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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83화 (283/733)

<제283화> 회귀의 비밀

노파의 말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얄팍한 의심 따위는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이 할머니는 정말로 진짜다.

“반쪽짜리 회귀자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그녀는 이 비슷한 말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회귀든 미래시이든, 회귀면 회귀고 미래시면 미래시지 왜 반쪽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 어디서 얼치기를 하나 만나긴 했던 모양이로구나.”

노파는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그 학파가 갈라져 나간 지 대충 이백 년 정도니……. 중앙대륙에 사는 집시로군! 중앙대륙에도 자생적인 학파가 있긴 있었어!”

아리아드네는 할머니를 재촉하는 대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 태도는 노파의 호감을 산 모양이었다.

그녀는 더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아리아드네의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네가 자의로 돌아온 게 아니지 않니. 그래서 반쪽이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야.”

노파는 이 모든 신비에 대한 간단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것은 하필이면 오늘을 약속일로 잡은 이유였다.

그믐밤은 유일하게, 약간의 결계만으로도 자유로운 대화가 허용되는 날이라고 했다.

‘눈뜬 자들’이 모두 회의장에 집결하는 바람에 지상의 일들을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난 개인적으로도 널 만난 게 아주 흥미로워.”

이 말은 개인적인 흥미 외에 다른 용무가 있어서 아리아드네를 만나러 왔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부분을 추궁할 때는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도 모르는 척 장단을 맞췄다.

“왜죠?”

“회귀자는 보통 ‘우리 같은 사람’이야. 회귀에는 큰 대가가 있어. 그래서 이제까지 기록이 남은 회귀자들은 모두 회귀의 비술을 쓴 사람과 과거로 되돌아간 사람이 일치했단다.”

“이해가 안 가요.”

“좀 더 간단하게 말해주마. 대가는 자기가 치르는데 소원은 남의 소원을 들어줄 바보가 있겠니?”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없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을 대신 들어준다던가, 가족이나 자녀를 돌려보내 준다던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안 돼.”

노파는 웃었다. 영민한 아이였다.

“회귀자가 되려면 영혼의 ‘급’이 높아야 한단다. 너희 말로 하자면……. 그래. 천신이 주관하는 ‘윤회의 고리’를 여러 번 돌면서 스스로를 도야한 사람이겠어.”

그런 자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비술을 쓸 줄 아는 사람의 가족이나 연인이 그런 격 높은 영혼일 가능성은 낮아.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격이 높은 영혼은 대개 비술 쪽으로 빠지기 때문에 격이 높은 영혼은 대개 스스로도 비술을 쓸 줄 안단다.”

노파는 설명했다.

“그래서 자연히 비술을 쓴 사람과 돌아가는 사람이 같아졌던 거야.

대가를 치를 만큼 뭔가를 간절하게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과거로 시간을 돌리지.”

그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지 말한 노파는 눈을 빛내며 아리아드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런 신기한 케이스는 네가 처음이로구나. 연구할 가치가 있어.”

노파는 학문적인 호기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건 악용의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대가가 비술 사용에 따르는 건지, 아니면 회귀 자체에 붙는 건지부터 알아볼 수 있지 않겠니?”

대가가 비술 사용자에게 붙지 않고 회귀자에게만 붙는다면, 아무나 랜덤으로 붙들고 과거로 날려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비술 사용자는 자기 컨트롤에서 벗어나서 마음대로 변하는 과거와 그로 인해 비롯된 현재를 버텨내야 할 테니 그럴 유인은 적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미친 짓을 이미 한 놈이 최소한 하나는 있지 않은가.

“네가 씌워진 주술의 형태를 볼 때 암하라 놈들의 소행일 거 같기는 한데…….”

아리아드네는 장갑을 벗고 노파 앞에 자신의 왼손, 아니 왼팔을 내밀었다.

“이게 대가인가요?”

“오 이런.”

팔꿈치 너머까지 붉은 반점이 퍼진 팔을 본 노파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태가 꽤나 나쁘구나.”

하지만 그녀는 전혀 놀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 자체는 대가가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보다 더 나쁜 뭔가가 있다는 건가요?”

문득 희망찬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면 대가는 제가 아니라 비술 사용자가 치른다는 건가요?”

이게 회귀의 대가, 혹은 징벌이 아니라면 제발 좀 없애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노파는 혀를 쯧쯧 찼다.

“대가를 누가 치를지는 이것만 보고는 알 수 없고.”

