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81화 (281/733)

<제281화> 나도 모르는 내 마음

“그놈들은 저를 애꾸 팔병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엘코 경은 이를 악물고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영원히 검을 놓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단 말입니다. 제 모든 것을 앗아간 갈리코 왕국을 저만큼! 싫어하는 사람이 도대체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만프레디 경은 혀끝을 깨물었다. 엘코 경은 갈리코 놈들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눈과 팔을 잃었다.

확실히, 그가 갈리코의 첩자라는 건 선을 넘은 주장이었다.

알폰소 역시 가라앉은 눈으로 만프레디 경을 바라보았다. 엘코는 반론의 여지 없이 예사크에서 온갖 고생을 다 했다.

전투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가 꺼리는 일을 자진해서 도맡았다.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다.

내뱉어 놓고는 내심 반성하던 와중에 알폰소의 눈초리까지 받은 만프레디 경은 순순히 사과했다.

“⋯⋯내가 실언했다, 엘코 경.”

하지만 엘코는 눈을 번득이며 답했다.

“저는 가족도 없는 홀몸의 떠돌이입니다. 알폰소 왕자님의 영달 외에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프레디 경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엘코가 왜 라리에사 대공녀와 알폰소 왕자의 혼인에 그렇게까지 찬성하는지 추궁하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디노 경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왕자님, 왜 저희에게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디노 경은 알폰소가 얼마나 라리에사를 혐오하는지, 아리아드네에 대해 어떤 마음이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측근이었다.

“그런 희생 하실 필요 없으셨습니다! 저희한테 의논하셨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터⋯⋯!”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

필리프 4세가 알폰소 왕자의 목숨을 노리던 때. 알폰소가 사고사나 병사로 위장해 죽임을 당하면 모두가 끝장이었다.

“저희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왕자님만은 탈출을⋯⋯!”

“너희들을 지키는 게 나의 책임이야.”

알폰소는 무겁게, 나머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엘코다.”

“⋯⋯.”

디노 경은 할 말이 없어졌고, 만프레디 경도 마찬가지였다. 엘코 경만이 약간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 이 건에 대해서 더는 왈가왈부 하지 마.”

알폰소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안 그래도 레오 3세는 아들에게 이미 부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벌컥 성을 낸 참이었다.

- “내 허락도 없이 결혼을 했다고?!”

공개된 알현실 뒤에 마련된 레오 3세의 서재로 끌려들어간 알폰소 왕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 “폐하께옵선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 “뭐? 내가 언제? 누구를?”

어리둥절한 레오 3세에게, 알폰소 왕자는 답했다.

- “갈리코의 라리에사 대공녀입니다.”

- “뭬라?”

- “그 여자와 결혼하라고 저를 갈리코로 보내셨던 것은 폐하이십니다.”

- “허!”

레오 3세는 분통이 터져 소리를 질렀다.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지금이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게다!”

레오 3세는 황급하게 알폰소와 라리에사를 결혼시킬 수 없는 이유들을 주워섬겼다.

- “라리에사 드 발로아라면 애초에 사람됨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게다가, 요사이에는 건강이 나빠져서 대공저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말까지 있다! 몸도 건강하지 못한 팔푼이와 에트루스칸의 후계자를 결혼시킬 수는 없지 않으냐!”

라리에사 대공녀의 사람됨은 그때도 지금도 똑같았다.

레오 3세의 반대 이유는 정확하게는 이제 라리에사 대공녀는 화약을 가져오지 않는 쓸모없는 혼처라는 점이었다. 그때와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빼고 불만을 표하자니 논리가 없는 반대가 되어버렸다. 레오 3세의 억지에 알폰소 왕자는 싱겁게 답했다.

- “이미 혼인서약서에 서명해 버렸습니다.”

- “뭐라고!”

레오 3세는 당장 혼인서약서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했다. 법적 효력 유무를 검토해보기 위함이었다.

