섯 살짜리 여아인 자기 딸을 설득 못 시켰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이⋯⋯. 아가씨께서 파혼을 선언하시고 돌려보내신 모양입니다.”

“뭣이?”

추기경은 뒷목을 잡았다. 자존심 세울 게 따로 있지, 지금 와서 파혼하자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

그의 큰딸은 이미 수녀원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추기경이 왕실에 보낼 딸로 점찍은 자녀는 차녀인 아리아드네였다.

그런데 본인이 이 혼사가 싫다고 직접 물렸다니, 추기경이 그린 큰 그림을 완전히 깨부수는 짓이었다.

“그 애더러 내 서재로 올라오라고 해! 당장!”

* * *

“부르셨어요.”

아리아드네는 부은 눈으로 데 마레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앉아라.”

티 테이블 위에는 따듯한 차가 올려져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준비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고, 아마 집사 니콜로의 예비일 터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렇게 세심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잠자코 앉아서 찻잔을 들었다. 입가에 가져다 대니 표정이 가려졌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와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거냐?”

“뭘요.”

“왜 파혼하자고 했느냐고.”

이 대목에서 그녀는 울컥하고 말았다. 추기경의 서재에 불려 올라왔을 때부터 이미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의 아리아드네를 화나게 하는 데에는 아주 작은 불씨로도 충분했다.

“왜 파혼하자고 했냐고요?”

아리아드네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는 아버지 딸이 자기 언니와 붙어먹은 남자와 결혼하는 꼴을 기어이 보고 싶으세요?”

그녀는 ‘아버지’라는 단어에 굳이 강세를 주어 발음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이를 아예 알아채지 못했거나, 딸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네 입장에서는 불쾌하고 민망할 수 있었다는 거 이해한다.”

추기경은 나름 다정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 자체로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네 언니를 산텐젤로 수녀원으로 보내서 너한테 성의 표시를 했어. 그거면 된 거 아니냐?”

아리아드네의 입술이 분노로 실룩거렸다. 추기경은 설명을 계속했다.

“왕실과의 통혼은 큰 명예이고, 가문에도 여러모로 이득이 된다. 피사노 공작은 비록 적통 왕자는 아니지만 왕가의 방계로 인정을 받은 상태이고, 만에 하나 알폰소 왕자가 전쟁에서 무슨 일이 나기라도 한다면 설마 국왕 폐하께서 타란토 공녀 비앙카에게 왕위를 승계하시겠니? 어떻게든 피사노 공작에게 주려고 하실 게다. 그러면⋯⋯.”

“무얼 위해서요?”

그녀는 날카롭게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가문을 위해서요?”

딸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가득 담겨 있었으나 데 마레 추기경은 부정하지는 않았다. 왕실과 통혼만 하더라도 이폴리토의 장가에 대해서는 걱정을 덜게 된다.

하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의 장인이 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이 가능하다. 예컨대, 법황의 자리를 노려보는 일이라던가.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이것 또한 맞는 말이었다.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의 자리도 꿈만이 아니게 될 혼처다. 이런 기회는 인생에 한 번 오는 거야.”

하지만 추기경은 며칠 전, 큰딸도 똑같이 울분에 찬 말투로 자신에게 분노를 터트렸던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 “그건 내 가문이 아니잖아요!”

아리아드네는 자기 언니처럼 분노를 바로 터트리는 대신,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신분이 높으면 행복한가요?”

추기경은 아주 당연한 일반론을 딸에게 돌려주었다.

“신분이 낮은 것보다는 행복할 확률이 높지.”

아리아드네는 피식 웃었다.

“전 미래를 들여다봤답니다.”

그녀는 모두 해보았다.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이 되기 직전까지 가보았다.

이제까지는 그 자리에 가기만 하면 자기가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막 깨달은 참이었다. 그 자리를 가졌었더라도 자신은 평생 불행했으리라.

“설령 내일 당장 피사노 공작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전 그 결혼을 원하지 않아요.”

“허튼소리 그만하고!”

답답해진 데 마레 추기경은 언성을 높였다.