그녀의 눈에 약간의 측은지심이 서렸다면 잘못 본 것일까.

“……이건 예고편에 불과해.”

아리아드네는 노파의 기색에 불안감을 느꼈다.

노파는 아리아드네의 왼팔에 손가락을 대고 어깨까지 죽, 일자를 그었다.

“왼팔의 붉은 피는 네가 이번 생에 지은 업을 상징하는 거란다.”

아리아드네가 흘린, 아니, 남에게 흘리게 한 피.

“전생이었다면 평화롭게 살았을 사람들이 네 개입으로 인해서 인생이 망가트려진 경우에 늘어나는 거지.”

대부분 갈리코 왕국의 흑사병 희생자들이었다.

“……어쩔 수 없었는데도요……? 갈리코 군대를 그냥 두었다면 가에타 지방이 적에게 넘어가고, 에트루스칸 반도 인구의 1/3 정도는 굶주림과 흑사병으로 죽었을 거예요.”

“에트루스칸인을 구하기 위해 갈리코인을 죽였다 이건가? 오 안타깝군. 눈물 나는 애국심이야. 하지만 ‘황금률’은 기계적이야. 그런 거 따지지 않아.”

아리아드네는 이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노파에게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황금률’은 도대체 제가 어쩌길 원하는 걸까요? 이 끔찍한 게 본편이 아니라면, 본격적인 대가는 도대체 뭐죠?”

노파는 혀를 쳤다.

“이거 가지고 벌써 그러면 어쩌냐?”

아리아드네의 팔에 있는 피얼룩은 일종의 계기판 같은 거였다.

“심판의 날, 그러니까 네가 전생에 죽었던 날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네 공과를 계량할 거란다.”

노파는 소녀의 팔에 있는 새빨간 흔적을 흘긋 쳐다보았다.

“손목을 넘어서 팔꿈치까지 육박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어. 넌 참 짧은 시간 안에 손에 칼 하나 들지 않고 큰 업을 쌓았구나.”

그게 권력과 경제의 힘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인 하나 없이 수백, 수만의 사망자를 만든다.

“공도 함께 세 주나요?”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한 줌 희망을 끝내 놓지 않았다.

조그만 희망이라도 붙들고 참고 버티는 것은 그녀의 미덕이자, 전생의 그녀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던 특성이기도 했다.

“저기, 이거.”

아리아드네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짝임이 예전처럼 춤을 추지는 않았지만 성화에 나오는 광륜처럼 은은한 빛무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것과 상계하는 건가요?”

그녀의 녹색 눈에는 오른손 끝에서 빛나던 빛무리 같은 반짝거림이 떠올라 있었다. 오랜만에 띠는 생기였다.

선업을 충분히 많이 쌓으면……. 심판의 날에는 왼손의 피도 다 사라지고 추가적인 대가도 없을지도?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행복한 상상은 몇 초도 가지 못해 무너져내렸다.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세요?”

무어인 노파가 아주 불쌍한 것을 보는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는 씻겨지지 않아.”

노파는 하늘을 보았다. 에트루스칸 땅의 그믐밤엔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하늘이 이불처럼 대지를 덮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선택을 되새겨보는 듯했다.

“지은 죄가 씻겨진다면, 세상에 죄지은 자가 누가 있겠니.”

성황청에서 취급하는 면죄부. 매일 올리는 정성 어린 기도. 신실한 참회. 진심 어린 사과와 용서.

“다 덧없는 짓이야.”

엎질러진 물은 엎질러진 물이다. 그저 젖은 바닥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말라붙은 바닥 위에 새로운 세월의 더께가 쌓일 뿐이다.

노파는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넌 죗값을 모두 갚게 될 거다. 심판의 날이 오는 날, 네가 진 죄업은 액운의 형태로 네 인생에 쓸려 들어 오게 될 거야.”

승승장구하다가 무너지는 영웅의 대서사시. 젊은 시절 거듭되는 성취를 거두다 비참한 말년을 맞는 예술가.

모두 회귀해서 죄짓기를 피하지 못한 회귀자의 흔한 결말이었다.

“그리고 그 액운이 불러온 불행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 네 영혼은 윤회의 고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눈뜬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지.”

노파는 과거의 실패한 회귀자들을 줄줄히 읊었다.

대부분은 이국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었으나 몇몇은 그녀도 알고 있는 라탄 제국, 그리고 그 이전 필로아 문화권의 영웅들이었다.

