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레오 3세의 위기감
천년 고도 예사크는 천혜의 요지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예사크의 성벽은 그 등 뒤로 깎아지른 절벽을 안고 있어 공격 루트는 전면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공격자를 맞이할 성벽은 3중으로 지어져 1차, 2차, 3차 방어선을 모두 뚫어야 시내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예사크의 지배자, 이맘 하툰은 물론이고 제3차 십자군 구성원 중 상당수, 그리고 중앙대륙의 그 누구도 예사크가 함락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알폰소 카스코 네로’와 그가 이끄는 ‘검은 투구 부대’는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공성탑 위에서 공격하면 높이의 이득은 우리에게 있다!”
개전을 알리는 궁병의 화살비가 예사크 성벽 위로 쏟아져 내린 후, 강맹한 투창이 2차로 방어부대를 유린했다.
별도의 창병 부대가 아닌, 전쟁터에서 지난 4년간 구르고 구른 기사들이 손수 던진 창이었다.
일반병과 기사는 그 위력에서 견줄 수 없는 차이가 났다.
그렇게 성벽 위의 방위군을 대충 털어내고 난 뒤에는 그물로 엮은 나무 사다리를 던져 검은 투구 부대가 성벽 위로 직접 침투했다.
한 명 한 명의 무위가 압도적이라, 짧은 훈련 끝에 성벽 위에 배치된 이교도 방위군은 버텨내질 못했다.
그렇게 성문을 열고 난 뒤에는 파죽지세였다.
“몰아쳐라! 이 뒤는 오합지졸뿐이다!”
가장 바깥쪽 성벽에 물자와 군사를 집중한 회심의 방어선을 구축했던 방위군은 1차 저지선이 뚫리자 우왕좌왕했다.
2차 저지선은 1차보다도 쉬웠다.
2차 저지선이 뚫린 다음에는 방위군 측에서 항복과 결사 항전을 두고 내분이 났다. 자연히, 3차는 더더욱 쉬웠다.
‘알-룸마니 성지 수복 전투’ 때 낙마 사고를 당한 율덴부르크 대공은 고관절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그 뒤로 그는 말 타는 데에 어려움을 느껴 직접 부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그 빈 자리를 메운 것은 알폰소 왕자였다.
즉, 예사크 함락전의 중군 사령관이자 총지휘관은 알폰소였고, 승전의 과실이 가장 크게 돌아간 사람도 알폰소였다.
- “에트루스칸의 왕자님이 예사크를 함락시키셨대!”
- “승전 장군으로 곧 중앙대륙에 돌아오실 거라고 들었어.”
- “‘사자왕 기욤’의 성검 ‘칼레드부흐’를 우리 왕자님이 드셨다며? 그걸 드는 사람은 중앙대륙의 황제가 된다던데!”
에트루스칸 사람들은 그간 연락이 끊겼던 적통 왕자, 알폰소 데 카를로의 승전보에 열광했다.
갈리코 여자의 혈통이라며 그 충성심을 의심했던 과거는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3년 전, 갈리코 중장기병대가 침공했을 때 에트루스칸 왕국은 때마침 갈리코 기사단에 퍼진 흑사병 덕에 그들을 패퇴시켰을 뿐이지 전투에서는 단 한 번도 갈리코 인들을 이기지 못했다.
예사크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치며 에트루스칸 왕국의 이름을 드높인 황금의 왕자님은 에트루스칸 국민의 열패감을 한 번에 씻어내 주었다.
백성들은 입을 모아 왕자를 칭송했다. 다만 이런 분위기가 몹시 마음에 안 드는 한 사람, 아니 한 커플이 있었다.
“검 하나 얻었다고 황제위를 우리가 가지게 될 리가 있나?”
심기가 심히 불편해진 레오 3세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무지렁이 백성 놈들이 괜히 호들갑이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중년 부인, 루비나가 국왕의 말을 받았다.
“십자군 선단이 곧 타란토 항구에 기항한다면서요? 왕자가 돌아왔다고 해서 아랫것들이 허튼 생각 하지 말아야 할 텐데요.”
레오 3세는 3년 전, 아리아드네를 왕비로 올리려다가 실패한 이후로는 얌전히 루비나와 함께 지냈다.
데 마레 백작, 아리아드네가 자진 납세한 곡식으로 당장 곡물을 확보할 필요성이 사라진 와중에 그녀가 자기의 친아들과 약혼까지 해 버렸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레오 3세라고 해도 아들, 공식적으로는 친조카의 전 약혼녀를 정부도 아닌 정식 왕비로 올리는 것은 무리수였다.
게다가, 그간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제외하고는 국왕의 눈에 딱히 차는 여자가 없었다.
정치적으로 이득이 될 만한 짝도, 그렇다고 그 아름다움으로 국왕을 홀린 여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그렇게 불안한 왕의 제수이자 왕의 정부 위치를 유지해 나가는 중이었다.
