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3년 후, 승전보
왕궁에서 파혼을 허가하는 교지가 내려온 후, 데 마레 추기경은 앓아누웠다.
실제로 아픈지 속이 상해 두문불출하는 것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아리아드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며칠 저러고 나면 나아지시겠지. 안 나아져도 뭐. 알아서 하실 일이다.
체자레 공작과 데 마레 백작이 파혼했다는 소식은 산 카를로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모두 그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피사노 공작 체자레는 이를 견디다 못했는지 피사노 영지로 떠나 버렸다. 짐을 깨끗하게 싸서 아예 빌라 소로토네를 비워 버렸다고 했다.
수도에서 달아난 피사노 공작 체자레와 반대로, 데 마레 백작 아리아드네는 사교계 소문 따위 그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교우 관계가 넓지는 않은 터라 사교계 행사를 챙기며 나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스텝을 준비하기 위해 외출이 필요할 때면 마다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구휼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땅을 사들였다.
“아가씨, 그건 어디에 쓰려고 그러세요?”
걱정이 된 산차가 물었다.
“그런 낙후된 동네 땅값은 오르지도 않을 텐데⋯⋯.”
아리아드네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학교를 지을 거야.”
“네? 학교요?”
“응. 간단한 글자와 숫자, 읽기와 산수를 가르치는 학교.”
읽고 쓸 줄 모르면 결국 몸 쓰는 업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농사꾼도 땅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진 게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아이들은 잡부, 아니면 가사일 같이 품삯이 낮고 경쟁이 극심한 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진입 난도가 낮은 업종의 숙명이다.
“상단 운영에 한 발을 걸쳐 보니까, 쓸만한 사람이 몹시 적어.”
똘똘한 아이를 데려와서 밥을 주며 글자부터 가르치는 건 상단으로서도 손해다.
기초적인 장부는 읽을 줄 알아야 일 배우기도 쉬웠다. 집에서 어깨너머로 아버지의 일을 배운 상인의 자식만이 상인이 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리고 구휼원 아이들도 언젠간 독립을 해야지.”
구휼원 전원이 간호원이 될 수는 없었다. 흑사병이 물러간 지금, 다음 역병이 돌기 전에는 간호원의 수요는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글자와 셈을 익힌다고 모두가 상단에 취업할 수는 없겠지만 선생이 될 수도 있고, 타지로 가서 더 많은 기회를 노려봄직도 했다.
공부는 아이들에게 많은 문을 열어줄 것이다.
학교 개설에만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흑사병 시기에 벌어들인 재산을 여러 뭉치로 나눠 그중 하나의 운용을 보카네그로 상회의 카루소 대표에게 맡겼다.
“안정적인 운용 부탁해요.”
흑사병 시기에는 입이 떡 벌어지게 공격적으로, 거의 도박수에 가까운 짓거리를 하며 돈을 벌던 사람이 흑사병이 끝나니 보수적으로 돈을 굴려 달라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인지 도통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카루소 대표는 아리아드네의 주문에 충실했다.
자고로, 클라이언트란 원래 이해할 수가 없는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똥으로 건물을 짓고 싶다고 해도 지어주면 그만이지.’
카루소 대표는 칼같이 대금을 지급하는 정직한 거래상대방이라면 설령 상대방이 악마일지라도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의 메인 클라이언트이자 이제는 동업자에 가까워진 사람은 상당히 양심적이었으며, 지출의 대부분은 사회공헌활동으로 메우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사업적으로 크게 번창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원하는 게 좀 이상할 뿐이다.
아리아드네가 이렇게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일만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타란토로 사람을 보내 이폴리토가 태어나기 전, 루크레치아의 행적을 훑었다.
“쓸만한 건 없네.”
“아무래도, 오래전 이야기니까요.”
가장 소득이 있었던 건 ‘루크레치아가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과 어울렸다’는 이야기였다.
귀족의 아들처럼 보였다지만 그가 정확히 어느 집 자제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크레치아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마 이폴리토도 모를 것이다. 하녀들에게 수소문을 해 봤지만 말이 갈렸다.
“언제고 아버지께 여쭤보던가 해야겠어.”
“그것참 아이러니하네요.”
“뭐라고 말을 꺼내야 어색하지 않을지 항상 고민 중이야.”
“고민 백 년 해도 답이 안 나오겠는데요.”
게다가 이제까지 나온 정보로는 이폴리토가 그 남자의 아들이라고 콕 짚을 수도 없었다.
좀 어울린 것과 그 남자의 애를 밴 것 사이에는 아주 큰 간극이 있으니까.
