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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82화 (282/733)

<제282화> 새로운 인연들

“콘타리니 백작, 결혼은 언제 할 거예요?”

오타비오는 루비나 공작부인을 알현하러 와서 갑자기 이런 주제가 나타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아⋯⋯. 그것이⋯⋯. 선친께서도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 맞다. 그랬지.”

오타비오의 개인적인 감정 내지는 사정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던 루비나는 아무렇게나 답했다.

“약혼녀가 상심이 크겠어요.”

어감상 결혼이 미뤄져서 상심한다는 소린지 예비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심했을 거란 소린지 불확실했지만 오타비오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카멜리아의 상심이 크겠지. 결혼이 파투날 테니.’

그는 지금 루비나에게 어디까지 밝혀도 되는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그러겠지요.”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장담만 했다.

“그렇지만 걱정 마십시오. 수도에서 제일가도록 아름답고 세련된 여자입니다.”

이사벨라라면 그 면에 있어서는 걱정없었다.

“공작부인께 도움이 확실히 되도록 할 테니 걱정 꽉 붙들어 매십시오. 하하하!”

루비나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타비오의 약혼녀는 수도에서 일이 위를 다투는 거대 상단의 주인인 카스틸리오네 남작의 딸이다.

오타비오는 궁정에서 그녀의 편을 들고, 오타비오의 안사람은 밖에서 그녀의 자금줄이 되고, 어느 모로 보건 꽃놀이패였다.

“좋아요, 콘타리니 백작. 믿겠어요.”

“맡겨만 주십쇼! 하하하하!”

* * *

“어쩌면 이럴 수가 있어?!”

카멜리아의 곡소리가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카멜리아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부르짖었다. 망가진 모습을 보이기 끔찍하게 싫어하는 카멜리아였지만 오늘은 그런 걸 고려할 여유도 없었다.

코르넬리아가 묵묵히 카멜리아를 품 안에 안아주었다.

슬퍼하는 친구를 위로하는 것은 원래 펠리시테의 담당이었지만, 펠리시테는 이 자리에 없었다.

펠리시테는 올해 스물다섯 살로 나머지 친구들보다 나이가 좀 많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마땅한 혼처를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인 엘바 자작은 바로 며칠 전, 지참금을 아끼기 위해 그녀를 수도원에 보내버렸다.

“카멜리아⋯⋯.”

카멜리아의 볼연지가 눈물과 섞여 코르넬리아의 흰 드레스에 묻어났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어떡하라고!”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의 머릿속엔 수녀원, 세 글자가 무겁게 떠올랐다.

오늘 카멜리아가 들고 온 소식은 콘타리니 백작가로부터의 파혼 통보였다.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는 아무런 이유를 대지 않은 채, 무작정 파혼서를 보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합당한 사유가 없으면 파혼은 불가하다며 일단은 버텼지만, 가주인 결혼 당사자가 이 결혼은 죽어도 안 하겠다는데 손해배상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결혼 자체를 강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이제는 몬테펠트로 후작의 장남과 결혼해 델레토레 백작 영애가 아닌 시뇨라 가브리엘레가 된 가브리엘레가 카멜리아를 위로했다.

“카스틸리오네 가문은 엘바 자작가와는 상황이 다르잖아……. 너는 괜찮을 거야, 카멜리아.”

확실히,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에서 지참금이 부족해서 카멜리아를 수녀원에 보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남들 보기에 남사스러워서, 는 딸을 수녀원에 보내버릴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남작님께서도 널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줄리아도 거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도 확신은 없었다.

아마 카멜리아는 결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혼처의 급은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와 비교해 크게 떨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카멜리아는 혼기를 크게 넘겼고, 한 남자와 지나치게 오래 약혼 상태로 있었다.

몹시 가난한 남자를 데릴사위로 들이는 게 아니라면 나이 든 귀족의 후처가 카멜리아가 객관적으로 바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것도 지참금을 바리바리 싸서 들고 갈 때 그랬다.

“오타비오는! 도대체 왜!”

카멜리아가 흘리는 눈물이 카펫에 뚝뚝 떨어졌다.

오타비오에 대한 원망과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신세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섞인 눈물이었다.

“이제 와서 도대체 왜!”

그건 아리아드네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던 고민이었다.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가 이제 와서 도대체 왜?

둘은 제법 어울리는 한 쌍인 데다가, 콘타리니 가문이 카스틸리오네 가문에 자식들의 약혼을 이유로 당겨 받은 카멜리아의 지참금도 있었다.

액수는 정확히는 몰랐지만 카멜리아의 말에 따르면 적지 않은 금액인 것으로 알고 있다.

