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새로운 시작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베르나르디노 경은 자기가 반문할 뻔했다.
‘뭐라굽쇼, 폐하?’
그가 움찔, 하는 것을 느낀 만프레디 경이 그의 발 뒤축을 차지 않았다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냈을지도 모르겠다.
디노 경에게는 다행히도 그의 주군은 평온하게 이 위기를 넘어갔다.
“‘칼레드부흐’가 누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성검 칼레드부흐는 그라나타 수도원에서 수복되었다. 분명 직접 부대를 끌고 내려가 그 검을 손에 넣은 것은 당시 선봉장이었던 알폰소였다.
다만 제3차 십자군은 모든 전리품을 총사령관에게 바친 후 이를 재분배하는 절차를 거쳤다.
성검 칼레드부흐 역시, 율덴부르크 대공에게 바쳐진 이후에 그의 결정에 따라 알폰소 왕자에게 돌아오던가, 아니면 다른 주인을 찾아야 했다.
“총사령관께 바쳤어야 하는 물건인데,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율덴부르크 대공은 그라나타 수도원 전투에서 낙마해 고관절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 이후로 알폰소는 선봉장, 중군장, 총사령관 대리로 순차적으로 승진하며 계속 전방을 뛰어다녔고 율덴부르크 대공은 본진을 지키다가 상태가 더 나빠지자 후방 항구도시로 빠져 그곳에서 요양했다.
그리고 예사크의 승리가 알려지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국으로 떠나는 첫 배에 올랐다.
예사크의 뒷수습을 모두 마무리 짓고서야 중앙대륙 행 배에 탑승한 알폰소 왕자는 그라나타 수도원 전투 이후로 율덴부르크 대공을 단 한 번도 직접 대면하지 못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총사령관이 전리품 배분을 아직도 안 했다고?”
다른 전리품들은 후방으로 보내 총사령관이 확인을 한 뒤에 모두 배분했다.
문제는 성검 칼레드부흐는 알폰소 왕자 외의 그 어떤 사람도 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알폰소 왕자는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대신 짧게 답했다.
“어쩌다 보니.”
대공이 성검 칼레드부흐를 보았다면 높은 확률로 알폰소 왕자에게 소유권을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은 아직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알폰소 왕자는 얼굴 근육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 레오 3세에게 답했다.
“제게 처분권이 생기는 날 말씀드리겠나이다.”
아버지에 대한 실망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면 아비를 농락하는 즐거움을 내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흐르는 강과도 같은 표정이었다.
아들의 평정심과는 반대로, 율덴부르크 대공이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알폰소 왕자에게 소유권을 넘겨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레오 3세는 대놓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는 총사령관이 자기가 수거한 것도 아닌 성유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불평불만을 한참이나 토로하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맞다. 율덴부르크 대공에게 어린 딸이 있었지?”
알폰소 왕자의 뒤에서 부복하고 있던 베르나르디노 경은 이 소리를 듣자마자 왕이 무슨 속셈으로 율덴부르크 대공의 딸 이야기를 꺼내는지 바로 깨달았다.
‘갈리코에서 목숨 걸고 탈출했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레오 3세는 율덴부르크 대공의 딸과 알폰소 왕자를 결혼시켜 결혼 선물 내지는 대공녀의 지참금으로 성검 칼레드부흐를 받아올 계산을 굴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베르나르디노 경은 내적 비명을 질렀다.
‘그 대공녀 지금 세 살이거든요!’
차마 국왕 앞에서 허락 없이 발언할 수가 없었던 베르나르디노 경의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준 것은 발데사르 후작이었다.
“국왕 폐하, 율덴부르크 대공의 여식은 올해로 겨우 세 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단순히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결혼은 사람들 보기에 안 좋다고 반대하는 법은 없다. 발데사르 후작도 그랬다.
“너무 어린 왕자비를 들이면 후계를 볼 때까지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그게 왜 문제지?”
