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화> 무엇을 이뤄드려야 하죠
“그거 꼭 해야 해요?”
아리아드네는 평이하게 답했다. 노파는 경악했다.
“뭐라고?”
“솔직히⋯⋯. 과거로 돌아온 기적을 본 건 맞지만. 저한테는 다 몹시 생소한 이야기예요.”
아리아드네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그녀는 지금 기분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회귀에 대해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었던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
비밀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기분이 몽글몽글 좋아졌다. 자연스레, 말도 편하게 나갔다.
“선생님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전 중앙대륙 사람이라고요.”
신앙심이라고는 먹고 죽으려도 없지만 종교는 신심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고체계와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악마 같아서 찜찜하기도 하고. 신이니, 눈 뜬 자니, 비술 쓴 사람이 잘 풀리면 되는 거라니까 다 무어 제국 사람들일 거 아니에요? 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영생하는 거 별로 관심 없어요.”
“허!”
노파는 숨이 차서 헐떡였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해본 이야기였다.
“아니 이놈이!”
위에 누나가 여덟 명쯤 있는 외동아들이 자기는 평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할 거라고 선언하는 걸 보는 부모가 이런 기분이려나.
노파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리아드네는 계속했다.
“그냥 이대로 쭉 가면 살면서 액운이 좀 와서 힘들기야 하겠지만. 그냥 선업도 더 안 쌓고 악업도 더 안 쌓고 집안에서 버티면서 아무것도 안 하면 다시 윤회의 고리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회귀는 이미 선불로 받았고. 작위도 생겼고 돈도 벌었다.
애정전선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약혼자와 친언니에게 배신당해 서쪽 탑에서 끝났던 지난 생보다야 이미 백번 나아진 상태 아닌가?
아리아드네는 방긋 웃었다.
“틀린 부분 있으면 정정해 주세요.”
“이 무식한 것아!”
노파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 딱!
“아야!”
아리아드네는 정수리를 감싸 안고 노파에게 항의했다.
“말로 하면 되지 왜 때려요!”
“말이 안 통할 정도로 무식해서 그런다, 왜!”
노파는 씩씩대며 마저 말했다.
“누가 윤회의 고리로 순순히 돌려보내 준대? 자, 봐라. 심판의 날이 있어! 네가 원래 죽었어야 했을 날!”
1137년 봄이다.
“네가 죄를 많이 짓고 살면 그날부터 인생에 액운이 마구 몰려 들어와! 그리고 그게 뭐 집 안에 처박혀 있는다고 피할 수 있는 건 줄 알아?!”
재산을 쌓아둔 창고에 불이 나고 자기 소유의 소를 풀어 키우던 벌판에 역병이 돌 것이다.
집을 세운 반석에 지진이 나 폭삭 무너질 것이요, 네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아프거나 죽거나 너를 배신해 옆에 있는 자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여기서 포기해. 네가 알 만한 이름들만 대 보자. 중앙대륙 사람⋯⋯. 어디 보자. 그래!”
노파는 한참 헤아려서 간신히 찾았다. 회귀한 중앙대륙 출신 영웅을 찾으려면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필로아 사람 헤라클레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장작더미에 올라 불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그보다 약간 뒷사람인 아이아스는 뭐에 잠깐 씌어 공동체가 다 같이 키우던 소 떼를 학살하고는 사회적으로 사망한 걸 깨닫고 칼로 자살했어.”
그녀는 지팡이를 붕붕 휘둘렀다.
“그놈들이 너보다 자제력이 모자라서 그런 선택을 한 건 줄 알아? 그저 너보다 많이 알았을 뿐이다! 거기에 라탄 제국의 오토 황제는⋯⋯.”
“아, 알았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두 손 두 발을 다 든 아리아드네는 황급히 사과했다. 그러나 양순해진 언사와 달리 항변 자체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죄업은 이미 지어버린 거잖아요. 선업으로 상계가 안 된다면서요. 그러면 전 이미 망한 거네요?”
“⋯⋯그건 그렇지. 네 팔에 빨간 자국은 죄업을 얼마나 지었는지 너 스스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계량기 같은 거야. 사실 팔뚝 절반을 다 덮은 거면 상당히 심한 거라고 봐야 해. 망했다고 볼 수 있지.”
“저기, 그럼 전 어차피 ‘심판의 날’이 다다르면 첨탑 위 같은 데서 뛰어내릴 텐데 선업을 쌓는 의미가 있나요?”
무어인 노파는 잠시 침묵했다.
“⋯⋯일단 넌 반쪽짜리잖니?”
“어감이 좀 반푼이 같아서 마음에 안 들지만 받아들일게요.”