자연히, 그녀는 국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아니, 사실 아랫것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요.”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백설들 사이의 불온한 분위기에 국왕이 경도될 필요는 없다고 은근슬쩍 그를 위로했다.
세금이야 대귀족이 걷어서 왕가에 올려보내는 거였다. 백성들의 의견 그 자체는 크게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레오 3세의 기분이 조금 나쁜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이 국왕의 나쁜 기분을 십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알폰소 왕자님께서 데리고 오실 기사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도통 모르겠네요. 기사들이란 원체 터무니없는 공상을 하는 족속들 아닙니까.”
예사크를 함락시키고 승전 장군이 되어 중앙대륙으로 금의환향하는 그의 적통 아들은 십자군 전쟁 도중 수하로 거둔 기사 800여 명을 데리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현지에 정착한 자, 고국으로 돌아가는 자를 제외하고 끝까지 왕자를 따르기로 결정한 자들이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중무장한, 전쟁 경험이 생생한 기사 800여 기라니. 웬만한 콘도티에로에 버금가는 무장이었다.
여기에 지상군 2-3000명만 더하면 바로 웬만한 소규모 공성전이나 중규모 회전은 가능한 무력이었다.
루비나 공작부인이 부추긴 상상에, 레오 3세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는 이미 아들의 반란을 겪은 적이 있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은근히 물었다.
“그 치들⋯⋯. 성벽 안으로 들어오게 허용해줘도 괜찮을까요?”
레오 3세는 말없이 옥좌에 앉아 옥좌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만전을 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요.”
국왕의 흰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는 결단코 친아들에게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 * *
“라파엘, 알폰소가 돌아왔대요!”
아리아드네는 환희로 알폰소의 귀환 소식을 맞았다.
“먼 땅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알폰소와 아리아드네 사이에 명백히 존재하는 거리감이 그녀를 덮친 것은 기쁨이 먼저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알폰소가 떠나 있는 사이 아리아드네는 한 차례의 약혼과 파혼을 거쳤다.
자의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알폰소 본인과 연락이 끊긴 지는 어언 4년을 꽉 채워 지난 지 오래였다.
갑자기 지금 상태를 깨달은 그녀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라파엘은 조용해진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변명을 시도했다.
“음. 그러니까. 친구 된 입장으로서도, 주군을 모시는 신하의 입장으로서도 알폰소 왕자님의 귀환이 반갑달까요.”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주저함을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 답했다.
“제가 마지막으로 가서 본지도 꽤 되긴 했지만, 알폰소는 그렇게까지 고생한 모습은 아니었어요.”
그는 아리아드네가 부끄러워하는 모양새를 대뜸 부추기며 그런 방향으로 이야기를 몰고 갈 만큼 몰염치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녀가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라파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아리아드네를 위로했다.
“전쟁터가 알폰소에겐 아주 몸에 꼭 맞는 옷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전신(戰神)이라고 추앙을 받다가 돌아오는 거 아닙니까.”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런가요.”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스쳐 간 수심이 깊었다. 저 여자는 알폰소를 여전히 정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돌아온다면 다시금 잠잠해진 불꽃이 타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으되, 그걸 티를 내기엔 너무 염치가 없어서 저렇게 구는 거였다.
라파엘은 그만 바보 흉내를 때려치우고 본심을 내뱉고 말았다.
“알폰소와 연락이 오래 안 된 건 알아요. 그렇지만 무슨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랬을 겁니다. 내가 아는 알폰소는 그래요.”
비겁하게 도망칠 친구는 아니니까.
“오해가 있었다면 탁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면 다 풀리게 됩니다. 이제 돌아오잖아요. 기회예요. 너무 지레짐작하면서 걱정하지 마요.”
라파엘은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자아비판을 했다.
머저리 등신. 굴러들어오는 기회를 주워 먹지도 못하는 바보 천치. 그런데 그게 나였다니.
거기서 그냥 모르는 척 쓱 주워 먹었으면 얼마나 좋아. 이러니까 3년을 옆에 착 붙어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못 했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서재에 비추어 들어오는 햇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창백한 피부에 얹혀 사금(砂金)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빛줄기는, 그 미소는 라파엘에게 천금을 얻은 것보다도 기뻤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띠고 라파엘에게 답했다. 희망이 생기처럼 차올랐다.
“고마워요.”
“⋯⋯.”
라파엘은 아주 잠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말을 잊었다.
그가 뒤늦게 입안에서 모아 올릴 수 있었던 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에요’라고 자기 눈을 찌르는 발언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오늘 밤에 이불을 발로 찰만한 스스로를 향한 구업(口業)을 하나 더 짓기 직전에, 아리아드네의 서재 안에 황급한 노크가 울렸다.
- 똑똑똑!
“무슨 일이야?”
“아가씨!”