레오 3세는 굵은 흰 눈썹을 추켜세우며 발데사르 후작의 말을 끊었다. 발데사르 후작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함께 국왕의 말을 듣고 있던 마르케즈 백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알폰소 왕자는 이제 결혼적령기에 달한 하나뿐인 적통 왕자이자 유일한 직계 후계자다.
이런 경우에는 최대한 빠르게 왕세손을 낳아야 후계가 안정된다.
왕자 다음의 왕위계승자로 왕세손이 버티고 있으면 삼촌이나 먼 친척 같은 방계가 쓸데없이 왕자를 흔드는 시도를 감행할 유인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국왕 폐하께서는 알폰소 왕자님께 힘을 실어주실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으시는군.’
레오 3세는 발데사르 후작을 닥치게 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훌륭한 혈통을 가졌다면 나이 같은 게 뭐가 중요한가? 슈테른하임 공국의 대공가라면 뿌리 깊은 가문이니 알폰소의 혼인 상대로도 딱 맞는구먼.”
마르케즈 백작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슈테른하임 공국은 에트루스칸 왕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소국이다. 규모도 작았고 북쪽에 위치한 나머지 토지도 척박했다.
‘⋯⋯폐하께선 왕자 저하께 든든한 처가가 생기는 걸 경계하고 계셔. 제아무리 권력 앞에는 부모‧자식도 없다지만⋯⋯.’
마르케즈 백작의 딴생각은 레오 3세가 그를 지목해 말을 시킴으로써 끊겼다.
“어디 보자 마르케즈, 슈테른하임 공국에 혼담을 넣으려면 어디서부터 검토해야 하겠나?”
국왕의 즐거운 상상은 계속되었다.
“거 세 살밖에 안 됐다고 했으니 다른 혼담이 오가는지 여부는 안 알아봐도 될 것 같고⋯⋯.”
급습을 당한 마르케즈 백작은 황급하게 답을 찾았다.
“저, 검토를 시작하려면 에⋯⋯.”
어버버하는 백작을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알폰소 왕자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알폰소 왕자는 레오 3세의 희망사항을 단호하게 잘랐다.
“그 혼담은 성사되기 어려울 것으로 사료됩니다.”
“뭐라고?”
레오 3세의 눈썹이 재차 하늘로 날아갈 기세로 추켜올려졌다. 그는 아들이 감히 자신을 거슬렀다는 데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만난 첫날부터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 레오 3세는 나오려는 호통을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그 연유가 무엇이냐?”
“저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 * *
아침 일찍 눈을 뜬 아리아드네는 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정오가 가까워져 와서야 간신히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전혀 일을 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은 하기 싫을 때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이다.
오늘은 캄포 데 스페지아의 빈민촌에 학생을 모집하러 가는 날이었다.
“⋯⋯가 볼까.”
아리아드네는 산차가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주세페의 호위를 받으며 캄포 데 스페지아로 향했다.
캄포 데 스페지아 중앙의 광장에서는 스쿠올라 디 그레타의 학생 모집 설명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구휼원 식구들은 긴 나무 탁자 위에 천막을 치고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했고, 스쿠올라 디 그레타의 졸업반 학생들은 순서대로 발표를 맡아 나무 연단 위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참 잘 하네요.”
산차가 속삭였다.
사람들도 순조롭게 모였고 발표에 대한 호응도도 좋았다.
스쿠올라 디 그레타 1기 학생들은 구휼원에 있는 아이 중에서도 향상심이 있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뭘 시켜도 이를 악물고 잘 해냈다.
“그렇지?”
“너무 뿌듯해요.”
산차의 만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얼굴을 보고는 덩달아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저 잠시만 연단 뒤쪽에 다녀올게요. 다음 순서는 일리아나 차례인데, 일리아나는 긴장을 많이 해요.”
“손잡아주고 와.”
산차를 보내고 혼자가 된 아리아드네는 발표를 마저 관람했다.