“어딘가에 너한테 회귀의 비술을 건 놈이 있을 거야. 대가는 네가 받거나 그놈이 받거나 둘 중 하나인데, 네가 받는다고 봐야겠지?”
“왜죠?”
“뭘 아는 놈이니 너한테 회귀술을 걸지 않았겠느냐. 반반 나눠 거는 비술에 관해서는 그놈이 나보다 아는 게 많다고 보는 게 맞을 텐데, 좋은 건 다 너 몰아주고 자기는 대가만 끌어안고 침몰하는 거면 그놈이 너한테 주술을 안 걸었을 거 아니냐.”
“⋯⋯그도 그렇네요.”
“그렇지만 꿈과 희망을 좀 가져 봐.”
“꿈과 희망에 도움이 안 되시고 있어요.”
“떽끼!”
노파는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아리아드네는 피해냈다. 그녀는 똑같은 걸 두 번 당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붕 소리를 피해서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리아드네를 본 노파는 혀를 찼다.
“영악하기는⋯⋯. 어쨌거나 그놈을 찾아서, 죄업을 넘겨버릴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방법이 있다. 망했다고 손 놓고 있다간 정말로 망해.”
“그건 동감이에요.”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할머니였다.
“그럼 비술을 건 놈이 누군지⋯⋯.”
“기다려! 일단 설명부터 다 들어! 네 무식부터 정정해야겠어!”
무어인 노파도 실패한 시도를 두 번 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노파는 지팡이를 휘두르는 대신 아리아드네의 이마에 대놓고 딱밤을 먹였다.
“아야!”
이마를 가린 채 끙끙대는 아리아드네를 보고 할머니는 히죽 웃었다.
“멀대같이 키가 커서 맞출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딱 맞았구먼. 내가 아직 안 늙었어.”
“나빠요!”
노파는 이제 무기로서의 효용을 다한 지팡이로 바닥에 찍, 선을 그었다.
“‘심판의 날’을 넘어서 네가 자연스럽게 수명이 끝난 날까지 갔다고 치자.”
그녀는 바닥에 <1.>이라고 크게 무어 숫자를 적었다.
“‘눈 뜬 자들’은 우선 네가 그들이 위임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는지 볼 거다.”
“임무⋯⋯?”
“그래. 회귀하면서 뭐, ‘에트루스칸 왕국이 1132년에 멸망하지 않게 하겠습니다’라던가, ‘주군의 핏줄이 왕좌에 앉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약속 하고 돌아온 거 없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그런 사실 자체가 없어요.”
그녀는 회귀 당시의 기억을 다시금 뒤져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그런 거시적인 목표를 약속한 적은 전혀 없었다.
“전 그저⋯⋯. 복수를 하겠다고, 할 수 있다고 대답했을 뿐이에요.”
- 저지른 업보는 그 대가를 치르고 베푼 선행은 돌려받고. 그것이 황금률. 너는 할 수 있겠느냐?
노파는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그 양반들이 그런 걸 받아줬을 리가 없는데.”
무어인 할머니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조건은 언제나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이건 네가 이뤄야 하는 게 확실해. 비술 사용자한테 임무를 떠넘길 수는 없어. 그놈이 조건을 제시하고 ‘눈 뜬 자들’이 받아들였으되 그 조건이 뭔지 너한테 안 알렸을 수는 있겠지만.”
“⋯⋯꼭 달성해야 하나요?”
액운을 비술 사용자에게 넘겨버릴 수도 있다고 하니, 임무 실패의 대가도 비술 사용자에게 넘겨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떽끼!”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어인 노파의 지팡이가 이번에는 횡으로 날아왔다.
“으악!”
아리아드네는 뒤로 펄쩍 뛰었지만 허벅지를 한 대 맞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아오! 말로 하세요 말로!”
“무식쟁이는 입 다물어!”
노파는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했다.
인과가 어떠니, ‘스페키에스’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한참 했지만 결국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였다.
“임무 성공을 못 하면 제 영혼을 가져간다고요?!”
“그래. 윤회의 고리를 이탈하는 나쁜 경우지. 가져가서 갈아 태워버릴 거다.”
“악마 맞잖아! 아니 그리고, 영혼 같은 걸 태워서 어디다 써요?!”
순전한 악취미인가? 그래서 악마인가?
“낫 놓고 L자도 모르는 바보한테 고등한 설명을 해주려니 힘들어 죽겠구먼⋯⋯. 영혼은 이능의 재료야! 그 양반들이 뭐 천신쯤 되는 줄 아냐? 사람을 과거로 보내고 그러려면 그 사람들도 우주의 섭리에 바치는 대가가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아⋯⋯.”
넋이 나간 아리아드네를 앞에 두고 노파는 계속 투덜거렸다.
