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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80화 (280/733)

<제280화> 훌륭한 아내

하지만 이사벨라의 배 속에 손주가 있다는 사실이 노백작의 마음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오타비오는 아직 젊고 어려 충분히 후계자를 더 생산할 수 있었고, 아들의 약혼녀인 카멜리아는 이제 혼기가 넘어 버려서 아들에게 사생아가 있다손 치더라도 아들을 버리고 파혼할 처지가 아니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의 상승혼 욕심도 그랬고, 콘타리니 가문의 금전 문제도 있었다.

여러모로 이 혼사는 그 정도로 어그러질 일이 아니었다.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로 안 돼!”

그런데, 콘타리니 백작의 눈에 정말로 흙이 들어가고 말았다. 백작이 사망한 것이다.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면 바로 결혼할 수 있을 거야.”

콘타리니 백작은 바로 어젯밤, 어쩌면 오늘 새벽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시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인은 기침병으로, 요 몇 년 사이 겨울마다 재발하던 숙환이었다.

오타비오는 딱히 불효자 축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여자에 눈이 먼 상태였다.

그가 아버지의 사망을 확인하자마자 한 일은 산탄젤로 수녀원에 마차를 보내는 일이었다.

어머니인 콘타리니 백작부인은 몇 년 전 돌아가셨고 누나인 바톨리니 백작부인의 말은 씨도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타비오의 일탈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사벨라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사과했다.

“배부른 채로 결혼하게 해서 미안해.”

이사벨라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오타비오. 전 우리 아이가 천신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아이가 될까 봐 걱정했을 뿐이에요. 결혼식 따위, 전혀 신경 안 써요.”

이사벨라는 ‘아버님이 출산 전에 돌아가셔서 다행이에요’라고 말할 뻔한 자기 혀를 깨물었다.

지금의 오타비오라면 물개박수를 치며 이사벨라에게 동의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관계가 어그러지고 나면 언제 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뚫고 올라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참자, 참자. 아직은 아니다.

최소한 오타비오가 백작위를 정식으로 계승하고, 그와 혼인을 하고, 그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마각(馬脚)을 숨겨야 한다.

이사벨라는 문득 떠오른 듯이 말을 건넸다.

“그런데 오타비오, 우리 꼭 공개적으로 크게 결혼해야 하나요?”

“응? 나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몸이 편할 때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편이⋯⋯.”

이사벨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현모양처처럼 도리질했다.

“아녜요.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나요.”

그녀는 사실 오타비오가 카멜리아와 파혼을 하는 등 구설에 오르면 레오 3세가 오타비오에게 콘타리니 백작 작위 승계를 윤허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작위 승계를 허가하지 않는 것은 국왕이 신하들을 길들이는 가장 간편한 수단이다.

그리고 레오 3세는 자신의 그 권력을 아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편이었다.

오타비오가 작위를 승계하지 못하게 되면 그녀가 애까지 배며 한 인생 베팅은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린다.

“전 사제님만 모셔놓고 단둘이 올리는 비밀 결혼식이라도 좋아요.”

이사벨라는 다시 한번, 달콤한 눈웃음을 쳤다.

“준비할 필요 없이, 그냥 오늘 밤에라도 우리 둘이 천신님께 맹세를 올려요.”

“그, 그래도 정말 괜찮을까? 당신은 원래 화려한 거 좋아하잖아.”

“으으응.”

이사벨라는 재차 도리질을 쳤다.

“그건 철없을 때 이야기고요.”

오타비오는 이사벨라의 새로운 면모에 입이 아주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는 다 각오하고 이사벨라를 집에 들였다.

사치, 향락, 호화. 다 이사벨라가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이사벨라에게 모두 줄 각오를 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이사벨라가 개심해서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었다니, 천신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물 같았다.

“바로 사제님을 수소문해 볼게. 그리고 오늘 밤에 바로 결혼하려면 결혼 예물이 없는데, 아쉬운 김에 내가 예전에 당신에게 줬던 티아라를 예물 삼아 비밀 예식을 올리면 어떨까?”

그 얘기에 이사벨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그 티아라가 어디 갔는지 몰랐다. 이사벨라는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오타비오, 전 집에서 쫓겨날 때 맨몸으로 쫓겨나서⋯⋯. 흑!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어요. 당신이 주신 티아라도⋯⋯.”

