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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86화 (286/733)

<제286화> 라파엘과 알폰소의 대면 (1)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끊어진 말고삐에 대해 이야기했다. 꼭 이폴리토라고 확신이 있는 건 아니니, 두루두루 살펴 달라고도 했다.

“아니 이 무슨!”

산차는 오랜만에 얼굴이 머리카락과 똑같은 홍당무 색이 될 정도로 분노했다.

“이 집안사람들 중에 아가씨 덕으로 먹고살지 않는 사람이 손꼽을 정도인데 감히!”

“주세페에게는 이미 마구간 쪽을 주시하라고 언질을 줬어.”

말고삐가 닳아 있었으니 마구간 담당 중 하나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직 잡은 게 아니니 산차에게도 부탁하는 거였다.

“산차는 부엌 쪽을 잘 봐줘.”

“부엌뿐입니까! 의상 담당이나 청소 담당이나⋯⋯. 아가씨 몸에 닿는 건 눈에 불을 켜고 제가 다 볼게요!”

“고마워.”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아리아드네가 이 시점에서 가장 의심하는 사람은 역시 이폴리토였다.

주세페에게도 이폴리토 도련님을 각별히 주시하라고 이미 말해놓은 상태다.

이폴리토는 아리아드네가 없어졌을 때 가장 이득을 많이 볼 사람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나름 온건하게, 아리아드네가 결혼을 하지 않고 이번 대의 집안을 지키되 이폴리토의 자식으로 대를 잇는 방안을 고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이폴리토의 입장에서는 크림 없는 마리토찌*나 다름없었다.

평생을 작위 하나 없는 한량으로 살아야 한다면 내 자식이 백작이 된들 무슨 소용인가!

아리아드네만 죽으면 그 백작위는 하나 남은 형제인 그에게 돌아올 것 아닌가. 이사벨라는 이미 집안에서 쫓겨난 데다가 출가외인이라 논외의 사람이었다.

‘아. 이사벨라.’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가 콘타리니 백작저에 있다는 사실에 거의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산탄젤로 수녀원에 확인해 보니 이사벨라는 바로 며칠 전에 신병을 인도받아갈 사람이 나타나 데려가 버렸다고 했다.

이사벨라는 집안에서 쫓겨나 의탁할 곳이 없는 아가씨라는 이유로 수녀원에 거주 중이었기 때문에, 누구든 데려갈 사람이 나타나면 나갈 수는 있었다.

그녀를 데려간 사람은 결혼할 남자라고 했다. 마차는 산 카를로를 향해 떠났다고 들었다.

‘⋯⋯아버지도 아시려나.’

이사벨라가 콘타리니 가의 오타비오를 물어 수녀원을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면 추기경은 뭐라고 할까.

딸이 자신의 지배를 벗어났다고 노여워할까? 아니면 그래도 자식이라도 안쓰럽고 기특하고 미안해할까?

이게 궁금하다는 것 자체가 아리아드네가 아버지의 정이 그립다는 증빙이었지만 아리아드네는 알아채지 못했다.

별로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궁금은 했지만, 답변을 듣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금 이폴리토에게로 되돌아갔다.

이폴리토의 뒤를 밟으면 이사벨라가 콘타리니 가문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폴리토가 이사벨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나서 그 치하를 받지 않으려 들 위인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생에게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하겠지.

‘이 가문이 이폴리토 오빠와 슬슬 이별을 고할 때도 됐어.’

이폴리토가 가문에서 쫓겨난다면 더는 아리아드네를 노릴 실익이 없을 것이다.

원한에 차서 그녀를 노릴 수야 있겠지만 집에서 쫓겨나면 집안에서 수작을 부릴 가능성마저 차단된다. 비교적 안전해지는 셈이다.

데 마레 추기경과의 관계도 재정립될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추기경에게는 단 하나 남은 후계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폴리토를 쫓아내는 일은 일석삼조,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물었다.

“타란토에서는 진전된 게 없다니?”

아리아드네는 이미 타란토에 사람을 파견해 루크레치아의 처녀 적 일을 샅샅이 캐 보라고 시켜둔 상태였다. 산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 그것이⋯⋯. 증언을 해줄 만한 사람을 특정까지는 했는데요.”

“그게 누구야?”

“죽은 ‘미스 로시’의 유모예요.”

“나이가 좀 있겠는데? 그 사람이 왜 자기가 키운 루크레치아에게 해가 될만한 증언을 할까?”

“로시 가문에서 대접을 형편없이 했답니다.”

평생을 헌신한 유모가 늙고 힘이 없어지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라고 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게다가⋯⋯. 유모의 자식이 지난겨울에 흑사병에 걸려 로시 가문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들여보내 주기는커녕 문전에서 내쫓겼다고 하더라고요. 전염병 환자를 거두진 못하더라도 치료약이나 돈으로 도와줄 수는 있잖아요.”

“자식은 어떻게 됐어?”

“죽었대요.”

아리아드네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증언을 해줄 만하네. 내막을 알고도 남을 사람이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 유모가 타란토 궁정에 의탁을 했답니다.”

“의탁?”

“정확히 말하면 타란토 공작가의 일을 도와주고 품삯을 받고 있는 거죠. 여름 별장에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뭐가 문제지? 사람을 들여보내서 전갈을 전하면 되지 않나? 말만 통하면 바로 협조가 가능할 거 같은데.”

