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왼손 혈흔의 치료
아리아드네의 ‘손주’라는 말에, 무어인 노파는 신음을 흘렸다.
“더럽게 눈치 빠른 것⋯⋯.”
아리아드네가 살면서 무어인을 마주한 적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완전히 검은 피부의 무어인은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종종 볼 수 있어도 이 노파처럼 노르스름하게 가무잡잡한 무어인의 일족은 더더욱 희귀했다.
아리아드네는 빙그레 웃으며 손으로 자기 허리춤 정도 높이를 만들어 보였다.
“이 정도 키의. 남자애. 지금은 조금 더 컸으려나?”
“⋯⋯네가 이렇게 영악하니 암하라 놈이 콕 집어 널 회귀시킨 게로구나.”
노파는 마른 걸레에서 물도 짜낼 계집애라느니 류의,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아리아드네는 생긋 웃으며 제의했다.
“비술이 귀히 여겨지는 땅에서 오신 건 알겠어요. 실제로 대단한 힘인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말했다.
“손주분을 주술사로 키우고자 하셨으면 고향에 계속 계셨겠죠.”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여기는 에트루스칸 땅이에요. 손주한테 주술사 말고 다른 걸 시키고 싶으시니까 여기로 오신 거 아니에요?”
“끄응⋯⋯.”
노파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교육을 제공할게요. 왕국 최고의 가정교사분들을 초빙해 손주분께 에트루스칸 왕국에 녹아들 기회를 드릴게요.”
무어인 노파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세속의 황금은 헛된 것이야.”
하지만 노파의 말소리에는 아까 같은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가장 강대한 살만 무녀라고 할지라도 피붙이에게 자기가 제공할 수 없는 기회를 주겠다는데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결국 실토했다.
“너한테서 받는 게 있으면 업이 씻겨지질 않아. 난 너한테 무상으로 일정량의 도움을 줘야 한다고.”
아리아드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살다 살다 뭔가를 공짜로 받는 일도 있었다.
맨날 내가 안 저지른 일의 뒤처리나 하고 내 죄가 아닌 업보를 갚는 인생의 연속인 줄 알았더니만.
“그럼⋯⋯. 이건 어때요?”
공짜로 작게 먹는 것보다는 값을 치르고 크게 먹는 게 낫다. 아리아드네는 질척거리며 끝까지 달라붙어 보기로 했다.
“손주분을 학교에 보내세요.”
“학교?”
“네. 제가 세운 스쿠올라 디 그레타요. 어차피 읽기와 쓰기, 기초적인 셈법까지는 가정교사한테 배우나 학교에서 배우나 똑같아요. 재능이 보이면 그 이후에 고등교육을 더 받을지 등등은 그때 다시 논의하기로 해요.”
아리아드네는 눈을 반짝이며 노파를 설득했다.
“학교는 굳이 제가 보내드리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다 받아주는 곳이라고요. 황금률도 너그럽게 계량을 해 줄 걸요?”
“그래도⋯⋯.”
노파는 못내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쯤에서 약한 척을 해보기로 했다.
“너무하세요. 제 곁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녀는 왼팔을 들어 보이며 다소 연극적인 불쌍한 톤으로 한탄했다. 체자레가 자주 하던 짓이었다.
“이렇게 절대로 못 없애는 흉한 자국이 팔 전체에 퍼져 있으니 시집도 못 가고 혼자 늙어 죽을 텐데⋯⋯.”
노파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아리아드네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응? 그걸 왜 못 없애.”
“네?”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랐다. 불쌍한 척도 까먹을 만큼 놀랐다.
“이거 없앨 수 있어요?!”
노파는 그것도 몰랐냐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게 대가가 아니랬잖아. 그냥 단순히 네가 죄를 얼마나 지었느냐에 대한 중간 합산표 같은 거야.”
노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가가 아니니 당연히 건드릴 수 있지.”
아리아드네는 노파의 팔을 덥석 잡았다.
“해주세요!!!”
모르긴 몰라도 황금률도 팔의 피 얼룩을 지워 주는 걸 손주 학교 보내주는 것보다 덜한 일이라고 계량하진 않을 거다.
“네?! 제발요!!”
아리아드네의 열광적인 반응에 부담스러워진 노파는 살짝 한 발을 뺐다.
“아, 그게, 완전히 없애는 건 아니고 남의 눈에만 안 보이게 하는 건데⋯⋯.”
“충분해요!!”
아리아드네가 흥분해서 밀어붙이자 노파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 이게 재료도 준비를 해야 하고⋯⋯. 바로 뚝딱 되는 게 아니라 몇 번에 걸쳐서 차츰 흐려지는 거고⋯⋯.”
“내일 당장 시작할까요?!”
- 딱!
노파의 딱밤이 다시금 불을 뿜었다.
“무식한 것! 작업은 그믐밤에만 할 수 있어, 이것아!”
하지만 기쁜 아리아드네는 이마가 아픈 줄도 몰랐다.
“그럼 다음 그믐부터?!”
노파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러자.”
“와아!”
아리아드네는 기쁨의 춤이라도 출 태세였다.
“할머니! 내일 제가 당장 사람을 보낼게요! 손주분 내일부터 학교에 등록하면 되지요?”
“다음 그믐부터 하자, 다음 그믐부터.”
노파는 맨입으로 뭘 얻어먹는 데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뭘 줄 수 있게 된 다음에. 그다음에 학교에 보내자.”
“아이 참, 할머니도!”
아리아드네는 노파의 어깨를 툭 쳤다. 노파는 어이가 없어서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았다. 최강의 살만 무녀를 아주 그냥 동네 할머니 다루듯 하고 있었다.
