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이사벨라의 아이 아빠
이사벨라를 태운 검은 마차가 들어선 곳은 데 마레 대저택도, 체자레의 빌라 소로토네도, 그렇다고 팔라지오 카를로도 아닌, 어느 귀족의 고택이었다.
그녀가 마차를 탄 채 외부 출입구를 통과해 본관 현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관찰한 바로는 이 저택은 오래되었지만 아주 잘 관리되어 있었다.
‘흠. 쓸만하네.’
그러나 내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고용인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만한 위치가 비어 있거나, 사람들이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서 검은 마차를 바라보며 귓속말을 하기도 했다.
그 귓속말의 내용은 십중팔구 적대적이리라. 이사벨라는 오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본관 정문에 도착한 그녀는 마부의 부축을 받으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마차에서 힘들게 내렸다.
이내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젊은 남자 한 명이 뛰어나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사벨라!”
이사벨라는 천사처럼 환하게 웃으며 남자를 맞이했다.
“오타비오!”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는 이사벨라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 안아 성큼성큼 저택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봐라! 뭣들 하느냐!”
젊은 오타비오의 치기 어린 목소리가 콘타리니 대저택을 쩌렁쩌렁 울렸다.
“백작 부인께서 오셨으니 어서 목욕물을 받아라!”
하녀 두어 명이 오타비오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나머지 하녀들은 못마땅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부엌 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사벨라는 곁눈짓으로 하녀들이 하는 양을 모두 보았지만 아무것도 못 본 척, 오타비오를 향해 꽃처럼 웃었다.
“아이 참, 여보도. 애 가졌을 때는 뜨거운 물에 목욕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에요.”
나이가 더 들은 이사벨라의 미모는 형용이 어려울 정도였다.
몇 년 전, 사교계를 호령했을 당시에는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았던 얼굴은 이제는 섬세한 뼈대가 고상하게 드러나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신이 손수 빚은 피조물 같았다.
귀엽기만 했던 코도 콧대가 두드러져 성숙미를 뽐냈고, 봄날의 장미 봉오리 같던 그녀의 눈매는 애처롭게 깊어져 누구도 거기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오타비오는 그런 이사벨라의 간드러진 애교에 입이 헤벌쭉 벌어져 웃었다.
“먼 길 힘들게 왔는데 적신 수건으로 몸만 닦을 수는 없잖아? 난 아이보다 당신이 우선이라고!”
오타비오는 큰 소리를 내며 이사벨라의 입술에 입 맞췄다.
- 쪽!
“어떻게 얻은 내 아내인데, 자식은 또 낳으면 돼! 하지만 아내는 하나뿐이야.”
“오타비오도 참.”
이사벨라는 입가를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엄청나게 힘들었다. 하지만 산탄젤로 수녀원 탈출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던 미션을 성공했다.
이사벨라는 그녀가 거둬줄 새 가족이 생겨 수녀원을 떠난다고 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라고 자신을 노려보던 수녀원장의 시선과 이사벨라의 재주에 경탄을 금치 못하던 수녀원에 갇힌 또래 여자들의 부러움을 기억했다.
이사벨라는 자신했다. 산탄젤로 수녀원을 탈출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더럽게 힘들었지.’
오타비오의 품에 안긴 채, 이사벨라의 눈은 과거를 되뇌었다.
* * *
“나 집에서 숨도 못 쉬겠다니까.”
이폴리토는 이마를 짚은 채 웅얼거렸다.
“아리아드네 그 계집애 보통이 아니야.”
이폴리토는 자기가 집안에서 얼마나 박대를 당하고 있는지, 쓸 수 있는 용돈은 얼마나 적은지 등의 하소연을 끊임없이 하다가 끝내는 아리아드네가 일부러 이폴리토의 식사에 그가 못 먹는 피망과 당근을 넣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헛소리마저 해 댔다.
이사벨라는 어이가 없었다.
‘곰팡이 핀 빵에 순무 스튜 먹는 사람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는 저⋯⋯!’
“나만 하루 묵은 빵을 올려주는 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이사벨라는 진짜 너무한 건 갇혀 있는 여동생 앞에서 바깥세상이 얼마나 자기한테 가혹한지를 줄줄 읊는 네놈 새끼라고 일갈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이폴리토가 놀라서 달아나면 이사벨라는 정말로 산탄젤로 수녀원에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이 고립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곳은 끔찍한 곳이었다. 이사벨라는 간신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짜 너무했네, 아리아드네 계집애.”
하지만 이폴리토는 정도를 몰랐다.
“걜 어떻게 해버릴 방법이 없을까?”
그는 이사벨라를 재촉했다.
“넌 그런 쪽으로 머리가 좋잖아. 네가 한번 생각해 봐.”
이폴리토는 한술 더 떠서 투덜거렸다.
“내가 아리아드네 년 쫓아낼 궁리 좀 해보라고 얘기한 지가 몇 달째인데 아직도 방법 하나 못 찾고 있냐?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이사벨라는 이 대목에 있어서는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뭐 어떻게 해볼 거리가 있어야 하건 말건 하지! 오빠, 내가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 데려오라고 몇 번을 말했어!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야!”
“아니 그게⋯⋯.”
이폴리토가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계속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이폴리토는 아리아드네에게 용돈을 삭감당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폴리토는 친구들을 돈으로 사는 편이었다.
이폴리토가 너그럽게 술이며 유흥을 쏘지 못하게 되자 친구들 중 질이 안 좋은 놈들은 이폴리토를 피했고, 이폴리토는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남은 친구들 중 이폴리토에게 얻어먹을 필요가 없었던 녀석들도 모임에 이폴리토를 부르지 않았다.