성공을 대가로 영혼을 파는 사람들.

“그거 혹시…….”

악마와의 계약……?

아리아드네의 입술이 차마 그 단어를 내뱉지 못한 채 파르르 떨렸다.

“네가 무슨 말 할지 알아.”

노파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똑똑해 보이더니만 서부 대륙……. 아니, 중앙대륙인은 어쩔 수 없구만. 이 이야기를 알게 된 중앙대륙 사람들은 백이면 백 죄다 이게 ‘악마와의 계약’ 아니냐고 물어보거든.”

그녀는 혀를 찼다.

“삼백 년 전 고서에도 똑같은 질의응답이 쓰여 있고, 칠십 년 전에 발라사 오르도에 찾아왔던 중앙대륙 학자도 똑같은 말을 하더구나. 쯧쯔, 창의력 없는 것들.”

“그게 진리니까 계속 같은 지점에서의 도전이 반복되는 것일 수도요. 회귀의 대가로 영혼을 가져가는 게 악마지 다른 게 악마인가요?”

아무리 1120년대 중앙대륙의 교계가 타락하고 방종하다지만 어쨌건 아리아드네는 성직자의 딸이었다.

그녀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반복적으로 교육받았다.

영혼을 판 자는 윤회의 고리에 합류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끌려가 악마의 사슬 속에서 영원히 불타게 된다고 배웠다.

“그건 너희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눈뜬 자들’은 악마가 아니야. 그저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지.”

아리아드네의 등에 식은땀이 났다.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신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혼의 끝장 아닌가요.”

그녀는 덧붙였다.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면 더 훌륭해질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걸요.”

노파는 박수를 쳤다.

“중앙대륙인 치고는 훌륭해. 윤회의 고리를 영혼을 더 갈고 닦을 기회로 인식하다니.”

그녀의 주름진 갈색 얼굴에는 비웃음인지 찬사일지 모를 희미한 미소 한 줄이 그어져 있었다.

“중앙대륙 멍청이들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내세에는 더 돈 많고 왕족 친척이 있는 부자로 태어나는 게 윤회라고 하더구나! 에잉, 그딴 걸 위해 윤회할 거면 그냥 십자군 전쟁에나 뛰어들어서 현세에서 출세할 궁리를 할 것이지!”

노파는 허공을 향해 삿대질을 하더니 자세를 바로 하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중앙대륙인 특유의 한계는 벗어나질 못했구나, 아가야. 왜 윤회가 좋기만 한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녀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천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굴레라는 생각은 왜 못해?”

“굴레……?”

“그래. 넌 왜 회귀하고 싶었니?”

본래의 삶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고 싶어서였다.

“회귀하는 자들은 보통 부귀영화나, 이루지 못한 염원이나, 그런 이유로 시간을 돌린단다.

그런데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들은 조금 달라. 우리는 영겁을 가지고 싶어해.”

그녀의 눈가가 아득했다. 주름진 눈가라서 더더욱 영원을 말하는 노파의 얼굴이 애처로워 보였다.

“인간은 수명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어. 어느 순간이 되면, 그래, 대개 자신의 유한함을 깨달았을 때지. 그때가 되면 개체의 진전은 포기하고 자식을 낳아 반쪽짜리 영속성을 이루려고 한단다.”

노파는 클클 웃었다. 어느 정도는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건 정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야. 자식은 결국 내가 이어지는 게 아니란다. 처음에는 날 닮은 나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걔들은 다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 사방으로 뛰쳐나가게 돼. 그걸 막으려고 들면……. 어휴, 말도 마라.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성공하더라도 남은 자식들은 반푼이가 되고 만단다.”

노파는 아리아드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런. 이야기가 샜구나. 난 네가 왜 회귀했는지는 몰라.”

“…….”

“만약 내가 그래, 그런 인간의 유한함을 벗어나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진리를 탐구하는데 온전히 스스로를 연마할 수 있다면?”

노파의 눈이 유쾌하게 빛났다.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회귀조차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니? 그깟 부귀영화, 권력과 애정과 사랑, 다 백 년만 지나면 썩어 없어지는 의미 없는 것일진저.”

노파의 눈이 반짝였다.

“궁구의 끝에서 ‘눈’을 뜨게 되면, 윤회의 고리에서 떠날 수 있단다. 그 사람들을 우리는 ‘눈 뜬 자들’이라고 불러.”

노파의 말소리는 동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울렸다.

“‘신’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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