“요 쪼끄만 것이!”
오늘 처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아이였지만 남 같지 않았다.
계속 이 여자애의 점을 쳐왔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 신세가 불쌍해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잘 맞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살만 무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요 맹랑한 것은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저보다 1 피에디는 작으시거든요?”
노파는 큰 소리로 대거리했다.
“늙어서 그래! 너도 늙어봐라!”
노파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아리아드네는 아마 늙어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파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나랑 함께라면 평온하게 끝까지 살 수 있을 게다.”
실력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이었다.
“손도 고쳐 보고, 그 암하라 놈도 잡아 보자.”
할머니의 호의와 자신감은 아리아드네에게도 전파된 것 같았다. 흑발 아가씨의 얼굴이 기쁨에 환하게 빛났다.
“네!”
몇 년 만에 보인 환한 웃음이었다.
* * *
“아리. 얼굴이 좋아 보여요.”
라파엘의 질문에 아리아드네는 빙긋 웃었다.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웃음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하지만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이 숨기는 것이 있는 미소를 완전히 다른 쪽으로 해석했다.
알폰소에게 무슨 연락이라도 온 것 아닌가 한 것이다.
“아리, 만약에요.”
그녀는 커다란 녹색 눈으로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1127년, 스무 살을 맞이한 아리아드네는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풍겼다. 그녀는 표정 때문인지 자기 나이보다 좀 더 성숙해 보였다.
훤칠한 키와 시원시원한 팔다리, 풍만한 몸매, 거기에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둥근 이마에서 반듯한 콧대로 떨어지는 라인은 어딜 보나 완숙한 여인이었다.
“⋯⋯만약에요.”
그는 최근,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볼 때마다 압도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커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져서 그런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는 용기를 그러모아야 했다.
“알폰소⋯⋯와도, 체자레 공작과도 깨끗하게 끝나게 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용기가 막판에 조금 부족했던 모양이다. 라파엘은 ‘알폰소를 아직도 사랑하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묻지 못했다.
아리아드네의 밝았던 미소가 조금 흐려졌다. 그녀는 괜스레 쾌활한 척 답했다.
“이미 깨끗하게 끝난 것 아니었어요?”
아리아드네의 말과 표정에서 라파엘은 그녀가 밝아 보였던 이유는 알폰소에게서 다른 연락이 와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잘 지내고 있던 아리아드네를 그가 후벼판 셈이다.
아리아드네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소문이 있더라고요. 이미⋯⋯ 혼인하셨다는 소문.”
라파엘은 그녀의 애처로운 표정에 뭔가 가슴 속이 욱, 불타올랐다.
그녀의 우울이 다 자기 잘못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만 다음 날이면 자신이 후회할 발언을 던져 버렸다.
“그 소문, 어떻게 믿어요?”
알폰소 왕자에게 혼약자가 아니라 부인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왕자의 결혼이 진짜라면 왕국 곳곳에 깃발을 게양하고 축포를 쏠 일이었다. 그런데 축포는커녕, 왕궁에서 나온 공식 발표조차 없었다.
만일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바로 공표하지 못한다손 쳐도, 왕자비가 외국에 있다면 최소한 그녀를 자국으로 데려오려는 움직임은 있어야 했다.
타국에 머무르는 왕자비는 인질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를 데려오려는 움직임 역시 일절 없었다.
그리고 라파엘은 소문이 가짜일 거라는 점에 대한 다른 근거도 가지고 있었다.
“아리. 알폰소는 애인을 두고 해외에서 연락도 없이 결혼해 버릴 놈이 아니에요.”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알폰소에게 제가 직접 물어보고 올게요.”
아리아드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크게 뜬 눈으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아는 알폰소는 그런 녀석이 아니에요.”
라파엘은 콱, 말을 잇지 못하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나만 믿어요.”
* * *
라파엘이 그렇게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데 마레 대저택을 떠난 다음 아리아드네는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잘 된다면? 사실 알폰소에게는 배우자가 없고, 계속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이제 왕국으로 돌아왔으니 그녀와의 미래를 도모하고자 하는 거라면?
아리아드네는 피식 웃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공주가 나오는 로맨스 소설쯤 되어야 저런 해피엔딩이 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알폰소가 보냈던 마지막 편지가 마음에 걸렸다.
‘부인이 있어서 나와 거리를 두고자 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이치에 맞았다.
‘굳이 편지까지 따로 보낸 걸 보니까 나를 의식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 와중에도 억지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됐다, 됐다, 잊자.’
라파엘이 알아봐 준다고 했다. 기다리면 답변이 올 것이고,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념을 지우기에 가장 좋은 것은 일이다. 아리아드네는 책상에 앉기에 앞서,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잠시 주세페와 대화를 나눈 그녀는 자기 서재로 돌아와 산차를 불렀다.
산차는 금방 서재로 들어와 아리아드네에게 인사했다.
“부르셨어요, 아가씨.”
밝게 웃는 산차에게 아리아드네는 한 가지 주문을 했다.
“산차, 앞으로 당분간 내 식사는 산차가 직접 챙겨줄 수 있어?”
아리아드네 아가씨, 아니, 데 마레 여백작은 사소한 일에 까탈스럽게 구는 편이 결코 아니다.
음식 맛 따위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산차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히 가능하지요. 무슨 일인가요, 아가씨.”
아리아드네는 폭탄선언을 했다.
“나에 대한 암살시도가 있는 것 같아.”
“네에에?”
기겁한 산차를 앞에 두고 아리아드네는 평이하게 툭, 던졌다.
“이폴리토 오빠를 파 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