그가 열등감에 급발진하거나 실언하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다음번엔 꼭 데려올게. 안 그래도 네가 가져오라는 건 가져왔어.”
이폴리토는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꼬깃꼬깃하게 여기저기 움푹움푹 들어간 놋쇠 통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이폴리토는 놋쇠 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놋쇠 통의 정체는 다름 아닌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가 언젠가의 생일선물로 주었던 홍차, ‘사랑의 묘약’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히 이폴리토에게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었다.
“오빤 알 것 없어!”
그녀는 놋쇠 통을 잽싸게 잡아챘다.
“내가 무슨 마녀도 아니고, 이거 하나 달랑 있다고 아리아드네 년을 해치울 순 없다고! 오타비오가 있어야 완성된단 말이야!”
“아, 알았대도.”
이폴리토가 뻘쭘하게 돌아가는 그 시간까지 이사벨라는 제 오라비에게 신신당부했다.
“꼭 데려와야 해!”
이사벨라로부터 놋쇠 통의 비밀은 듣지 못했어도 그녀가 오타비오를 노리는 이유까지는 듣게 된 이폴리토가 반문했다.
“그런데 꼭 오타비오여야 해? 적당히 괜찮은 다른 녀석 데려오면 안 되는 거야?”
이폴리토는 이사벨라가 자기 친구들 중 가장 반반하게 생기고 집안이 제일 괜찮은 놈을 찍은 거려니 생각했다.
지금 이사벨라의 상태를 감안해 볼 때, 이폴리토의 의견으로는 이사벨라가 그렇게 까다롭게 따지고 앉았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의외로 아주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오빠가 데려올 수 있는 놈 중에, 제 약혼녀를 버리고 부모님마저 거스를 머저리는 그 새끼뿐이 없거든.”
거스르고 맨몸으로 뛰쳐나와 사랑의 도피를 하자는 둥의 헛소리를 하는 놈이면 또 안 됐다.
가진 걸 고스란히 든 채로 이사벨라를 맞아들여야 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가능할 만한 남자는 오타비오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사벨라의 눈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던 것으로 판명됐다.
* * *
“이사벨라? 무슨 생각 해?”
이사벨라는 오타비오의 부름에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리따운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우리 수녀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요.”
“하하하하하!”
오타비오는 사랑하는 그녀도 자신과 똑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에 신이 났다. 정말로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봤던 여자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 그의 첫사랑인 이사벨라 데 마레가 이제 그의 여자라니!
“조만간, 우리 결혼식을 올리자.”
오타비오는 이사벨라와 결혼식을 올릴 날을 애타게 기다렸었다.
오늘, 그러니까 그가 자신 있게 이사벨라에게 결혼식을 약속할 수 있는 날이 드디어 도래했다.
오타비오의 아버지인 콘타리니 백작은 유일한 후계자, 오타비오가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와 파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펄쩍 뛰었다.
콘타리니 백작가는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에게 약혼의 대가로 큰돈을 빌렸고, 결혼과 동시에 그 돈은 카멜리아의 지참금 조로 완전히 콘타리니 가에게 주어질 예정이었다.
게다가 카멜리아는 콘타리니 백작가로 오는 것과 동시에 평생 카스틸레오네 상단의 수익금 일부를 자기 이름으로 받기로 되어 있었다.
- “너 미쳤냐, 오타비오!”
- “언제부터 대 콘타리니 가문이 그깟 푼돈 때문에 남작가 따위에 휘둘렸습니까?”
그깟 푼돈이라기엔 지나치게 큰돈이었다. 그러나 태생이 선비인 콘타리니 백작은 차마 그 말은 못 하고 아들을 돌려서 혼냈다.
- “신의가 있고 의리가 있지! 오타비오, 너만 보다가 혼기를 놓쳐버린 네 약혼녀가 불쌍하지도 않으냐!”
-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평생 살아야 하는 것보다는 지금 파혼하는 게 덜 불쌍하지요!”
- “혼인이 얼마나 큰일인지 아느냐, 이 녀석아! 이 머저리 같은 놈아, 그냥 결혼한 뒤에 정부를 들여!”
- “‘그녀’는 한낱 정부가 되기엔 지나치게 고귀한 여자라고요!”
- “뭐 타란토의 비앙카 공녀라도 모셔왔느냐?”
타란토의 비앙카 미만으로는 그 누굴 데려와도 며느리 카멜리아를 포기할 생각이 없던 콘타리니 백작은 그 ‘한낱 정부가 되기엔 지나치게 고귀한 여자’가 누군지 알게 되자 목덜미를 잡고 비틀거렸다.
- “이사벨라 데 마레와 결혼을 하겠다니!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오타비오!”
아버지는 온갖 이유를 다 대며 반대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다.
- “네 친구와 붙어먹었다가 집안에서 쫓겨난 여자 아니냐!”
- “고귀한 이사벨라를 모욕하신다면 제아무리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못 참습니다!”
- “뭐라고?”
- “이사벨라는 체자레 데 코모와 결코 그랬던 적이 없었단 말입니다, 아버지!”
사실관계가 재구성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절친인 체자레에 대한 호칭도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불여우가 도대체 아들을 뭐라고 구워 삶아놨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허락하실 수밖에 없을걸요.”
- “도대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데? 제아무리 네가 내 유일한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 “그녀의 배 속엔 제 아이가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 “⋯⋯맙소사.”
콘타리니 백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불여우는 남자의 정신을 녹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물리 공격력도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