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미래 왕의 귀환
주둔해 있는 왕자의 야영지에 찾아오는 자들은 점점 더 거물급으로 변해갔다.
엉덩이가 무거운 자들은 용건이 없으면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거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자들 중 가장 선한 속내로 찾아온 사람은 마르케즈 백작이었다.
그는 야음을 틈타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왕자의 숙영지를 찾았다.
“저하!”
“마르케즈!”
알폰소 왕자는 마르케즈 백작을 힘 있는 포옹으로 맞이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 안에 담긴 신뢰는 여전히 단단했다.
마르케즈 백작은 지난 몇 년 새 세월의 무게를 정통으로 맞았다.
30대 후반 내지 40대 초반으로 보이던 외모는 이제 누가 봐도 피로에 찌든 중년인이었다.
“고생이 많았겠어.”
“왕자님만 하겠습니까.”
마르케즈 백작은 반가움과는 별개로 현재 정세에 대한 말은 최대한 아꼈다.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은 당연했고, 왕자가 왕의 재목이 되었다면 스스로 전달 루트를 골라 들을 것이다.
들을 방도는 많았다. 지난 3년간 산 카를로 궁정은 누가 봐도 엉망이었다.
레오 3세는 날이 갈수록 창의적으로 대귀족들을 괴롭혔다.
몬테펠트로 노후작처럼 국왕에 대한 충성맹세를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대영주들마저 실망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수도를 기반으로 해 대영지를 기반으로 한 구 귀족과 접점이 크게 없는 발데사르 후작을 제외한 나머지 둘, 외치(外治)의 마르케즈 백작과 집행(執行)의 콘타리니 백작은 머리가 다 빠질 지경이었다.
왕권에 협력하는 입장인데 자기들의 백그라운드인 대귀족들은 국왕을 극도로 싫어했다.
국왕의 일을 수행하는 저 둘이 귀족 계급의 배신자라는 이야기까지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콘타리니 백작도 건강이 좋지 않고⋯⋯. 함께하던 많은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없거나 변했지요.”
“⋯⋯창검만 없지 전쟁터였군.”
“궁정은 언제나 그렇지요.”
어린 알폰소 왕자는 모르던 세계였다. 그러나 이제는 온몸으로 들이받아야 하는 그런 세계.
“걱정해줘서 고맙네.”
알폰소는 자신이 있었다. 마르케즈 백작의 젖어 들어간 눈매에, 그는 단호한 어투로 답했다.
“나도 많이 변했다네.”
이곳은 그가 가장 잘 싸우는 종류의 전쟁터는 아니다.
하지만 하나를 잘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다 잘하는 법이다. 알폰소 왕자는 역전의 용사였다.
* * *
“뭐라고?!”
팔라지오 카를로, 왕의 알현실에서 레오 3세는 벌컥 화를 냈다. 요 며칠 그는 평소보다 유난히 알현실에 있는 옥좌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었다.
왕의 집무실에서 간단히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굳이 알현실로 불러서 만났다.
자신의 권위에 대한 불안감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났다.
“알폰소 녀석한테 뭐가 어쩌고 어째?! 다시 한번 말해봐!”
“⋯⋯백성들이 공양물에 월계수 잎으로 만든 왕관을 씌워 알폰소 왕자께 바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었지만, 지금은⋯⋯.”
월계수는 카를로 왕가의 상징물이고, 월계수 이파리로 만든 관은 고대 라탄 제국 시절부터 승전 장군에게 바치는 공물이었다.
자연히, 월계관은 일반 백성들이 큰돈을 들이지 않고 왕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하기에 딱 좋은 물건이었다.
왕가의 문장을 왕자가 받는 것과 승전 장군의 표식을 승전 장군이 받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월계관은 라탄 제국 말기부터 황제의 관으로 쓰였다.
이 모든 상징이 합쳐지면, 월계수 왕관을 알폰소 왕자가 받은 것은 레오 3세가 질겁하는 함의를 가지게 된다.
승리해서 돌아온 산 카를로의 왕.
“그건 황제에게 바치는 관이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참석할 권한은 없었지만 노쇠해져 가는 레오 3세를 보살핀다는 핑계로 나타난 루비나가 언성을 높였다.
“어찌 감히 국왕 폐하께서 계시는데 백성들이 그런 불온한 짓거리들을 한단 말입니까! 내버려 둬선 안 됩니다!”
“그걸 무슨 수로 그만두게 한단 말입니까?”
마르케즈 백작이 냉소적으로 답했다. 루비나가 이렇게 나오는 건 지나치게 잦은 일이라 이젠 표정 관리를 할 기력도 없었다.
