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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75화 (275/733)

<제275화> 달라진 알폰소 왕자

알폰소 왕자에게서 느껴지는 조용한 분노에 베르나르디노 경, 엘코 경을 위시한 기사들은 아무도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

행군 대열을 감시하다 뒤쪽에서 뒤늦게 나타난 만프레디 경이 짐짓 가볍게 묻지 않았다면 알폰소가 직접 알려주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내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저하, 우리의 친애하는 국왕 폐하께선 뭐라십니까?”

알폰소는 왕의 쪽지를 디노 경에게 건넸다. 비웃음 반, 분노 반의 긴 호선을 입가에 건 채였다.

기사들이 쪽지를 읽으려 모여든 사이, 왕자는 천천히 말했다.

“산 카를로 성벽 안에 들어오는 걸 불허하시겠다는군.”

“예에?”

기사들은 왕자의 고지를 경악과 분노로 받았다.

“아니, 폐하께선 정녕 너무하십니다!”

“거의 5년 만에 돌아오는 하나뿐인 후계자를 이렇게 취급하시다니요!”

“우리가 지금 무슨 여행이라도 갔다가 돌아오는 겁니까? 전쟁터, 성전, 사지에서 에트루스칸 왕국의 이름을 드높이고 승장으로 귀환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러셔요?”

알폰소는 묵묵부답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의 말 안에 정답이 있었다.

하나뿐인 후계자니까, 그리고 동시에 성전에서 승리한 장수니까 일어나는 일이었다.

흥분이 지나간 후 디노 경이 물었다.

“저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레오 3세의 요구는 정확히는 다음과 같았다.

왕자의 수하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한 채 산 카를로 성벽 외곽에서 대기할 것, 왕자 본인 역시 모든 무장을 해제한 채 단신으로 팔라지오 카를로로 들어와 국왕을 예방(禮訪)할 것.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우린 이대로 진군한다.”

왕자가 고른 단어는 공교롭게도 행군(行軍)이 아닌 진군(進軍)이었다.

디노 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다음에는요?”

“산 카를로 성벽 바로 바깥에서 야영한다.”

국왕에게 보내는 항의의 표시다. 기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번에는 살림을 총괄하는 엘코 경이 물었다.

“한 이삼일 버틸 정도로 대충 막사를 치면 될까요?”

“아니.”

왕자는 평이한,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딱 화살 사정거리만 벗어난 자리에 숙영지를 짓는다.”

기사들의 동공이 격동했다. 잘 훈련된 군대는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 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선 숙영지부터 지었다.

이건 산 카를로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호언장담이다. 알폰소는 거침없이 말했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굴러먹던 인간들이라.”

그는 씩 웃었다.

“멍청한 군인들은 그저 제일 익숙한 방법으로 행동할 뿐 아닌가.”

알폰소의 표정에서는 자유의 향기가 났다. 자유란 자신감, 결국에는 힘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호사다.

* * *

왕자의 기사단은 산 카를로 성벽 바로 바깥에 뚝딱 정식 숙영지를 지었다.

천한 공병의 일을 기사들이 자기 손으로 하다니, 이제 전쟁기술자보다는 명예직에 더 가까워진 중앙대륙의 기사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야전에서 구른 역전의 용사들은 개의치 않았다. 전투도, 야영도, 보급도 다 전쟁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잘.

상상하지 못할만할 일은 또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왕국의 정통 후계자와 높으신 기사 나리들을 보게 된 상황은 일반 백성들로서는 꿈도 꿔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평생 단 한 번 일어날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제님께 공양하고 천신께 기도드리는 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집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제일 좋은 먹을거리를 골라 왕자의 숙영지에 바쳤다.

- “예사크를 구원하신 왕자님께 성의를 표시하러 왔습니다.”

- “에트루스칸의 성군이 되어 주세요!”

- “저희 가족 모두가 다 잘 되고 지은 죄가 씻겨나가길⋯⋯.”

잘 구운 빵, 갓 따온 체리며 멀베리, 통통한 돼지까지, 군대에 보내는 보급이라기보다는 천신님의 제단에 올릴 공양물 같은 선물들이 알폰소 왕자의 야영지에 쏟아져 들어왔다.