다급하게 서재에 들어온 것은 산차였다.
“편지가 왔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리아드네에게, 산차는 차오른 호흡을 고르며 간신히 내뱉었다.
“발신인을 보셔요! 빨리 보시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아리아드네는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편지 겉봉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타란토 항구, 제3차 십자군.」
아리아드네의 눈이 커졌다. 제3차 십자군에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올 사람이라고는 한 명밖에 없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리아드네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개봉하다가 헛손질을 반복했다. 마음이 급하면 급할수록 손발은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리?”
라파엘의 질문에 대답할 짬도 없었다. 간신히 밀봉을 풀어낸 그녀는 허겁지겁 내용을 눈에 담았다.
편지는 꽤 길었다. 다소 크고 투박한 글씨긴 했지만 양피지 한 장을 앞뒷면으로 빼곡하게 채운 길이였다.
편지를 읽어나가는 아리아드네의 표정은 갈수록 창백해졌다.
첫 페이지를 빠르게 읽어나간 그녀는 두 번째 페이지는 더욱 빠르게 읽었다.
읽었다기보다는 훑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의 속도였다. 도저히, 정독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아리?”
심상치 않은 그녀의 기색에 라파엘이 재차 물었다.
“괜찮아요?”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어깨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래요?”
아리아드네는 죽은 사람같이 파리한 얼굴로 간신히 내뱉었다.
“라파엘⋯⋯.”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손에 들린 편지를 흘깃 쳐다보았다. 푸른 잉크로 쓰인 편지의 말미에는 발신인이 「A.」라고만 적혀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 혼자 있게 해 줄래요?”
라파엘이 눈을 크게 뜨고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알고 싶은 마음, 호기심을 넘은 갈망마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그걸 제대로 챙길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냈다.
“다⋯⋯. 헛된 희망이었나 봐요.”
그저 나 혼자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떨궜다.
* * *
“사령관님⋯⋯. 아니, 왕자님!”
알폰소는 타고 있는 백마 위에서 자신을 부른 베르나르디노 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타란토 항구에서 뭍에 상륙한 알폰소 왕자와 그를 따르는 휘하 기사들은 남부인들의 열성적인 환영을 받으며 육로 행군을 시작했다.
지금 그들은 수도 산 카를로로부터 하루 반 정도 떨어진 외곽의 평원을 지나던 참이었다.
“엘코 경이 뭔가를 가져온 모양입니다.”
알폰소가 디노 경의 이야기를 듣고 행렬의 뒤편을 바라보니, 한 손으로 말고삐를 몰아 쥔 엘코 경이 허겁지겁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오는 모양새가 보였다.
그는 한쪽 팔과 눈을 잃은 후로 몸의 균형이 무너져, 척추가 뒤틀리고 곱사등이처럼 등을 구부린 채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알폰소 왕자는 말없이 엘코 경의 전언을 기다렸다.
“왕자 저하! 팔라지오 카를로로부터 국왕 폐하의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알폰소는 웃음을 흘렸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따스한 봄 햇살에 어울리지 않는 냉소였다.
그의 아버지에게서 온 전갈이 즐거운 이야기일 리가 없었다.
흑색 갑주로 중무장한 알폰소 왕자는 고고하게 말머리를 우측으로 돌렸다.
그에게서는 거친 군인의 땀내와 왕족의 올곧음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가 걸친 검은 갑옷은 예에 어긋남이 없이 완벽하게 갖춰 입은 모양새였지만 낡고 흠집이 가득해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태가 완연히 났다.
한때 벌꿀처럼 흐르는 황금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왕자의 금발은 사막의 태양에 시달려 사막의 모래와 같은 색으로 바래 있었다.
어깨 길이에서 대충 잘려 있는 것은 덤이었다. 나무뿌리를 쳐내고 밧줄을 자르는데 쓰던 야전용 단검으로 자른 머리다.
일선에서는 유행에 맞춰 이발할 여유가 없었다. 피부 역시 사정없는 햇볕 아래 온통 다갈색으로 그을려 솜털이 보송했던 에트루스칸 왕국의 어린 왕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나 높은 이마와 그 아래로 솟은 단정한 콧날, 꾹 다문 일자 입술에선 숨길 수 없는 과거의 기품이 배어 나왔다.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몸가짐 역시 버릴 수 없는 유년 시절의 흔적이었다.
“건네줘.”
엘코 경은 얌전히 국왕의 전령이 가져온 쪽지를 왕자에게 건넸다.
알폰소의 탑 같은 거구와 비틀리고 작아진 엘코 경의 실루엣이 교차했다.
남들보다 1.5배는 큰 덩치의 사령관, 알폰소는 가만히 있을 때도 위압감을 주었다.
그런데 왕의 전갈을 읽은 그의 표정은 조용히 일그러졌다. 주변의 분위기 역시, 일거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