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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72화 (272/733)

<제272화> 비밀을 나누는 사이

아버지와 딸은 각자의 방식으로 행동했다. 행동이 먼저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버지 쪽이었다.

- “발데사르 소후작님, 데 마레 추기경님께서 소후작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 “저를요?”

데 마레 추기경의 호출을 받고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으로 향하게 된 라파엘은 치열하게 고민했다.

‘추기경 예하께서 도대체 나를 왜 보자고 하신 거지⋯⋯?’

라파엘은 신학도였고, 대성황당에서 촉망받는 차기 기수들을 모아 여는 신학 모임의 회원이기는 했지만 에트루스칸 전체 교구의 대표자인 데 마레 추기경과 독대를 하기에는 까마득히 낮은 처지의 젊은이에 불과했다.

결국 추기경이 그를 부르는 것은 그가 스스로 이룬 성취 외에 그가 가진 것—발데사르 후작가의 사람이라던가, 추기경 딸과의 교분이라던가—때문에 부르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한 수 앞을 더 내다보았다.

‘우리 집안에 대한 일이라면 아버지를 통해서 말씀하셨을 거고. 결론은 결국 아리 양 관련한 일이라는 건가.’

그리고 라파엘의 예상은 어김없이 맞아들어갔다.

“⋯⋯그래서 자네가 내 딸을 좀 설득시켜 줬으면 좋겠네.”

“예?”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이 꺼낸 이야기는 라파엘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체자레 공작과 결혼하라고 말일세.”

표정이 새하얗게 굳어버린 하얀 젊은이를 눈앞에 앉혀놓고, 데 마레 추기경은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건⋯⋯.”

은발의 애송이,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열심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노회한 데 마레 추기경의 눈에는 청년이 자신의 제의를 거절하고 싶어 하는 티가 역력하게 보였다.

“난 내 딸을 왕가 아닌 다른 곳에 시집보낼 생각이 없어.”

추기경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이 아이가 내 말은 도통 듣지를 않네. 자네가 우리 아리와 친하지 않은가? 가서 설득 한번 해주게.”

라파엘은 내적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꿈에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라파엘은 사교계에서 암암리에 ‘무소 테리빌레’(muso terribile, 공포의 주둥아리)라고 불렸다.

특히 또래 남자들 사이에서, 앞뒤 안 가리고 독설을 퍼부어서 생긴 일이다.

데 마레 추기경이 동년배의 친구였다면 라파엘은 ‘쓰레기 같은 소리는 작작 하라’며 혀로 아예 발골을 해버렸을 것이다.

욕할 거리가 무궁무진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기대감에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리아드네의 아버지다.

결혼하려면 잘 보여야 하는, 좋아하는 여자의 부친일 뿐만 아니라 라파엘의 원래 인생계획—지금은 플랜비가 되어버렸지만—을 따라가게 될 경우 그의 출세길을 잡고 있는 거물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의견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라파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추기경은 대답을 못 하는 라파엘을 보며 자신의 촉이 맞아들어갔다는 사실에 속으로 기꺼워했다.

그가 보기에 저 어린놈은 분명히 자기 딸에게 흑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차녀 역시, 인간적인 호감까지는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저 어린놈 입장에서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추기경은 알려줄 생각이었다. 네놈은 내 딸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테니, 주제를 알고 썩 꺼지라고.

“지금 내 마차를 준비해 놓았네. 우리 집으로 가면 바로 들여보내 줄 거야. 아리아드네는 집에 있어. 올라가서 바로 이야기를 나눠 보게.”

라파엘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사실 말로도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추기경은 그 정도 굴종의 표시로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원한 결과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면 그만인 사람이었지, 그 가는 길에서 남에게 굴욕을 주는 걸 즐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카드를 들고 있는지 상대방에게 알려줄 필요는 있었다. 추기경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참. 자네의 독서직 시험결과가 아주 좋았다고 들었네.”

파두아의 신학교를 수료한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성황청의 독서직 시험을 쳤다.

독서직이란 미사에서 성서를 봉독할 수 있는 직책으로, 사제가 되는 첫걸음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추기경같이 높으신 분이 일일이 알고 있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에 대해 일부러 찾아본 것이다.