적통 왕자에게 직통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기껍게 여긴 것은 일반 백성뿐만이 아니었다.

- “알폰소 저하께서 산 카를로 성벽 앞에 계시다고?”

- “여보, 얼른! 뭐라도 꺼내서 보내요! 우리 같은 하급 귀족이 언제 왕자님께 얼굴도장을 찍겠어요?”

- “큰애한테 새 옷이라도 입혀서 뭐라도 들려 보낼까요?”

- “떼끼! 괜한 짓 하려다가 간신히 굴러들어온 기회마저 놓치지 마.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아니, 뇌⋯⋯ 선물 고르러는 내가 직접 간다.”

귀족들 역시 선물을 들고 하나둘씩 알폰소 왕자의 야영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도권의, 낮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보다는 좀 더 세련되게, 종교적 상징을 담은 귀금속이라던가 기타 기억에 남을만한 나름 값비싼 물건을 바쳤다.

- “아, 저하께서는 바쁘시다고⋯⋯.”

왕자를 직접 알현할 기대를 가지고 방문한 숙영지였지만 왕자를 만날 수는 없었다.

알폰소는 더 이상 후작부인의 살롱 따위에서 사람에 휩싸여 마음대로 운신도 못 하던 어린 왕자가 아니었다.

미안해서, 고마워서 용건이 없는 사람에게 자기 시간을 쪼개어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값비싼 시간이기도 했다.

당연한 귀결이었기에 하급 귀족들도 순순히 수긍했다. 하지만 희망조차 버렸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 “왕자님은 언제까지 여기에 계실 예정이십니까⋯⋯?”

- “왜 산 카를로로 바로 입성하지 않으시고⋯⋯.”

왕자를 알현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파악하려, 혹은 다음 기회를 노리려 알폰소 왕자가 숙영지를 짓고 틀어박혀 있는 이유를 물었다.

“저하, 뭐라고 답할까요?”

“적당히 둘러대.”

알폰소는 질문하는 기사들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대장의 의중은 명백했다. ‘너희들이 알아서 적당히 처리해.’

결국 베르나르디노, 만프레디, 엘코 경 셋이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짜내야 하게 되었다. 먼저 아이디어를 낸 것은 엘코 경이었다.

“⋯⋯일단은 그거 어떻습니까. 조만간 성지순례를 돌보시는 성 제오르지오의 축일 아닙니까.”

“성 제오르지오는 군인들의 수호성인이시기도 하지.”

“그 날짜에 맞춰서 산 카를로에 입성하려고 기다리는 거라고 둘러대는 건 어떻습니까?”

그 의견에 만프레디 경이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엘코. 그 날짜까지 우리가 산 카를로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성 제오르지오의 축일이 지났는데도 우리가 여전히 숙영지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수상하게 보이기는 하겠군.”

디노 경까지 우려를 표했다. 그러자 엘코 경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왕자님의 의중을 한번 헤아려 보시지요.”

디노 경과 만프레디 경은 엘코 경에게 평대를 하고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만프레디 경과 또래로 지냈던 엘코 경은 두 명 모두에게 존대했다.

검을 놓게 된 이후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엘코 경이 취하게 된 태도였다.

하지만 존대와 달리, 저 둘을 상대로 알폰소의 의중을 운운하는 엘코 경의 얼굴에는 묘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그분께서 국왕 폐하가 무슨 생각을 하실지 염려하셨다면 애초에 산 카를로 성벽 코앞에 야영지를 지으셨겠습니까?”

“⋯⋯.”

“게다가, 뒷수습이 걱정되셨다면 둘러댈 핑계를 저희더러 알아서 하라고 하시진 않으셨을 겁니다. 직접 결정하고 명령하셨겠지요.”

“자네가 뭐라고 이걸 마음대로⋯⋯!”

디노 경이 만프레디 경을 제지했다. 만프레디는 다 좋았지만 너무 직설적인게 흠이었다. 디노 경은 타협안을 냈다.