“왕자 저하 주변에 근위대라도 둘러싸서 접근을 못 하게 할까요?”
두통이 기승을 부렸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대화를 오래 해야 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
“지금 가뜩이나 왕자 저하께서 왜 성에 들어오시지 않고 성 바깥에 계신지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습니다. 여기에다 대고 백성들이 왕자님께 접근조차 못 하게 하면 팔라지오 카를로가 자기 후계자를 박대한다는 이야기가 분명히 나올 겁니다.”
“왕자의 경호를 위해서라고 하면 되잖아요!”
왕자는 예사크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이다.
그가 이끄는 기사단은 아마 에트루스칸 왕국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정예군단일 것이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성을 비우고 전원 다 파견하는 게 아닌 이상 왕자 저하의 기사단은 우리 근위대 정도는 두 시간 안에 다 처치하고도 남을 겁니다.”
할 말이 없어진 루비나는 이를 갈았다.
기세는 좋지만 디테일이 부족한 그녀를 논리력으로 받쳐줄 콘타리니 백작은 오늘 이 자리에 없었다. 지난겨울에 얻은 기침병이 오래 가는 듯했다.
보다 못한 발데사르 후작이 제의했다.
“폐하. 왕자 저하를 성안으로 불러들이시지요.”
알폰소 왕자가 궁전 안에 들어오면 백성들이 왕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일은 자연스레 끊길 것이다. 레오 3세는 발칵 성을 냈다.
“본인이 안 들어오겠다고 하지 않나!”
“진입 조건이⋯⋯ 가혹하지 않습니까.”
국왕은 왕자 본인을 비롯해 모든 기사들이 산 카를로 성내에 진입할 때 무장을 해제한 채 들어오라고 했다.
“그건 포로한테나 하는 짓입니다.”
무장을 해제한 채 성으로 들어와야 한다면 기사들은 갑주 하나 없이 맨몸으로 대로를 지나야 한다. 수치다.
국왕이 그래도 뚱한 표정으로 설득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발데사르 후작은 재차 왕을 재촉했다.
“폐하, 지금은 아직 백성들뿐입니다. 그렇지만 대귀족들이 왕자님과 접촉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부자간의 은애(恩愛)가 정말로 상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한 레오 3세의 표정이 충격으로 굳었다.
이미 왕자를 알현하고 온 마르케즈 백작은 무표정을 가장하며 생각했다.
‘발데사르 후작은 영지를 가진 대귀족 출신이 아니라 소식이 느려. 거기에 이미 다녀온 게 나 혼자 뿐은 아니겠지.’
뒤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델피아노사 경이 조심스레 권했다.
“영명하신 국왕 폐하, 폐하께서 염려하시는 사태가 어떤 것인지는 저희도 통감하고 있습니다.”
델피아노사 경은 그러면서 루비나 공작부인을 쓱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눈길을 피했다.
체자레가 싼 똥을 알폰소가 뒤집어쓰는 상황이었지만 루비나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좋았다.
“산 카를로 성벽 안으로 들어올 때는 무장을 허하시되, 궁전 안으로 들어올 때 패검(佩劍)만 불허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발데사르 후작이 얼른 찬동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궁 안에서 검 없이 갑옷만 입고 있다고 해서 그걸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루비나 공작부인은 그것조차도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 분위기 자체가 궁의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소!”
“공작부인.”
애초에 알폰소 왕자의 입궁 조건이 누구 탓에 생겨난 것인지 대충 눈치를 챈 마르케즈 백작이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한심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군인에게 모욕을 주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언제나 중립인 발데사르 후작마저 마르케즈 백작의 편을 들었다.
“이번에는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실체적이지도 않은 위협을 상상하는 건 불필요한 낭비에 불과합니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콘타리니 백작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냈을 텐데⋯⋯!’
그녀는 호소하는 듯이 레오 3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국왕마저 그녀의 편은 아니었다.
대귀족들이 왕자에게 줄을 댈 거라는 이야기에 레오 3세는 다급해져 버린 것이다.
“⋯⋯궁 안에서 검을 차지 못 하는 것은 왕자도 포함이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면 들어오라고 해.”
왕은 덧붙였다.
“아참, 왕자궁 시종들은 전부 다 갈아 버려. 궁전 안 일이니까 발데사르 후작은 루비나가 직접 하도록 양보해 주게.”
이렇다는데야 말릴 도리가 없었다.
“예, 폐하.”
발데사르 후작은 고개를 숙였다.