“부모님께서 자네가 시험 친 사실을 알고 계시나?”

뻔히 알면서 물어본 질문이다. 라파엘은 그 형이 죽어 이제 발데사르 가문의 독자(獨子)였다.

라파엘이 사제가 된다면 집안은 방계로 넘어가 버릴 것이기 때문에 발데사르 후작 부부가 알았다면 이를 결코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아직은 모르고 계실 겁니다.”

라파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추기경은 부러 자상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진리를 구도하는 길은 험한 길이라 부모님들은 신앙의 신실함과는 별개로 자기 자식이 그 길을 가는 걸 반기지 않으실 때가 있어.”

그는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가볼 가치가 있는 길이라네.”

그러니까 얼른 성황청에 귀의하고 내 딸 옆에서는 썩 꺼지게. 자네 부모님께는 이르지 않을 테니.

자기 할 말을 다 한 추기경은 라파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나가 봐.”

“⋯⋯.”

“말들이 기다리고 있네.”

“⋯⋯예.”

* * *

라파엘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 앉아 아리아드네를 만나면 도대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체자레 공작과 결혼하는 게 좋겠어.’

입이 찢긴대도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종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싫은 일이었지만, 그 상대방이 체자레일 때에는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체자레는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파락호에 앞뒤 가리지 않는 무뢰배였다.

어렸을 때부터 체자레를 보아온 라파엘은 사교계에 도는 그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 진실임을 잘 알고 있었다.

쉽사리 욱하고, 신의가 없는 자였다. 도대체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기 딸을 그런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한단 말인가.

“들어가 보시지요.”

그 집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아리아드네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라파엘은 도저히 데 마레 추기경이 시킨 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네 아버지가 나에게 너를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하셨어.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래. 그게 방법이었다.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서재 문을 부드럽게 노크했다.

- 똑똑.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 똑똑똑.

그러나 재차 낸 인기척에도 방 주인은 대답이 없었다.

결국 라파엘은 살짝 열린 문을 밀고 아리아드네의 서재 안으로 스스로를 초대하기로 했다.

“아리⋯⋯?”

방 주인은 잠들어 있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초여름 바람이 보드랍게 불어와 리넨 커튼을 흔들었고, 그 바로 앞에 놓인 거대한 원목 책상 위에 가냘픈 체구의 소녀가 양팔을 베게 삼아 엎드린, 그림 같은 순간이었다.

라파엘은 미소지었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책상 뒤로 돌아가 열린 창문부터 닫았다.

“그러다가 감기 걸려요.”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나직하게 혼잣말했다. 엎드려 자는 것 역시 목과 어깨 건강에 좋지 않았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소파로라도 가서 자라고 깨울 요량이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유하게 흔들었다.

“아리, 아리. 일어나요.”

하지만 그녀는 깊이 잠든 모양인지, 미동도 없었다. 그는 팔베개를 한 채 잠든 그녀의 양팔을 풀어냈다. 딱 쥐 나기 좋은 자세였다.

“일어나서 소파 가서 자자.”

그는 그녀의 왼손을 잡아끌었다.

엎드려 자고 있던 탓에 장갑은 조금 손끝까지 밀려 올라와 있었고, 얇은 간절기용 비단 장갑은 그 소재 탓에 미끄러웠다.

아리아드네가 끼고 있던 라파엘의 손길에 스르륵, 딸려 올라와서 혼자 벗겨져 버렸다.

“!”

라파엘은 경악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의 왼쪽 팔꿈치 아래는 신선한 피에 갓 담갔다 뺐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시뻘겠다.

피가 뚝뚝 떨어질지라도 차라리 일괄적으로 붉었으면 나았을 것이다.

그녀의 왼손 전체는 얼룩덜룩하게 농도의 차이가 있었고, 끔찍한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높낮이가 다르게 얽어 있었다.

팔꿈치로 갈수록 새로 입은 화상 같았고, 손가락 끝으로 갈수록 오래된 화상처럼 상처가 더 깊고 곯아 보였다.

“!”

그리고 라파엘은 재차 놀랐다.

그의 관리되지 않은, 적나라하게 질겁한 얼굴을 잠에서 깨어난 아리아드네가 아연실색한 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

라파엘은 정신없이 주워섬겼다.