“저하께 이대로 진행해도 될지 확인을 받고 가세. 왕자님께서 괜찮다고 하시면 내 엘코 경의 의견대로 하겠네.”

엘코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바로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엘코 경은 알폰소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나왔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승리에 도취된 얼굴이다.

“그대로 하시랍니다.”

만프레디 경은 이를 악물었다. 디노 경이 만프레디의 등을 가볍게 톡톡 쳐 그를 만류했다.

“그래. 주변에는 우리가 성 제오르지오의 축복을 받기 위해 성인의 축일까지 기다리는 걸로 해 두지.”

그래도 안심이 안 됐던 디노 경은 재차 확인했다.

“자네도 알았지, 만프레디 경?”

“⋯⋯알겠습니다. 디노 경.”

* * *

아리아드네는 며칠 전 받았던 ‘A’의 편지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알폰소의 편지. 항상 그가 사용하던 푸른 잉크로 쓴 편지. 항상 꾹꾹 눌러쓰던 알폰소의 필체와는 다르게 필압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급하게 썼을 수도 있고, 혹은 분노로 점철되어 평소의 필체가 나오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편지의 내용을 감안하면 분노 쪽이 더 합리적인 해석이었다.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 편지를 다시 펴서 읽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에 처했다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양에게.

그간 격조하였으나 침묵은 으레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끝까지 입을 다물까 하다가 내가 귀국하게 된 지금, 우리가 마주치기 전에 관계를 확실히 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내키지 않는 펜을 듭니다.

나는 사지에서 귀하의 연애와 약혼 소식을 들었습니다. 배신감에 몸을 떨며 최전방의 막사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내 심정을 그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요.

하필이면 나의 이복형과, 하필이면 그 시점에. 천신님을 저버린 이교도보다 더한 배신을 저지른 사람이 신실하기로 유명한 빈자들의 성녀, 아리아드네 데 마레라니.

불운하게도 귀하의 약혼은 행복한 결실을 맺지 못하셨다고 들었소만 약혼 기간 동안 즐거우셨고 그 약혼이 그대에게 남긴 작위도 있으니 결론적으로는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려야겠군.

그대의 약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작위는 대저 그대의 오라비 것이 아니었겠소?

이제 백작이 되셔서 사교계 등지에서 마주칠 수도 있을 법한데, 쓸데없는 희망 가지지 마시라고 미리 알려드리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현숙한 아내가 있습니다.

내가 전장을 누빌 때 누구와 달리 처음부터 나를 믿어주었고, 위험에 처했을 때 스스로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끝까지 신의를 지킨 여자요.

라리에사 드 발로아는 내가 갈리코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자기 목숨을 걸고 나를 탈출시켰다오.

시간이 지나 보니 그게 얼마나 큰 헌신인지 깨달았소이다.

이득과 상관없이 타인을 위해 모든 걸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난 이걸 전쟁터에서 몸소, 그리고 당신을 보며 알게 되었소.

귀하와의 일로 내 성실한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산 카를로에서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하는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오.

이 이름을 쓰는 것도 오늘로써 마지막인, A.」

아리아드네는 결국 편지를 꼭꼭 접어서 책상 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거였다.

잘못에 대한 벌이라. 했던 일 만큼만의 벌을 받는 거라면 아리아드네는 되려 달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도 않은 일로 인한 벌, 그리고 행하기는 했으되 책임지기는 억울한 일에 대한 벌을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

그녀는 장갑을 벗어 왼손의 붉은 반점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 년간 여기에도 어느 정도 적응을 한 상태였다. 짓찧어서 생긴 흉터는 많이 연해졌다. 붉은 반점은 여전했지만.

알폰소의 편지를 보고 자신에게 붉은 점이 늘었는지 새삼 살펴보았지만, 너무 많아서 못 찾는 것인지 전과 똑같아 보였다.

죗값을 아픈 마음으로 갚고 있기 때문에 왼손은 반응하지 않는 것일까.

‘그래. 다 옳게 된 거야.’

이런 손으로는 어차피 결혼이나 연애는 꿈도 꿀 수 없다.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뿐이야.’

머리로는 모두 납득할 수 있었다. 머리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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