“순진해 빠진 것, 너는 결혼이 낭만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거로 생각하느냐?”

그는 자신의 딸이 철없는 16세 소녀라고 생각했다.

“결혼은 신분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고,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고, 네 장래의 자식들에게 훌륭한 혈통과 다스릴 영지를 물려주기 위한 것이야!”

그러나 그의 딸은 산전수전 다 겪은, 죽음을 보고 돌아온 장년의 여인이었다.

“약 팔지 마시죠, 아버지. 저한테 그게 전혀 필요 없다는 건 아버지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

아리아드네는 비뚜름한 미소를 띠고 데 마레 추기경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전 데 마레 백작이고, 영지는 없으나 에트루스칸 전체의 신흥 부자 중 첫 손에 꼽히는 재산을 가지고 있어요.”

그녀는 느릿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 필요를 주창하시는 작위, 안전, 내 자식을 먹여 살릴 재산, 다 저한테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냉소적으로 물었다.

“그런 제가, 이 결혼을 왜 해야 하죠?”

“철없는 것! 미혼 여자로 평생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나 해?”

추기경은 피사노 공작에게 딸을 보내야겠다는 자신의 결심이 어디까지가 딸을 위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가문을 위한 것인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한 덩어리가 되어,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가문을 위해서 네 한 몸 희생하라는 소리 아닙니까 지금!”

그래서 데 마레 추기경은 한 점의 망설임조차도 없이 마주 호통쳤다.

“너한테도 좋은 일이야!”

“전 싫어요!”

“닥치고 진행해!”

데 마레 추기경은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옆으로 탁 치웠다.

“피사노 공작에게는 내가 연락하겠다. 파혼은 없었던 일로 하고, 결혼식을 속히 진행하자고. 이만큼 뻗댔으면 됐어! 아비 말 들어!”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은, 며칠 전 들었던 익숙한 절규와 비슷한 질문을 또다시 마주하고야 말았다.

“제 아버지 맞아요?”

추기경은 눈을 껌벅였다. 며칠 전에 이사벨라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 “날 자식으로 보기는 했어요?”

당연히 자식으로 여겼다. 그러니까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도대체 이 아이들은 왜 이런 질문을 나에게 하는 걸까.

아리아드네는 날카롭게 외쳤다.

“어떤 아버지가 눈물과 고난밖에 안 보이는 미래로 자식을 밀어 넣는단 말입니까?”

“왕국의 왕비가 되라는 게 눈물과 고난밖에 안 보이는 미래냐?”

그녀는 울분에 가득 찬 채 이 지구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그녀와 닮았지만 말이 안 통하는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날 사랑하신 적은 있어요?”

- “아니, 사람으로 본 적은 있어요?”

추기경은 눈을 껌벅이며 고민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부족함이 없도록 베풀어줬다고 생각했건만 이 아이들은 왜 나에게 반복해서 이 질문을 던지는 건가.

아리아드네는 코웃음을 치며 아버지의 고민을 일방적으로 끊었다.

“아니, 질문한 내가 바보지. 사랑은 무슨. 남는 부품 창고에 처박는 것처럼 베르가모 농장으로 내쫓았다가, 필요해져서야 데리고 돌아왔는데 사랑할 턱이 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추기경 입장에서는 진심이었다. 루크레치아는 호시탐탐 아리아드네의 어미를 노렸다.

추기경은 그 시도가 성공해서 아리아드네의 어미가 죽었을 거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어미가 죽은 다음의 타깃은? 아리아드네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널 위해 보낸 거야!”

“그리고 이 결혼도 날 위해 추진하시는 거겠죠!”

아리아드네는 크게 웃으며 답했다.

“그 농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세요?”

잔 갈레아초 할멈의 학대와 횡령, 다른 하녀들과 똑같이 궂은일을 하던 일상,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운 날에도 냇가에서 맨손으로 침대보를 빨고 우물가에서 동이로 물을 길어오던 나날들.

“난 그 과거로는 절대 안 돌아가요!”

체자레의 옆자리로도.

아리아드네는 선언했다.