파혼 시엔 그 돈을 다 토해내야 할 터였다. 마땅한 사유가 없다면 손해배상금까지 얹어서 말이다.

저번 생의 오타비오는 얌전히 카멜리아와 결혼했었다. 가끔 투닥거리기도 했지만 자식도 여럿 낳고, 그럭저럭 괜찮은 가정생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리아드네는 전생과 이번 생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에 대해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이번 생에 돌아와 귀족의 혼사에 관해 바꾼 일은 체자레와 파혼한 것밖에 없다.

‘오타비오의 누나가 이번 생에서는 체자레와 내연 관계가 아닌 것 같던데, 그것 때문에 뭔가가 비틀렸나?’

그건 연관성이 너무 멀었다.

‘아니면 오타비오가 수도에서 체자레와 어울려 다니지 않아서 그 시간에 딴짓을 하다가 다른 여자를 만난 건가……?’

결혼 상대는 그럼 누구지? 떳떳한 루트로 만날 수 있는 여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코르티잔? 아니면 가난한 농가의 딸?

갑자기 그때 섬광처럼 어떤 생각이 아리아드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사벨라!’

* * *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에서 친구들에게 안겨 한참을 운 카멜리아는 먼저 돌아가 보겠다며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앞에서 펑펑 울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계속 보기가 민망했다. 게다가 눈두덩이도 잔뜩 부어 있었다.

그녀는 마차에 타기 전에 붓기도 가라앉힐 겸 데 마레 대저택의 정원을 조금 산책하다가 집에 갈 요량이었다.

언제나 예쁘고 착한 딸이던 카멜리아는 이번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렸다.

약혼자에게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당하다니! 그건 카멜리아에게 마치 네가 여성성이 모자라서 그렇다는 실패 통지서 같이 느껴졌다.

‘내가 못생겼고, 나이가 많아서 오타비오가 날 더는 사랑하지 않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아드네의 후원을 걷던 카멜리아는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뜨거운 눈가를 손으로 훔치면 화장이 무너져 버릴 터였다.

응접실에서도 손수건으로 얌전히 찍어내면서 필사적으로 지킨 눈화장이다. 이제 와서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흑흑…….”

그녀는 앞이 안 보이는 채로 걸었다. 하염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때, 카멜리아는 누군가와 부딪혀 버렸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아앗!”

카멜리아는 페투니아 화단에 쓰러졌다.

“괜찮습니까?”

약간 나이가 있는 남자가 황급히 카멜리아를 들여다보았다. 키가 크진 않았지만 떡 벌어진 체격이 듬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많이 다치신 건 아닌지요?”

카멜리아는 멍하니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묘하게 낯이 익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카멜리아는 신음하며 웅얼거렸다.

“발목이……. 발목이 아파요.”

“이런, 저 때문에.”

중년 남자는 카멜리아를 혼자 두고 가기엔 못내 걸렸는지 시간을 가늠해 보더니 제의했다.

“이 댁에 볼일이 있긴 한데, 서둘러 돌아오면 될 것 같아서……. 괜찮으시면 지금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댁이 어느 쪽이신가요?”

카멜리아는 이때까지도 별생각이 없었다.

* * *

아리아드네는 툴루도 언덕을 찾아 올라가고 있었다. 밤 9시, 무어인 할머니의 권유대로 혼자였다.

- 히히힝!

어두운 곳에서 예상치 못한 돌부리에 걸린 그녀의 갈색 암말이 앞발을 들고 크게 울었다.

“라피나, 워워.”

아리아드네는 말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괜찮아, 괜찮…….”

- 이히히히힝!

하지만 말은 재차 앞발을 들어 올리며 울부짖었고, 아리아드네는 재갈을 당기기 위해 고삐를 조였다.

- 투둑!

하지만 고삐는 압력을 받자 기묘한 소리를 내며 투두둑, 끊어져 버렸다.

“아악!”

아리아드네는 반사적으로 끊기지 않은 반대쪽 고삐를 움켜쥠과 동시에 말 갈기를 붙잡고 말의 몸통에 몸을 딱 붙였다.

- 히히힝!

라피나는 재차 울부짖었지만, 원체 순한 말이었다. 말은 주인이 위험해진 것을 느끼자 알아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숨을 골랐다.

말이 완전히 멈추자 아리아드네는 곧장 안장에서 뛰어내려 끊어진 고삐를 살폈다.

‘언뜻 보기엔 닳아서 끊어진 것 같지만…….’

데 마레 대저택에서 데 마레 백작이 쓰는 말고삐가 낡은 것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유심히 고삐를 살폈다.