“그 집안 식구들의 증언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밀한 이야기니까 ‘미스 로시’와 많이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내막을 모를 거예요.”
“머리통에 화살 맞은 것도 아니고 그 집안사람이 우리에게 이폴리토의 비밀을 알려줄 리가 없잖아.”
“그건 또 그래요⋯⋯.”
“진득하게 기다려보자.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니.”
집안의 통솔권과 돈을 움켜쥐고 이폴리토의 목덜미를 노리는 건 결국 아리아드네 쪽이었다.
이폴리토는 배다른 여동생이 이렇게까지 자기를 주시하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채 수도에서 자기가 전에 살던 대로 사는 중이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용돈이 반 토막이 난 나머지 전처럼 흥청망청 쓰지는 못하고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부하처럼 따라다니게 되었다는 것과, 간혹 친여동생의 면회를 다닌다는 것 정도였다.
“인성 상 이사벨라 아가씨 면회는 안 갈 줄 알았는데 그건 또 가네요?”
“그래도 마지막 남은 혈육이다, 이건가.”
이폴리토가 산탄젤로 수녀원에 가끔 면회하러 간다는 사실은 데 마레 추기경에게도 알려졌지만, 그는 굳이 막지는 않았다.
그렇게 별일 없이 3년이 흘렀다.
* * *
“오빠. 올해도 모라토리움 안 갈 거야?”
줄리아가 발데사르 가의 자녀들 거실에서 그리니시*를 오도독오도독 씹으며 물었다.
모라토리움은 예삽교의 사제가 되고자 하는 신학도들이 짧으면 일 년, 길면 오 년까지의 기간 동안 다녀오는 수행 봉사였다.
모라토리움을 떠난 신학도들은 이교도 지역에 가서 예삽교 신앙을 퍼트리거나, 아니면 낙후된 시골로 가서 올바른 신앙을 가르치고는 했다.
“글쎄.”
“안 가면 사제서원을 받을 수가 없잖아.”
“사설 교육 봉사 중인데 사제서원으로 쳐 주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라파엘이 사제서원을 받고자 한다는 건 발데사르 후작부인과 줄리아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작부인이 ‘절대로 너희 아버지께는 말하지 마라’고 신신당부를 한 덕택이었다.
줄리아는 그리니시를 한 개 더 꺼내 아그작 씹으며 오빠에게 말했다.
“그냥 속세에 남지 그래. 엄마도 좋아하실 거야.”
“⋯⋯.”
“오빠 아리 좋아하지?”
라파엘은 흠칫 놀라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누가 그래?”
“그걸 누가 말해줘야 알아? 오빠 태도가 부르짖고 있잖아. 나는! 아리아드네를! 좋아한다!”
“아오.”
라파엘은 인상을 쓰며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동생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파두아로 떠나 공부를 더 하겠다는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수도에 눌러앉아 팔자에도 없는 선생님 노릇 중이었다.
심지어 왕족이나 귀족의 과외선생도 아닌, 평민들의 학교 선생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연 구휼원 아이들을 위한 학교—스쿠올라 디 그레타(Scuola di Greta, 그레타의 학교)—는 근처 빈민가 아이들까지 받아들여서 총 재학생 숫자가 300여 명에 달하는 규모로까지 커졌다.
아리아드네가 산차를 가르쳤듯이 짬을 내서 조금씩 선생 노릇을 하기에는 감당이 안 되는 크기였다.
아리아드네가 고민하는 태가 나자마자, 반백수였던 라파엘이 적극적으로 스쿠올라 디 그레타의 선생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단순한 글 선생일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인원이 늘며 라파엘은 교재 개발 및 교장 선생님의 역할까지 맡게 된 상태였다.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일에 그렇게까지 몰입하면서 시간 낭비하고 있는 데다가 아리가 부르면 키우는 강아지처럼 달려가는데 어떻게 티가 안 나.”
줄리아는 조곤조곤 피붙이를 털었다.
“오빠가 입에 독침 물고 다니는 거 유명한데 난 오빠가 아리 앞에서 혀 놀리는 거 지난 5년간 한 번도 못 봤다.”
“⋯⋯사람이 갱생한 거라고 봐주면 안 돼?”
“그런 소리 하려면 내 앞에서도 잘해봐라, 좀.”
줄리아는 집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운 채로 친오빠에게 연타를 먹였다.
“그냥 아리한테 고백하고 아버지 통해서 추기경께 청혼서 넣으면 안 돼?”
지난 3년간 아리아드네에게 새로이 나타난 혼처는 없었다.