* * *
성 제오르지오의 축일. 에트루스칸의 정통 후계자, 알폰소 왕자가 산 카를로로 돌아오는 날이다.
- “왕자 저하 만세-!”
- “왕자님! 건강하세요!”
- “에트루스칸 왕국의 이름을 드높인 알폰소 왕자 저하 만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몰려나와 알폰소 왕자와 검은 투구 기사단을 환영했다.
- “알폰소 카스코 네로!”
- “칼레드부흐 보여주세요!”
길거리에서 국가의 영광을 부르짖는 자들도 있었고, 알폰소 개인의 무훈을 찬양하는 자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인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중앙을 적해(赤海)의 기적처럼 가르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새카만 갑주를 걸치고 눈처럼 새하얀 말에 올라탄 알폰소 왕자였다.
알폰소 카스코 네로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마치 칠흑빛 첨탑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검은 갑옷은 봄의 가느다란 태양빛 따위는 모두 빨아들일 기세로 주변 공간을 잠식했다.
투구 사이로 조금 보이는 왕자의 금발만이 봄볕에 눈부시게 반짝였을 뿐이다.
그리고 시커먼 철의 바다로 뒤덮인 군마가 일사불란하게 그 뒤를 따랐다.
- “남자 중의 남자! 몸집 좀 봐!”
- “4 피에디 반(약 194센티)은 되어 보이지 않아요?”
- “설마, 그거보다는 작겠지. 체구가 떡 벌어지셔서 키보다 더 커 보이는 거 아니야?”
- “웬만한 사람은 한주먹거리겠어!”
알폰소의 위엄을 롤모델로 찬양하는 동성 집단이 있었던 반면에, 같은 구성요소를 조금 다른 핀트로 찬양하는 이성들도 있었다.
- “진짜 멋있다⋯⋯. 원래 왕자님 분위기가 저랬나?”
- “우리 언니가 결혼 전에 왕자님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는데, 곱상하게 잘생긴 얼굴이라고 그랬었어.”
- “이젠 완전 남자네! 결혼은 누구랑 하실까?”
- “너랑은 아니니 꿈 깨렴.”
- “야!”
압도적인 승전 장군, 성지를 수복한 에트루스칸의 자랑이자, 미래 왕의 귀환이었다.
- “왕자님께서 즉위하시면 진짜 멋있겠다!”
- “모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는 왕이 이끄는 나라는 어디서도 얕보이지 않을 거요!”
- “강대국이 되는 거야!”
차기 왕, 유일한 적통 왕자, 황제위의 주인을 가린다는 성검 칼레드부흐의 소유자는 당당하게 앞만 보며 걸었다.
그의 등 뒤를 보며 찬양하는 것은 다른 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왕자를 기다리는 인파의 시작점에, 긴 장갑을 끼고 수수한 망토를 걸친 여인이 서 있었다.
“여기 서 있으면 마주칠 수 있을 거예요.”
라파엘이 말했다. 행렬을 구경하러 나온 라파엘과 아리아드네는 운이 좋게도 가장 좋은 자리를 잡았다.
팔라지오 카를로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옆을 선점한 것이다.
왕자라도 궁전에 들어갈 때는 걸어서 들어오라는 것이 국왕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알폰소는 여기에서 말에서 내려야 했다.
“말도 걸을 거리가 나오겠는데요?”
알폰소의 행렬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선두에 선 알폰소의 백마와는 고작 70여 피에디(약 30미터)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리아드네는 망토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썼다.
“돌아가요, 라파엘.”
“네? 지금요?”
아리아드네가 받은 편지의 내용을 몰랐다면 당연히 가질 만한 의문이었다. 그녀는 라파엘에게 차마 알폰소의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말하지 못했다.
자기 입으로 전달하기엔 지나치게 수치스러운 이야기였다. 틀린 말이 없어서 더더욱 그랬다.
“여기에서 마주치긴 좀 그래서 그래요? 사석에서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아리아드네는 왕자의 행렬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냥⋯⋯. 그냥 멀리서 한 번쯤은 내 눈으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그걸로 돼요? 만나봐야죠!”
이걸로 족해요. 이걸로 족해야 해요.
“⋯⋯전 돌아갈래요.”
아리아드네는 인파 속으로 숨어들기 위해 뒤로 빠졌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아리아드네를 놓치지 않기 위해 황급히 따라붙었다.
‘⋯⋯정말, 돌아왔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는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기쁨과, 슬픔과, 후회와, 미안함과, 원망의 눈물이었다.
‘건강해 보이네.’
