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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77화 (277/733)

<제277화> 내 것인지 아닌지

팔라지오 카를로의 외부 정문으로부터 궁전의 실제 현관까지는 아주 멀었다. 보통은 마차를 타고 가는 거리다.

“저하, 긴히 고할 이야기가⋯⋯.”

선두에 선 알폰소의 바로 등 뒤에서 엘코 경이 속살거렸다. 저기압인 알폰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 대해 굳이 보고받을 자리도 아니었고, 보고받을 기분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엘코 경은 굴하지 않고 재차 말을 걸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제가 본 것이 있어서. 저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

왕자는 다종다양한 상황에서 침묵했다.

이는 긍정일 때도 있었고, 부정일 때도 있었고,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일 때도 있었다.

엘코 경은 왕자의 침묵이 그때그때 어떤 의미로 사용된 침묵인지 가장 잘 아는 자였다.

지금 알폰소의 침묵은 그가 대화하기 싫을 때 보이는 태도였지만, 엘코 경은 그 사이에서 타오르는 한 줄기 분노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직감을 믿고, 조금 더 밀어보기로 했다.

“저하께옵서도 보셨습니까?”

“⋯⋯무엇을?”

됐다.

엘코 경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분’이지요!”

알폰소의 눈썹이 굵게 꿈틀, 움직였다. 엘코 경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입을 놀렸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전 그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왜지?”

알폰소가 드디어 긴 침묵을 뚫고 대화에 참여했다. 엘코 경은 여기까지 왔으니 일이 다 술술 풀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부터 할 말은 남자라면 시성(諡聖)된 성인이라도 관뚜껑을 박차고 벌떡 일어설만한 종류의 음해였기 때문이다.

“본인도 낯이 있으면 왕자님을 뵈러 나오지 못할 거 아닙니까! 왕자님도 그분의 약혼과 열애 이야기 다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체자레와 아리아드네의 일은 소문이 파다했다.

왕의 조카인 피사노 공작이 약혼녀의 언니에게 찝쩍거리다가 파혼당한 일은 바다 건너 예사크에까지 소문이 났다.

그렇게 바다 건너까지 이야기가 흘러올 정도로 큰 사건이 아닌 경우에는 라리에사가 늘 살뜰하게 편지를 써서 알폰소 왕자에게 전해주었다.

아리아드네와 국왕과의 독대 이후 체자레가 피사노 공작위를 받고 왕가의 일원으로 정식으로 인정받은 일, 아리아드네가 이내 데 마레 백작 작위를 수여받고 피사노 공작 체자레와 약혼한 일, 그들이 사교계에서 무엇을 했고 체자레 공작이 제 약혼녀에게 끔찍하게 잘하며 선남선녀라고 칭송을 받는다는 이야기 등등은 죄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편지를 통해 알폰소 왕자에게 전해졌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전쟁터에서 바깥의 소식은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알폰소는 저도 모르게 라리에사의 편지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라리에사는 아리아드네에 대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마음 아픈 소식이라도 완전한 무지보다는 나았다.

알폰소는 라리에사의 악의가 가득 찬 서술 사이에서도 아리아드네의 진실된 마음이, 그녀의 현재 상태가 어떨지 조각조각 뽑아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수록 아리아드네는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봄의 축제’ 무도회에서 체자레 공작과 공개적인 장소에서 키스를 하고, 뒤의 사적인 장소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이야기는 알폰소가 제아무리 이해를 하려 해도 선해(善解)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는 그런 것들은 일단 다 묻어두기로 했다. 라리에사의 편지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의 편지는 아무리 먼저 기별을 보내고, 또 보내고, 밤을 새우며 기다려도 오지 않았으므로 알폰소는 그저 그녀를 실제로 만날 수 있을 날까지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왕자님, 여기서 흔들리시면 호구입니다, 호구!”

엘코 경은 판단을 보류한 알폰소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했다.

“왕자님께서 떠나시자마자 보란 듯이 체자레 백작과 놀아났죠, 국왕 폐하께 가서 무릎 꿇고 고하더니 바로 체자레 백작이 공작으로 승진했죠. 왕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양반 그런 꾀주머니가 없는 거! 필시 ‘그 여자’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일 겁니다!”

알폰소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체자레나 그의 모친 루비나는 그런 식의 협잡에 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낭(智囊)이 따로 받쳐 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몫도 알뜰하게 챙겨 갔지요. 자기 개인 앞으로 백작위를 수여받더니만 바로 체자레 공작과 약혼까지 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공작부인 자리가 얼마나 탐이 났으면!”