지금 발표하는 1기 학생은 무슨 소리를 해야 자식들의 노동력이라도 팔아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싶을 가난한 부모들이 애들을 학교에 보낼지 귀신같이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기특함과 동시에 조금 슬펐다.
그녀는 10기, 11기, 12기 학생들이 입학할 때 즈음에는 아이들이 저런 걸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아이들이 좀 더 오래, 좀 더 구김살 없이 자랐으면.
“이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이, 이봐!”
- 툭툭!
긴 지팡이가 그녀의 발치를 툭툭 건드렸다.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불러도 대답이 없어!”
“네? 저를요?”
그녀를 지팡이로 건드린 사람은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여자 노인이었다.
‘무어인⋯⋯.’
무어인 중에서도 먼 동쪽에 산다는 사람이다. 피부는 통상적인 무어인보다 밝은, 엷은 갈색이었고 옷차림도 달랐다.
그녀는 원래는 새카맸을 머리의 절반 정도가 새치로 덮여 있어 나이를 잘 가늠하기 힘들었으나 왜인지 미끈한 피부나 반쯤은 검은 머리카락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이가 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는 날 처음 봤겠지만. 우린 초면이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가만히 무어인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미친 사람이나 그녀에게 끈을 대려는 사기꾼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하기엔 느끼지는 기운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자기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흥!”
노인은 크게 코웃음을 쳤다.
“누가 누굴 도와!”
그녀는 아리아드네의 앞 흙바닥에 지팡이로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렸다.
“세 밤이 지나면.”
그날은 그믐달이 뜨는 날이다.
“톨루도 언덕으로 와.”
아리아드네는 되물었다.
“툴루도 언덕이요? 몇 시쯤에⋯⋯?”
“그것도 말을 해줘야 알⋯⋯!”
발칵 화를 내려던 할머니는 갑자기 ‘아’, 라고 멈추더니 ‘그래, 이 아가씨는 모를 수도 있겠네’라고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진 다음에. 너희 시간으로는 저녁 아홉 시쯤 되려나?”
옆에 산차나 주세페가 있었으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날뛰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벌써부터 ‘우리 아가씨를 밤 열 시에 바깥으로 불러내다니!’라고 펄펄 뛰는 산차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어인 할머니는 한술 더 떴다.
“올 때는 혼자 와.”
그녀는 덧붙였다.
“사람 죽어 나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 * *
산 카를로 외곽, 검은 칠을 한 마차 한 대가 성기게 포장된 돌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 덜컹, 덜컹덜컹.
승차감은 최악이었지만 마차의 탑승객은 불평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마차에 탄 사람은 수녀들이 쓰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였다.
“어디쯤 왔나요?”
탑승객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영롱한, 예쁜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부는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 넘겨 버렸다.
여자는 마부의 불복종이 내심 못마땅했지만 기분 나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저런 사소한 것 따위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주변 경관을 보니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산 카를로 북문이로구나.”
그녀는 희열에 차 중얼거렸다.
마차는 북문에서 약간의 통행료를 내고, 북쪽 해자 위로 드리워진 도개교를 천천히 지났다.
여자는 검은 마차의 창문을 꼼꼼하게 가린 검은 암막 커튼을 살짝 들어 올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눈부신 봄의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20대 초중반인 여자의 신이 빚어 놓은 것 같은 이목구비를 쓸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아마빛 머리카락과, 보석 같은 자안에 비추는 햇빛에 두 눈을 깜박거렸다.
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바깥을 조금 더 잘 내다보고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끙.”
몸이 무거웠다. 그녀는 만삭인 배 위에 한쪽 손을 얹고 다른 쪽 손으로 의자를 짚어 간신히 원하는 대로 창가에 바싹 붙어 앉았다.
기억이 날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살아왔던 도시. 중앙대륙의 꽃, 산 카를로가 그녀 앞에 다시금 펼쳐져 있었다.
여자, 이사벨라는 입가에 희열에 찬 미소를 올린 채 혼잣말을 했다.
“내가 돌아왔다, 산 카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