“아니, 그게, 보려고 한 게 아니고⋯⋯.”

아리아드네는 후닥닥 라파엘의 손에서 장갑을 잡아채 서재 구석으로 달아났다.

왼손을 등 뒤로 숨긴 채였다. 그녀의 커다란 녹색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리, 미안해요.”

당황한 라파엘은 손사래를 쳤다.

“내가 갑자기 들어와서⋯⋯. 그게, 추기경 예하께서 보내셔서 왔는데 주인 대답을 안 듣고 방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라파엘은 중구난방으로 모든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런 라파엘에게 아리아드네가 간신히 입을 연 첫마디가 날아와 꽂혔다.

“오, 옮는 건 아니에요⋯⋯.”

왜인지는 몰랐으나 이 말은 라파엘의 가슴을 더할 나위 없이 아프게 했다.

“오, 세상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가가서 아리아드네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잠시 놀랐을 뿐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웠겠지만 상처받은 아리아드네의 표정에 그는 그 말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을 보고 놀란 건 사실이었고, 사실 솔직히, 징그럽다는 생각을 한 것 역시 사실이었으니까.

“그 손⋯⋯. 어쩌다 그런 거예요?”

라파엘과 아리아드네는 대부분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이였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묵묵부답이었다.

라파엘은 물어본 사실 자체가 죄스러워졌다.

“미안⋯⋯. 불편하다면 물어보지 않을게요.”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렸다.

그 무겁고 꿉꿉한 공기는 라파엘이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려면 헤엄쳐서 건너야 하는 대양을 상징하는 듯했다.

한참의 고요가 지나고 먼저 말을 한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비밀⋯⋯. 지켜주실 거죠?”

간절함과 우울함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라파엘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손 이야기를 발설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정말로, 가슴 밑바닥에서 끌어낸 진심이었다. 라파엘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아리아드네는 희미하게 웃었다.

“믿을게요.”

라파엘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믿는 것 외에는 없었다.

남에게 목숨줄을 맡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아리아드네였다.

그녀는 전생의 약혼자도, 아버지도 믿을 수 없었다. 라파엘은 믿을 수 있을까. 그건 세월만이 알려줄 터였다.

“이리, 이리 와요.”

라파엘은 여전히 서재 구석 한쪽 코너에 서 있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편하게 앉아요. 자기 방에서 벌서지 말고. 내가 방 주인 같잖아요.”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데 마레 추기경이 시킨 심부름, 혹은 그 고자질에 대해서는 완전히 까먹어 버린 상태였다.

그때, 그녀의 서재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 장갑을 왼손에 끼워 넣었다. 하지만 급한 나머지 장갑은 손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시뻘건 화상 자국 같기도 하고 피부병 같기도 한 왼손이 움직였다.

라파엘은 그 모양을 쳐다봐도 되는지, 고개를 돌려주는 편이 그녀에게 더 편할지, 아니면 도리어 상처일지 고민했다.

“아가씨.”

하지만 다행히도, 목소리의 주인은 산차였다. 아리아드네는 황급히 장갑을 끼려던 시도를 그만두고 안도한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일이야, 산차?”

산차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가씨. 나와보셔야겠어요.”

아리아드네는 되물었다.

“지금?”

“네. 일 층에 국왕 폐하의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저번처럼 낭독하는 것은 아니고 편지 같은데, 직접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이건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장갑을 끼고 몸가짐을 단정하게 한 아리아드네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라파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일 층에서 국왕의 시종이 편지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거대하고 화려한, 금박이 가득 박힌 양피지 봉투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국왕의 시종은 그녀에게 궁정식 예에 따라 국왕 폐하의 편지를 전했고, 절차를 거쳐 편지를 받아든 아리아드네는 밀봉을 뜯고 그 내용물을 꺼냈다.

화려한 외관에 비해 내용물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그 안에는 딱 한 장의 양피지가 들어 있었고, 그 양피지 위에는 단 두 줄의 글이 쓰여 있었다.

「데 마레 여백작의 청을 받아들여 파혼을 허가한다.

- 레오 3세.」

딸의 물밑에서의 행동도 그 결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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