처음에는 피사노 공작에게 밉보이기 싫어서였겠지만 체자레 데 카를로가 국경지대에 있는 피사노 영지에 틀어박혀 3년간 단 한 차례도 수도에 나타나지 않자 그의 존재감은 점차 희미해졌다.
그 이후로도 아리아드네에게 새로운 혼처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사교계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절대로 딸을 시집보내지 않을 태세로 매서운 눈을 번득이고 다닌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거절당할 게 뻔한 청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까.
굳이 하나를 더하자면 라파엘 데 발데사르의 존재도 쳐야 할 것이었다.
발데사르 가의 후계자에게 원한을 사고 싶은 사람 역시 많지 않았다.
“아리도 이젠 나이를 먹었고.”
1127년이 된 지금, 아리아드네는 20세가 되었다. 결혼이 급할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추기경 예하께서 딸 시집을 안 보내려고 하시는 이유는 뻔하잖아.”
그 집에서 작위를 가진 사람이 아리아드네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들끼리 하실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아리네 오빠가 자식 낳으면 그 애한테 데 마레 백작 작위를 승계시켜주겠다고 하면 끝까지 반대하시지는 않을 거 아니야. 우리 집에 굳이 백작위가 하나 더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있잖아, 줄리아.”
줄리아의 더없이 실용적인 관점에 대해 라파엘이 가져온 답변은 완전히 다른 시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사랑?”
줄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네가 지금 하는 그거’라고 대답하려던 그녀는 조금의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사랑이라⋯⋯. 보고 싶은 마음?”
줄리아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프랑수아를 생각했다. 그들은 지난 세월 동안 상당히 가까워졌다.
처음엔 줄리아를 성격 나쁜 귀족 아가씨라고 생각해서 뾰족하게 굴던 프랑수아도 이제는 태도가 상당히 누그러졌다.
줄리아를 오래 겪으며 그녀의 성품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프랑수아는 그녀를 여자로 대하지 않았다.
신분 차이 때문에 꺼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타고난 매력이 모자라 아예 여자로 보지 않는 것인지 줄리아로서는 가늠할 길이 없었다.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갈증?”
그 말을 하는 줄리아의 혀끝이 까끌까끌했다. 그녀는 갑자기 그리니시가 맛이 없게 느껴져 내려놓고 말았다.
라파엘은 동생을 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난, 사랑은 뭐든지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상대방이 살인마가 되었든, 범죄자가 되었든, 아니면 불구가 되었든 다 포용할 수 있는 마음. 그의 부모님이 자녀들에 대해 그러셨듯이.
그리고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팔을 보았을 때 움찔했던 스스로에 대해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그때 왜 당황했을까. 나의 사랑이 모자랐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거 알아? 내가 너무 부족해서, 상대방에게 당당히 고백할 수 없는 마음.”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과 차원이 완전히 달랐지만 그녀도 비슷한 것을 프랑수아에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게 되었을 때 나와 함께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라파엘은 약간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한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졌을 때.”
몽상가인 오빠와 반대로 실용적인 줄리아는 오빠에게 일침을 놓았다.
“그런데 오빠, 시간은 유한한 거라고.”
줄리아는 라파엘의 한심하단 눈빛을 똑같이 쏘아 보내 돌려주었다.
오라비는 곱상했고 여동생은 날카롭게 생겼지만 눈을 흘기는 모양새만큼은 둘이 똑같았다.
“완벽한 환경을 다 갖출 때까지 미루다가는 아리도 오빠도 늙어 죽겠어.”
라파엘은 동생의 충고를 귀담아듣는 대신, 발끈해서 반박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언제까지 혼처들 다 거절만 할 거야?”
“그 얘기가 왜 나와?”
혼인적령기가 지나가고 있는 건 줄리아도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지난 3년간 백작가 둘, 후작가 하나의 청혼을 거절했다.
마지막 청혼은 꽤 괜찮은 혼처여서 발데사르 후작부인이 딸을 붙들고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어르고 달래고 눈물까지 보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줄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뻗댔을 뿐이다.
‘그 사람이 아니면 싫은걸.’
오빠랑 이야기하다가 괜히 기분만 상해 버린 줄리아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 채 입을 다물었다.
‘싫으면 말아라, 라파엘 데 발데사르.’
그리고 라파엘은 곧 여동생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중앙대륙 전체에 전무후무한 승전보가 울려 퍼졌다.
제3차 십자군이 천년 고도, 신의 도시 예사크를 함락시켰다.
* 그리니시 : 빼빼로처럼 길쭉하게 구워 로즈마리와 올리브, 소금으로 양념한 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