걸어가는 와중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녀는 우는 모습을 주변에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라파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리? 울어요?”
눈을 크게 뜬 라파엘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숙이고 손사래를 치다가 알폰소 왕자 일행의 행렬에 다가가려는 덩치 큰 사람에게 밀려서 비틀거렸다.
“아리아드네!”
라파엘이 황급히 그녀를 팔로 감싸 넘어지려는 아리아드네를 구했다.
모자가 머리 뒤로 넘어갔고, 새빨개진 토끼 눈을 한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라파엘의 시야에 가감 없이 드러났다.
아리아드네 역시 지난 3년 사이에 많이 변했다. 키는 여자치고는 몹시 컸다. 4 피에디에서 1 디토 가량만 모자랐을 뿐이었다. (약 170㎝)
아몬드 형태의 진녹색 눈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깊이를 더했고 소녀 시절 톡 튀어나온 토끼 이빨과 도톰한 윗입술이 귀여웠던 코와 인중, 입술로 이어지는 라인은 높은 콧날과 볼륨 있는 입술로 성숙한 매력이 물씬 풍겼다.
그런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힌 건 삼 년 만에 처음이었다. 라파엘은 숨을 들이켰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워낙에 빡빡하게 들어차 있어 그럴 공간이 전혀 나지 않았다.
사실 아리아드네를 인파에 닿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만 해도 벅찰 정도의 밀도였다.
“거칠지만 참아요.”
무슨 일 있냐고 묻는 대신에, 라파엘은 자기 왼손 소매로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문대 닦아 주었다.
그는 스쿠올라 디 그레타에서 팔자에도 없는 선생 노릇을 하느라 요사이 투박한 면으로 된 겉옷만 입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다. 필경 그 편지가 문제였을 것이다. 라파엘은 고아한 미간을 찡그렸다.
아리아드네 본인이 알폰소를 만날 생각이 없다면 남이 대신 물어봐 주면 된다. 라파엘은 자신이 알폰소 본인에게 그 편지에 대해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 * *
검은 갑옷의 왕자, 카스코 네로 알폰소는 시종일관 앞만 보고 걸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백성들에게 따스한 웃음을 나누어주던 어린 왕자는 없었다.
알폰소는 지금 그의 행렬을 주시하는 눈이 많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국왕의 끄나풀들은 오늘 이 개선행진을 디토 단위로 해부하며 갖은 악랄한 선전선동을 추가해 레오 3세에게 고자질할 것이다.
알폰소 왕자가 웃으며 백성에게 손을 흔든다면 그것은 곧바로 인기에 영합해 부왕을 밀어내고 왕위를 노리는 야심가로 포장되어 은쟁반에 담긴 채 국왕의 나이프 앞으로 전달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파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앞만 보고 걸었다. 그의 시선이 옆으로 흐른 건 딱 한순간이었다.
팔라지오 카를로의 정문에 임박한 순간, 너무나도 익숙한 실루엣이 그의 눈에 띄었다.
후작 부인의 살롱에서 손님들 몇백여 명 사이에 섞여 있을 때도, 봄의 축제 무도회에서 천 명 가까운 귀족들이 고만고만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모두 똑같은 춤을 추고 있을 때에도, 미글리오 단위로 멀리 떨어진 성벽 위에 그녀 혼자 올라와 있을 때에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던 실루엣이었다.
‘⋯⋯잘 챙겨먹기로 약속했잖아.’
4년 만에 만난 그녀는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키가 훌쩍 컸고, 마지막에 봤을 때만큼이나 호리호리했다. 툭 치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정면을 봐야 하는 걸 알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갈색 망토를 걸친 여인이 모자를 눌러쓴 채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마치 그를 만나기 싫다는 듯이.
그리고 바로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빛이 부서질 정도로 반짝이는 은발을 가진 여리여리한 젊은 남자였다. 그는 황급히 달려가더니 여자를 뒤에서 안았다.
- “일동, 차렷!”
- “경례! (Saluto!)”
- “살루토!”
국왕 근위대의 의전이 시작됐다. 예식용 검을 부딪히며 그를 환영하는 소리가 귓전에서 어지러이 부서져 내렸다.
- “알폰소 카스코 네로!”
- “노스트로 프린시페 알폰소!” (우리의 왕자 알폰소!)
레오 3세가 들었다면 기겁했을 칭호들이 그의 근위대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걸 듣고 기꺼워해야 할 당사자는 전혀 다른 이유로 눈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작가의 말]
알폰소의 키는 190센티입니다. 군중은 알폰소의 키를 실제보다 더 크게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