알폰소는 엘코의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 내용은 알폰소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라리에사가 친절하게 풀어서 편지에 가득 담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국과 별다른 끈이 없는 엘코 경은 무슨 수로 이런 산 카를로 사교계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엘코.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지?”

아리아드네를 왕자 곁에서 확실하게 치워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던 엘코 경은 혀끝을 깨물었다.

“왕자님은 모르셨겠지만, 십자군의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던 이야기입니다.”

엘코 경은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오늘 같이 나온 발데사르놈도 보셨어요?!”

알폰소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건 알폰소가 직접 눈으로 본 일이다. 라리에사의 음해 따위가 아니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분명히, 그의 여인을, 아니, 그의 여인이었던 여자를 지극히 친밀하게 에스코트해서 인파를 빠져나갔다.

엘코 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폰소는 자신의 친우를 믿었다. 체자레의 배신이야 그럴 수 있었다.

그 둘은 애초에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라파엘은 알폰소가 믿고 아리아드네를 맡겼던 그의 죽마고우였다. 엘코 경은 그 부분을 살살 건드리기로 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아닙니까! 왕자님, 아까 그놈이 그분 껴안다시피 하고 가는 거 보셨어요?”

왕자의 턱에 근육이 솟았다. 필시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리라.

“역시, 왕자님께서 발데사르 놈에게 뒤를 부탁하고 가셨던 게 맞았군요!”

이제는 분노한 주인을 살살 달래드릴 시간이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왕자님은 당시 그러실 수밖에 없었어요. 믿을만한 사람이 수도에 그놈밖에 없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설탕을 친 다음에는 다시 한번, 독 한 방울.

“믿음을 배신하고 친우의 애인에게 손을 댄 발데사르 놈이 죽일 놈이지요!”

“손을 댔다고?”

“그럼요! 그 여자 옷 속에 그놈 손이 들어간 거 못 보셨습니까?”

뚝.

뭔가 부러지는 느낌이었다.

전쟁터에서도 소중히 간직했던 일말의 희망. 순정. 믿음. 애정. 사랑.

타오르는 분노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엘코 경은 존경하는 주군, 자신의 목숨줄을 쥔 알폰소 왕자를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에 희열을 느꼈다.

아무렇게나 던진 거짓말에 알폰소 왕자가 꼭두각시처럼 춤을 춘다.

지금 이 순간, 엘코 경은 망가진 사지를 초월하는 전능감을 느꼈다.

“산 카를로에서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데 마레 여백작이 발데사르 소후작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요!”

엘코는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작위가 성에 안 차서 약혼은 여자 쪽에서 하지 말자고 미루고 있어서 이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백작이고 전 약혼자가 공작인데, 아직 후작위를 물려받지도 못한 어린 소후작 따위 관심 없다 이거죠!”

그런 소문 따위 어디에도 없었지만 알게 뭔가. 오늘부터 퍼트리면 된다. 그런 종류의 공작은 저쪽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정말이지 사악한 여자입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정말이지 사악한 여자다. 남자들을 홀려서 패가망신의 구렁텅이로 쳐넣는 마귀다.

엘코 경은 알폰소에 대한 충심으로 알폰소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었다.

엘코 자신이 눈과 팔을 잃은 것처럼, 알폰소 왕자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의 눈 앞에 펼쳐진 빛나는 미래를 모두 잃을 것이다.

왕자는 완전무결해야 했다. 그에게는 미래를 도와줄, 지체 높은 부인과 강력한 처가가 어울린다.

“왕자님과 정을 나누었으면서 왕자님께서 처지가 나빠지시자마자 체자레 공을 꾀어서 자기 약혼자로 만들었죠. 체자레공과 무산되자 바로 라파엘 데 발데사르로 갈아탔지요!”

그 여자는 안 돼요. 왕자님께 어울리지 않아요.

“얼마나 도덕심이 땅을 쳐야 자기 정인(情人)의 이복형과 친우를 순차적으로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아주 그냥 궁둥이를 어디에 흔들지에 대해 수치심이 없는 여자입니다.”

‘어디 길거리 창관에나 어울릴 탕부입니다!’

알폰소는 침묵했고, 엘코는 점점 더 자기의 레토릭에 스스로 도취되어 버렸다.