“아니, 목표달성을 시키고 싶으면 목표가 뭔지 알려는 줘야지. ‘눈 뜬 자들’쯤 됐으면서 뭐 이렇게 답 없는 짓을 한담?”
“목표 달성 못 하면 제 영혼이 산 채로 갈린다고요?”
“산 채로 갈릴지는 모르겠지만 갈리는 건 맞아. 목표가 뭔지 어떻게 알아내야 하지?”
아리아드네는 말을 꺼냈다.
“그게⋯⋯. 빛무리가 반응할 때가 있긴 있어요.”
“오?”
“특정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을 때 간혹 빛무리가 열성적으로 날뛰어요. 어느 한쪽을 확실하게 지지하는 것처럼요.”
체자레를 도와 갈리코 기사단을 퇴치할 때 그랬었다.
“잘됐네! 일단 그 말만 따라가면 되겠다!”
“근데 그게 항상 저한테 좋지는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빛무리가 반짝였을 때⋯⋯.”
아리아드네는 대충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결과적으로는 갈리코에 역병이 휘몰아쳐서 왼팔이 팔꿈치 아래로 핏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돼 버렸다고요!”
노파는 태연하게 답했다.
“그건 당연한 거야.”
“네?”
“네 이익과 ‘눈 뜬 자들’의 이익이 같지 않잖니? 네가 액운 범벅이 돼서 ‘심판의 날’ 전날에 독을 단번에 마시건 말건 ‘눈 뜬 자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어. 아니, 임무 달성 후에 죽어주면 목적도 이루고 영혼도 수거하니 일거양득이겠구먼.”
아리아드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뭐 그런 사람들이 다 있어?”
“남 욕하지 마라. 내가 저잣거리에서 얘기 들어보니 너도 똑같은 인간이더구먼.”
“⋯⋯예리하시네요.”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어인 할머니는 그것마저 꿰뚫어 봤는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툭 던졌다.
“내가 비슷한 동네에서 굴러먹다 와서 그래. 한눈에 보여. 착한 척하는 게 유효하지 않은 전략인 건 아니니 착한 척은 계속해라.”
“⋯⋯.”
할 말을 잃은 아리아드네를 앞에 세워 놓은 채 노파는 깔끔하게 정리했다.
1. 죄업은 이미 쌓을 대로 쌓았다. 덜 쌓는 건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고, 통째로 비술을 건 자에게 넘겨버릴 방법을 고민해 볼 것.
2. 임무 달성에 성공하지 못하면 이번 생에서 아리아드네의 목숨이 다하는 날 (‘심판의 날’이 아님에 주의) ‘눈 뜬 자들’에게 영혼을 뺏기게 된다. 갈아서 이능의 재료로 써버릴 테니 영원히 끝나는 것.
3. 임무 달성에 성공한다면 선업을 계량한 후 처우를 정한다. 선업이 부족하면 다시 윤회의 고리로 돌아가게 되고, 선업이 뛰어나게 많으면 ‘눈 뜬 자들’의 일원으로 높아질 기회를 부여받음.
“그러니까, 네가 ‘눈 뜬 자들’이 되고 싶거나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노파는 짜증을 냈다.
“무엄한 녀석 같으니. 일단 임무 완수는 하고 거기에 더해서 선업이 무지막지하게 많이 쌓여 있어야 선택권이 생기든지 말든지 하는 거라고.”
그녀는 ‘눈 뜬 자들’이 되고 싶어서 다섯 살부터 하루 온종일 정진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는 둥, 그게 얼마나 지고한 영광인데 제 맘대로 좋다 싫다 왈가왈부를 하냐는 둥 계속 투덜거렸다.
아리아드네는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데 마레 저택에⋯⋯. 아니, 저택 근처에 와서 사실 생각은 없으세요?”
신비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정치 조언자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일단 주변에 두는 게 무조건 이득이다.
하지만 노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디 묶이는 건 딱 질색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대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건 한 달에 한 번밖에 없어.”
노파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시간이 몹시 지나 있었다. 자정을 한참 넘어 새벽이 깊을 때였다.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다. 난 널 도와주기로 했어. 개인적인 이유야. 그렇지만 필요한 업을 다 채우고 나면 갈 거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요! 갈 땐 가시더라도 캄포 데 스페지아보다는 보카 델라 지아노가 더 살기 좋잖아요. 저 황금은 넘쳐나게 많아요.”
“그런 거 받으면 업이 되레 쌓여. 더는 사양이다.”
손주 놈이 깔끔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빨리 갚고 치워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아리아드네는 노파의 ‘개인적인 이유’라는 말에 주목했다.
“혹시. 손주 있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