아마 지금쯤 레오 3세의 시종이 왕자궁 사람으로부터 알폰소의 혼인서약서를 받아 레오 3세에게 들고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혼인서약서에 법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폰소도 어느 정도는 감을 잡고 있었다.

그게 이제까지 공개적으로 라리에사 대공녀와 혼인했다는 이야기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였다.

‘⋯⋯설사 무효면 어떠랴.’

알폰소 왕자는 혼인서약서의 유‧무효에 별 관심이 없었다.

레오 3세는 라리에사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펄펄 뛰었다. 그건 알폰소도 그간 그녀의 편지들에서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던 바였다.

라리에사는 침상에 누워 있다거나 한참이나 외출을 하지 못했다는 내용을 적는 일이 잦아졌다. 필체도 예전처럼 정갈하지 못했다.

전쟁 후반에는 편지의 간격 자체도 드문드문하거나, 아니면 곧바로 몇 통이 몰아서 오거나 하면서 불규칙한 양상을 보였다. 아팠던 기간에는 보내지 못한 듯 싶었다.

그러나 알폰소에게 그건 라리에사와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아니라 결혼을 해야 할 이유였다.

‘나만 바라보다가 혼기도 놓치고 건강도 망친 여자.’

그녀에 대한 호감 유무를 떠나서, 어찌 되었건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내가 책임지는 게 맞아.’

알폰소는 다시금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궁전에서, 알폰소는 라리에사에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바로 이 창문에서, 마지막 만남을 구걸하는 라리에사를 보고서도 그녀의 알현을 거절했다.

모두, 그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라리에사는 지난 사 년간 알폰소에게 일편단심으로 헌신적이었다. 그 헌신이 비틀린, 아픈 헌신이라는 사실을 별론으로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라리에사 대공녀를 책임져야 하겠다는 결심은 아주 최근에서야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라파엘의 품에 안겨 인파를 떠나는 뒷모습을 본 이후에야 말이다.

‘⋯⋯.’

알폰소는 레오 3세 앞에서 자신은 라리에사 대공녀와 혼인한 사이라고 대놓고 말했다.

그건 율덴부르크 대공의 어린 딸과 혼담이 오가는 것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혼인서약서에 서명한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 혼인서약서는 언젠가는 이행되거나, 아니면 국가 대 국가의 일로 해소되어야 했으니 언젠가 레오 3세에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대신들 앞에서 그렇게 불쑥 말해버린 건,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었다고 정말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없어진 이후로도 충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뒤로 욱해서 말이다.

알폰소는 어렸을 때처럼, 벽 쪽으로 등을 대고 무릎을 세운 채 자기 방의 창틀에 걸터앉았다.

한때 아리아드네와 함께 타란토의 별궁으로 내려가 무엇을 하고 시간을 보낼지 고민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 * *

루비나 공작부인은 기분 좋아질 만한 소식과 기분이 나빠질 만한 소식을 각각 한 개씩 받아들었다.

“이게 무슨 유령 밀 껍질 까먹는 소리야.”

그녀를 화나게 만든 것은 아들, 체자레의 편지였다.

어머니의 ‘알폰소가 귀국했으니 너도 이제 그만 수도로 돌아오라’는 전갈에 대한 답장으로 그녀의 아들은 뜬금없이 아름다운 피사노 영지의 풍광을 찬양하는 시를 써 보냈다.

“이거 안 내려오겠다는 소리지?”

“⋯⋯제가 어찌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기대를 하겠니.”

옆에 있던 시녀를 괴롭힌 루비나는 짜증스럽게 편지를 던졌다.

“쓸만한 아랫것들이 없어.”

루비나 공작부인은 상대방이 듣건 말건 투덜댔다.

어디 이름도 못 들어본 하급 귀족 가문에서 올라온 공작부인의 시녀는 찔끔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죽은 콘타리니 백작의 아들인 오타비오가 새로운 콘타리니 백작이 되었고,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던 내각 자리까지 물려받았다는 소식이었다.

‘폐하도 참.’