“왕자님께서 갈리코로 끌려가시게 된 일의 시초도 갈리코 왕국의 미레이유 공작이 그 여자에게 못된 마음을 먹어서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 사건은 엘코가 갈리코 왕국으로 끌려가게 되었던 사건이었지 알폰소가 갈리코 왕국으로 끌려가게 되었던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코는 이미 사실관계를 무시하고 알폰소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미레이유 공작도 미치지 않고서야 타국에 외교사절로 와서 다른 나라 추기경의 딸을 범할 생각을 했겠습니까?”

엘코 경은 신이 나서 자기가 선을 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필경 그 여자가 미레이유 공작에게도 먼저 꼬리를 쳐⋯⋯!”

“엘코!”

알폰소가 격앙된 목소리로 엘코 경을 제지했다. 엘코 경은 깜짝 놀라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미 팔라지오 카를로 궁전의 현관에 도달해 있었다.

약간 뒤에서 따라오던 베르나르디노 경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자, 자! 벌써 도착해 버렸네요!”

디노 경은 아까부터 알폰소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대화의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어 끼어들 타이밍을 계속 재던 차였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고요. 좋은 날 아닙니까!”

옆에서 함께 마음을 졸이던 만프레디 경 역시 짐짓 쾌활하게 덧붙였다.

“드디어 집이다!”

그 말에, 알폰소 왕자와 엘코 경, 디노 경까지 모두 장대하고 아름다운 아치형 현관을 올려다보았다.

팔라지오 카를로.

알폰소의 집이었다. 그의 친혈육인 아버지가 기다리는.

* * *

4년 만에 만나는 부자간의 상봉은 일견 훈훈했다.

“자랑스러운 내 아들 알폰소!”

레오 3세는 왕좌에서 내려와 양손을 벌린 채 그의 장성한 후계자를 맞이했다.

“장하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아들이여.”

주변에서 왕의 내각과 나머지 궁정 귀족들이 박수를 쳤다.

알폰소 왕자는 어렸을 때처럼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대신, 무릎을 꿇고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다.

“나의 아버지, 에트루스칸 만백성의 아버지이신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오냐.”

레오 3세는 굳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아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고 왕자의 기사 중 궁정 귀족 출신이 아닌 자들, 그러니까 웃으며 등에 칼을 찌르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은 굳어진 표정을 관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는 환대로 보였지만 기실 환대가 아니었다. 레오 3세가 알폰소 왕자를 맞이한 곳은 태양의 홀이 아닌 평소에 사용하는 알현실이었다.

알현실의 규모 탓에 왕자의 귀환을 환영하는 자들이 많이 모일 수도 없었다.

국왕의 내각조차도 인원이 모두 모이지 않았다.

콘타리니 백작은 아프니까 그렇다고 쳐도, 궁정 귀족들 역시 듬성듬성 이가 빠진 인원 구성이었다.

“오는 길은 어땠느냐? 네 부대가 대접받는 음식은 입에 맞겠지?”

“팔라지오 카를로의 대접이라면 누구에게나 과분한 성찬 아니겠습니까.”

검은 투구 기사단은 서너 갈래로 모여 왕궁의 일 층에서 식음료를 대접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융숭한 대접 같으나 그들이 뭉쳐서 위세를 부릴 수 없게 사전 차단한 것이다.

국왕의 알현실까지 알폰소 왕자를 따라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왕자의 기사들 십여 명뿐이었다.

국왕은 틀에 박힌 공치사를 몇 가지 더했고, 알폰소 왕자는 석고상을 연상케 하는 교과서적인 미소를 지은 채 아버지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레오 3세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에 툭, 문제 발언을 던졌다.

“그래서, 성검 ‘칼레드부흐’는 앞에다 풀어놓고 왔느냐?”

알폰소 왕자는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팔라지오 카를로에 입장하기 직전에 모든 무기를 국왕의 사람들에게 내주었다.

“시종을 시키면 볼 수 있어?”

성검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레오 3세의 언행에 알폰소의 가면에도 드디어 약간의 균열이 났다. 그는 딱딱하게 답했다.

“마차에 실어 제 궁으로 보냈습니다.”

아버지, 국왕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감에 그는 조소했지만 능숙하게 감정을 가렸다.

순진했던 어린 알폰소가 왕궁에서 배웠던 몇 안 되는 기예다. 그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덧붙였다.

“검이라기보단 골동품이라, 차고 다닐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레오 3세는 끈질겼다.

“언제 나에게 바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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