“왕궁에는 데 마레 백작의 이름으로 정식 파혼 통보를 보낼 예정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줄 알고 계십시오!”

데 마레 추기경은 이번에야말로 분기탱천했다.

“이 녀석! 혼인은 가주의, 아버지의 결정사항임을 잊었느냐?!”

중앙대륙에서 혼인은 가문의 일이었다. 가주의 허락이 없으면 혼인하지 못했고, 그 유일한 예외는 국왕의 칙령이었다.

혹은 야반도주한 후에 아이가 태어나서 뒤늦게 인정받거나.

아리아드네는 빙긋 웃었다.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그녀의 차갑게 가라앉은 녹색 눈은 아버지와 똑 닮아 있었다.

“레오 3세 폐하께서는 이 약혼을 애초에 달가워하지 않으셨어요. 한쪽 가문의 수장으로서든, 아니면 국왕으로서든 폐하께서는 약혼 파기를 받아들여 주실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만?”

데 마레 추기경은 말을 잊고 입을 뻐끔거렸다.

“저는 데 마레 백작으로, 법적으로 데 마레 가문의 가주 자격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 약혼 해제는 제가 직접 할 수 있어요.”

“그게 유효할 거로 생각하느냐?”

“물론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청하는 건 약혼의 해제입니다. 혼인이 아니라요.”

그녀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생로병사와 관련된 일은 성황청의 소관이라 교회 법정으로 가지요. 가령, 혼인의 유‧무효를 다투는 일이 그렇습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약혼은 가문의 일로, 정치 내지는 경제의 문제로 치부되지요. 그건 왕궁 법정으로 갑니다.”

왕궁 법정의 판사는 국왕이 임명한다.

“그 판결의 결론이 어떻게 나겠습니까?”

당연히, 국왕의 입맛대로 날 것이다. 약혼 해제는 이루어질 것이고, 그에 대해 다투는 것도 소용이 없다.

완벽한 하극상이다. 그것도 친딸로부터. 데 마레 추기경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살려고요.”

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믿는 뒷배가 있어서 이렇게 나오는 게냐?”

“네?”

그저 살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아버지는 정치와 경제와 혼맥과 암투의 영역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언젠간 너도 결혼을 해야 할 테고, 약혼만 한 상태로 평생 살고 싶지 않은 이상 내 허락이 필요할 텐데, 뭘 믿고 이렇게 나오는 게냐? 설마 발데사르 아이 믿고 그러는 게야?”

데 마레 추기경의 눈이 번득였다. 아리아드네는 의아하게 답했다.

“라파엘? 라파엘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죠?”

추기경은 이를 악물었다. 아리아드네가 왕가와 혼맥을 맺지 않을 거라면, 가문에 최대한 오래 머물러 있어야 했다.

아버지의 속내를 알아챘는지 못 챘는지, 아리아드네는 비뚜름하게 빈정거렸다.

“아니, 결혼에 아버지 허락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죠. 국왕 폐하의 교지를 받던가, 애 배고 달아나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추기경은 재차 분노했다.

“이, 이 발칙한!”

“어쨌거나, 믿는 뒷배는 없고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할게요.”

정말이지, 먼 미래까지 생각하기에는 오늘의 삶이 지나치게 고달팠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데 마레 추기경에게 경고했다.

“아버지. 허튼 생각 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저 못 버려요.”

아리아드네는 덧붙였다.

“아버지 자식은 저 하나 남았거든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일어나겠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리에서 쓱 일어났다.

추기경은 오만무도한 차녀의 태도에 첫 번째로 경악했고, 자신이 그녀를 제어할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두 번째로 경악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바로 호통을 치지 않을 만큼은 영리했다.

- 쿵!

아리아드네가 닫고 나간 서재의 문이 울렸다. 추기경은 머리를 굴려보기로 했다.

작위를 가진 아리아드네는 이 집안에 남아 있어야 했다. 최소한 이폴리토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반드시, 그리고 가급적이면 평생토록.

강자는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 약자의 자리로 순식간에 밀려난 추기경은 머리를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썩 잘 쓰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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