“아⋯⋯.”

오타비오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여보, 그러면 티아라도 찾을 겸, 겸사겸사 데 마레 저택에 한 번 들르는 건 어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데 마레 추기경 예하께 인사도 드려야 하고⋯⋯. 아무래도 당신 아버지시잖아.”

오타비오는 이사벨라가 집에서 성을 뺏기고 쫓겨난 사실은 알았지만, 이제 산 카를로로 돌아왔고 손주도 생겼으니 여차저차하면 다시 관계가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데 마레 추기경을 통한 권세가 탐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수하게 아내에게 아버지가 있었으면, 자식에게 외할아버지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타비오!”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오늘 최초로 뾰족해졌다. 분위기가 좋다가 망그러지자 오타비오는 깜짝 놀라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왜, 왜 여보?”

“쓸데없는 짓 하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이사벨라는 산 카를로에 복수를 위해 돌아왔다. 오타비오는 그 도구였다.

도구가 복수를 그만두라고 종용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오타비오는 이사벨라의 날카로운 기세에 움찔, 했다. 이사벨라는 이내 상냥한 표정으로 돌아와 오타비오를 얼렀다.

“당신이 준 티아라는 너무 소중한 물건이지만, 괜찮아요. 없어도 돼. 나한테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이 있는걸.”

“이사벨라⋯⋯.”

오타비오의 얼굴이 다시금 헤벌쭉해졌다. 이사벨라는 화사하게 덧붙었다.

“결혼 예물은 나중에 새로, 천천히 해 줘요. 어차피 캐럿 수 큰 보석은 오래 기다려야 마땅한 매물이 나와요.”

캐럿 수 큰 보석⋯⋯? 오타비오는 약간 뭔가 잘못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사벨라는 원래 화려한 걸 좋아한다. 이 정도면 천사였다.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에 파혼 통보를 하는 것도 조금 더 기다렸다 해요, 우리.”

파혼 통보는 가주만 할 수 있었다. 오타비오는 아버지, 콘타리니 백작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카멜리아와의 약혼을 해지하지 못했다.

그에게 파혼 통보를 할 권한이 생긴 것은 고작 8시간 전이었다.

“혹시 모르니 백작위 승계를 확실하게 받은 다음에 통보하자고요.”

“이사벨라⋯⋯. 괜찮겠어?”

오타비오는 그의 새 아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껏 질투의 화신인 카멜리아에게 단련된 오타비오로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내가 약혼녀의 존재를 일분일초도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타비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요. 카스틸리오네 남작이 당신한테 무슨 훼방을 놓을지 모르잖아요.”

이사벨라는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오타비오를 바라보았다.

“고작 제 기분 때문에 내 남편한테 위험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어요.”

“이사벨라⋯⋯.”

오타비오의 얼굴은 그야말로 감격에 차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속까지 깊다니! 이사벨라는 오타비오를 열렬히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그를 위해 이렇게나 많은 희생을 하는 것이다. 안 그런 척하지만 질투를 참으려면 얼마나 힘들까!

카멜리아와 비교하니 천 배, 만 배는 더 착했다. 게다가 그녀의 배 속에는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운수 좋은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오타비오는 희열에 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타비오의 품에 안겨 이사벨라는 다른 생각을 했다. 초여름쯤에 몸을 풀고 나면 다시 산 카를로 사교계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권력 지형도가 어떻게 바뀌었을는지는 모르지만 알폰소 왕자가 돌아왔다고 하니 조만간 지각변동이 있을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한 타임 기다렸다가 천천히 녹아들면 됐다. 오히려 잘된 일일는지도 몰랐다.

평생을 그 안에서 굴러먹고 두 번의 배신—이사벨라는 또래 친구들을 아리아드네에게 뺏긴 것과, 수녀원에 처박힌 후에 은십자 부녀회 친구들이 그녀에게 연락을 안 하는 게 자기 탓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을 거친 그녀는 이제 슬슬 산 카를로 사교계가 어떻게 굴러가는 곳인지 감을 잡고 있었다.