레오 3세는 밀당의 귀재였다. 항상 루비나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듯 말 듯 줄 듯 말 듯하면서 애를 태웠다.

‘결국 이렇게 내 청을 들어주실 거면서.’

그녀는 만족스럽게 부채를 부쳤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콘타리니 백작이 죽어버리자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그간 그녀의 백작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져, 막판에는 웬만한 의사결정을 모두 다 그와 의논할 정도였다.

여러 대안을 마련해놓는 것이 좋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웠다.

요 몇 년 사이 레오 3세와 대귀족들 사이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어, 루비나에게 새로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 그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자 아래에 고양이 안 난다고, 그 아들도 쓸만하겠지.’

루비나는 콘타리니 백작의 아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채, 만연히 오타비오가 콘타리니 백작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루비나가 아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는 공립학교 따위는 당연히 없었고, 귀족들도 대개 집에서 가정교사를 끼고 가르쳤다.

대학은 우수한 인재를 교육하는 기관이 아니라 훌륭한 가정교사를 초빙할 수 없는 집안의 자제들이 가거나 아니면 신학이나 법학같이 일반적으로 배울 수 없는 특수 스킬을 배우러 가는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좋은 집에서 자라면 좋은 교육을 받았다. 좋은 가문의 자식을 데려오는 것은 인재를 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새 콘타리니 백작은 언제 온다니?”

루비나는 자신의 시녀에게 물었다.

“그, 그건 잘⋯⋯.”

“네가 아는 게 뭐야?”

루비나의 시녀가 두 번째로 눈물‧콧물을 빼려던 차에, 밖에서 왕실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공작부인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드시라 해.”

“예.”

루비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곧이어,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건 오타비오가 안으로 들어섰다.

“루비나 공작부인,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육받은 예법대로 올린 깔끔한 인사였지만,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모양새는 감출 길이 없었다.

현재 산 카를로 사교계의 여왕인 루비나 공작부인은 오타비오의 그런 기색을 예리하게 잡아챘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여유 있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춘부장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오타비오는 고개를 숙였다.

“공작부인께서 많이 돌보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고 콘타리니 백작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조화와 선물을 보냈다. 그녀의 인맥이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것은 덤이었다.

“백작 작위 승계 축하드려요.”

“다 공작부인의 덕입니다.”

“그런 거 가지고 무슨.”

루비나는 얇은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더 좋은 소식이 있어요.”

“예?”

“백작은 레서 큐리아 레지스의 멤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이미 오타비오의 얼굴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각, 그러니까 발데사르 후작, 마르케즈 백작과 함께 그대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지위를 그대로 승계하게 되었어요.”

“!”

“낭보를 제가 제일 먼저 전해 드리게 되어 기쁘네요.”

이것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오타비오 같은 애송이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자리가 그의 아버지의 위치였다.

왕궁 법정의 절차적 면을 주관하고, 감옥의 관리와 형 집행을 실행하며, 레오 3세의 명을 받아 성도의 치안을 관리하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실세 중의 실세 아닌가.

오타비오는 감사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뒤로 빼는 말부터 해 버렸다.

말을 하는 도중에야 그는 이게 루비나 공작부인이 마련해준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건 저에게 너무 과분한⋯⋯.”

“자식은 어쩔 수 없이 그 부모님을 닮기 마련입니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매력적으로 웃었다.

“부친만큼 훌륭하신 대신이 되시리라 믿어요.”

오타비오는 뒤늦게야 감사 인사를 주워섬겼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많이 도와주시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앞으로 천천히 갚으면 되죠.”

이런 일에 일방적인 호혜란 없었다. 갚을 기일을 뒤로 미뤄준 것만 해도 크게 인심 쓴 거다.

안 그래도, 첫 테스트가 있었다.

“조만간 저한테 젊은 부인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길 것 같아요. 콘타리니 백의 약혼녀가 아름답고 세련됐다고 하던데, 마침 딱 맞겠네요.”

제⋯⋯. 약혼녀요?

오타비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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