‘이건…….’

말고삐의 끊어진 부분에 미세하게 사포질 된 부분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닳은 것처럼 만들려고 신경을 썼지만 마구의 나머지 부분은 반들반들한 새 가죽이었다.

그녀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우두커니 서서 머리를 굴렸다.

‘살해 시도……?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녀의 생각은 호된 호통 소리에 끊겼다.

“언덕 꼭대기에서 만나쟀더니 뭘 이런 데서 꾸물대고 있어!”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예의 그 무어인 할머니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아리아드네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리까지 지르실 건 없잖아요!”

아리아드네는 놀란 가슴을 숨기기 위해 마주 소리쳤다. 무어인 할머니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큰 소리 낼 수 있는 날은 그믐밤밖에 없어. 좀 봐 줘.”

그녀는 언덕 위로 향하는 길을 앞장서서 걸었다.

“어여 따라서 와. 달이 뜨겠어.”

아리아드네는 끊어진 쪽 고삐를 재갈에 대충 다시 묶고 에누리 없는 잰걸음으로 언덕 정상으로 올라가는 할머니를 재빠르게 따라갔다.

하지만 무어인 할머니는 그것조차 마음에 덜 찼던 모양이다.

“후딱후딱 좀 움직이지 달팽이라도 삶아 먹었어?”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달팽이는 우리 음식이 아닌데요.”

왜인지 이 할머니에게는 어리광을 피워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기분 자체가 꿀꿀하기도 했다.

달팽이는 갈리코의 전통음식이다. 아리아드네는 어제부터 수도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은 이후로 대단히 저기압이었다.

그 소문은 ‘알폰소 왕자는 라리에사 대공녀와 이미 결혼한 사이다’라는 내용이었는데, 레오 3세가 필사적으로 입단속을 시켰으나 귀 밝은 사람 중에서는 이미 알음알음 정보가 돌았다.

하지만 무어인 할머니는 아리아드네의 어리광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비유법도 모르니.”

그녀는 유쾌하게 낄낄대며 언덕 꼭대기에 올라 양팔을 넓게 폈다.

“자 보려무나! 아무도 없지?”

아리아드네는 무어인 할머니의 일방적인 대화에 슬슬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툴루도 언덕 꼭대기라면 아무도 없겠지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반항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무어인 할머니는 여전히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아니,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야. 하늘을 올려다보렴.”

아리아드네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우주가 땅으로 쏟아져 내릴 기세로 별들이 너도 나도 빛났지만 오늘 밤은 구름이 낀 것도 아닌데 하늘 전체가 어둑하니 고요했다.

“……?”

“쯧쯧. 달이 없잖니.”

무어인 할머니는 허리춤에서 반짝이는 금가루를 꺼내 사방에 뿌렸다. 그리고 지팡이를 휘둘러 금가루 더미와 더미를 잇는 사각형을 그렸다.

“자.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아리아드네는 이런 행위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루크레치아의 하녀가 죽어버렸던 날, 무어 제국으로 달아난 집시 여인이 똑같은 일을 했었다. 구체적인 도형의 모양은 달랐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시군요. 따라오길 잘했어요.”

“그럼 내가 가짜일 줄 알았니?”

기분이 상한 노파는 퉁명스레 말했다. 아리아드네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그동안 사기꾼을 많이 만났거든요.”

아리아드네는 무어 제국으로 떠난 집시 여인을 만난 이후로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활동하는 신통력이 있다는 집시나 용하다는 타로 점쟁이들을 대부분 만나 보았다.

그들이 하는 말은 대개 비슷했다.

횡액이 오고 있으니 제물을 바치며 치성을 올리면 모든 걱정거리를 싹 없애 주겠다, 뭐 그런 부류들이었다.

그녀는 입으로는 믿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경계를 낮추지 않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시험할 겸, 할머니에게 물었다.

“저 올라오면서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말 고삐가 끊어져 버렸지 뭐예요.”

아리아드네는 노파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짓말쟁이라면 답하는 태도에서 티가 날 것이다.

“살해 시도인가 싶기도 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기꾼들은 많은 경우 여기서 치성을 올리라고 답한다.

그러나 노파는 툭 대답했다.

“그런 잡스러운 일 가지고 고민하지 마라.”

“암살 시도가 잡스러운 일이라뇨?”

“큰 그림에선 아무것도 아니야.”

노파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 말고, 네가 어떻게 되돌아온 것인지에 대해서나 이야기하자꾸나, 회귀자야.”

노파는 눈알을 빛내며 말했다.

“아니, 반쪽짜리 회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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