‘이제 나한테는 번듯한 가문 출신의 남편과, 무한히 많은 시간이 있어.’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면 좋겠는데. 아들은 이사벨라에게 콘타리니 가문에서의 부동(不動)의 입지를 보장해 줄 것이다. 이사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다려라, 아리아드네. 기다려라, 데 마레 가문!’

* * *

“왕자님! 왕자님! 얘기 좀 하십시다!”

레오 3세와의 알현이 끝나고 왕자궁으로 돌아온 알폰소는 황급하게 따라온 측근들에게 잡혔다.

오랜만에 돌아온 자기 침실에서 귀환을 만끽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표정을 굳힌 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꼭 지금 해야 하는 이야기냐는 표정이었다.

알폰소의 표정을 읽은 베르나르디노 경이 문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당연히 급한 얘기죠! 왕자님, 아내라니요?!”

‘아내’라는 단어를 들은 알폰소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기사들—베르나르디노, 만프레디, 그리고 엘코 경—은 알폰소가 열어준 문 사이로 우르르 들어갔다.

알폰소도 아직 못 앉아본 그의 침대에 털썩 앉은 베르나르디노 경은 외쳤다.

“그래요, 왕자님. 아내라뇨!”

만프레디 경도 물었다.

“왕자님, 저희 모르게 결혼하셨어요?”

알폰소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대답한 것은 엘코였다.

“두 분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

“우리가 뭘 봐? 결혼식을 봤다고?”

난 본 적이 없다고 도리질 치는 디노 경과 어벙한 표정으로 엘코 경을 쳐다보는 만프레디 경은 엘코 경의 다음 마디에 깜짝 놀랐다.

“갈리코 왕궁에서 탈출하던 날, 왕자님께서는 한 장의 서류에 사인하셨습니다.”

디노 경은 여전히 헤메고 있었다.

“우리가 율덴부르크 대공의 배에 승선한 건 공짜 아니었나? 뭐 운임 사후정산 계약서라도 날인하고 탔던 거야?”

그러나 만프레디 경은 뭔가 깨달은 게 있어 보였다.

“그날 라리에사 대공녀가 종이를 한 장 들고 왔었지 않아요? 그때 그분이 가지고 왔던 종이가 혹시⋯⋯.”

엘코 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프레디 경과 디노 경은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았다.

두 기사의 눈빛을 받은 알폰소 왕자는 잠시 멈추어 있다가, 이윽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프레디 경이 외쳤다.

“왕자님! 왜 저희에게 말씀 안 하셨습니까!”

“진짜 그게 혼인서약서였다고요?”

만프레디 경은 어이가 없어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 대공녀,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이 무슨⋯⋯!”

디노 경도 거들었다.

“난 무슨 금화 소비대차 계약서인 줄 알았어! 채권자⋯⋯. 아니, 고리대금업자 같은 모양새였다고!”

두 기사의 원성은 계속되었다.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사인한 혼인서약서가 도대체 무슨 효력이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건 협박 아니냐고요!”

엘코 경만이 혼인서약서를 옹호했다.

“경위가 어떻게 되었건, 서명의 무게는 무겁습니다. 이제 와서 혼인을 무를 수는 없습니다.”

“엘코! 너는 누구 편이야! 이제 와서 에트루스칸의 왕위계승자가 갈리코 대공녀와 결혼하는 건 갈리코만 좋은 일이지 않나!”

“편이라뇨. 갈리코의 외드 대공과 혼맥으로 이어지면 왕자님께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입니다. 아니 그리고, 이제껏 외드 대공 측으로부터 받았던 지원은 다 입 씻을 겁니까?”

만프레디 경이 격앙되어서 외쳤다.

“자네 전부터 하는 짓이 미묘했어! 갈리코의 첩자라도 돼?!”

현재 알폰소의 주가는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에트루스칸 왕국이 왕자를 홀대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 중앙대륙 그 어떤 나라를 방문하더라도 천년 고도를 수복하고 천신의 이름을 드높인 명장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거리는 인산인해가 될 것이다.

그런 그의 짝으로 최근 몇 년 사이 국왕의 부재로 국력이 확실히 약해진 갈리코 왕족, 그것도 공주도 아닌 대공녀는 확실히 급이 떨어졌다.

그러나 엘코 경은 냉랭한 말투로 답했다.

“저처럼 갈리코 왕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또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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