“못 찾았대요. 부엌에 있는지, 침방에 있는지 알 도리가 없어요. 타란토 공작가의 여름 별장을 우리가 마음대로 뒤질 수는 없잖아요? 거기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수소문해보기는 했는데 딱 떨어지게 아는 사람이 없답니다.”

“타란토라⋯⋯.”

한 번쯤은 내려가 봐야 할 곳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소파에 기대앉아 소파 팔걸이에 손톱을 다그락다그락 부딪히며 생각에 빠졌다.

사교계에서 활동을 좀 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누군가는 타란토의 비앙카와 연줄이 있을 것이다.

* * *

라파엘은 팔라지오 카를로로 발을 들이면서부터 이미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몹시 어색했다.

이는 비단 요사이 평상복처럼 걸치고 다니는 거친 면 소재 옷 대신 귀족가의 후계자다운 매끄러운 공단 예복을 차려입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오늘 알폰소를 보러 오면서 왕자궁에 ‘알현’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야 했다.

예전의 라파엘은 어차피 거의 매일 알폰소와 얼굴을 봤기 때문에 몇 월 며칠에 놀러 가겠다고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하면 끝이었는데 말이다.

‘알폰소와 나 사이에 알현이라니.’

라파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알현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데에 그의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던 것은 덤이다.

‘도대체 왜 2주 반이나 걸린 거지?’

알폰소와 아리아드네 사이의 일들과 별개로, 알폰소와 라파엘은 어려서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알폰소가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라파엘은 알폰소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앙대륙을 떠나 바다를 건넜고, 태양빛을 볼 수 없음에도 터번을 감고 사막을 가로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파엘은 지난 4년간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옆에 붙어 있었으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고백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다. 고백할 만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매번, 언제나 알폰소를 위해 참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우정이나마 잃고 싶지 않았던 두려움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라파엘이 선을 넘지 않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맡기고 간, 친우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감안할 때 알폰소는 라파엘에게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오늘 라파엘은 아리를 대신해서 온 것이기도 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에게도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됐다.

설령 모종의 이유로 그들의 사랑이 끝나버렸다손 치더라도,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면대면으로 마주하고 정직하게 고할 의무가 있었다.

‘내가 권력이 좋아 너를 저버린 개새끼다’라는 스스로의 악덕에 대한 인정을 해야 할 의무 말이다.

‘설마 알폰소가 그렇게까지 나쁜 놈으로 변한 건 아닐 거야.’

라파엘은 애써 자신의 알현 신청이 알폰소에게 전달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알폰소가 라파엘의 편지를 보았으면 이렇게 오래 끌었을 리가 없었다.

그래, 아직 왕자궁 시종들이 오랜만에 돌아온 주군을 모시는 일로 재정비 중이라 오래 걸렸을 뿐이다.

그러나 마음속 한편에 불안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그의 오랜 친우는 얼마나 바뀐 것일까.

‘어느 정도 바뀌었을 수도 있어. 바뀌는 게 당연한 거기도 하고.’

그는 애써 서운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알폰소가 돌아오면서 산 카를로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간 레오 3세의 치세에 불만이 있던 자들이 알폰소 왕자의 귀환을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고 있었다.

라파엘 본인의 귀에까지는 들어오지 않고 있지만 필경 이미 움직이고 있는 자들도 있으리라.

알폰소는 더 이상 그의 친구이기만 했던 소년 왕자가 아니었다.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휘말릴 수 있는, 혹은 산 카를로 궁정의 모두를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으로 끌고 갈 태풍의 눈이다.

입장이 달라지면 태도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다. 라파엘은 그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 오셨습니다, 발데사르 소후작님.”

어느새 알폰소가 있는 곳 앞이었다. 라파엘을 인도한 시종은 알폰소의 응접실로 들어가는 두꺼운 마호가니 문을 천천히 밀었다.

- 끼익.

열린 문으로 라파엘은 정녕 오랜만에 알폰소를 만나러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크림색 휘장과 대를 이어 내려온 가구들이 보였다, 어려서 라파엘과 알폰소가 뒹굴며 뛰어놀던 곳이다.

라파엘은 갑자기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친구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일은 그의 이해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라파엘은 편안한 의상을 입고 의자에 걸터앉은 알폰소를 보자마자 반가움에 크게 인사했다.

“알폰소!”

그러나 그 인사에 답한 것은 알폰소 왕자가 아니라, 알폰소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끼어든 엘코 경이었다.

“발데사르! 어딜 감히 왕자 저하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거냐!”

라파엘이 엘코 경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더 비틀어진 모습이었다. 하는 말도 그렇고 자세나 옷차림도 그랬다.

엘코 경은 궁중 시종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궁중식 옷차림에 굳이 왕자의 군속이라는 것을 증빙하는 검은 투구가 그려진 푸른 완장을 차고 있었다.

“엘코.”

라파엘은 엘코 경의 몰골을 위에서 아래로 일별하더니,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마주 대답해주었다. 경칭의 생략에는 경칭의 생략으로 답하는 법이다.

“언제부터 네가 이렇게 나대게 된 거지?”

라파엘은 웃으며 한마디 더 을렀다.

“응? 엘코. 말해봐.”

*마리토찌(Maritozzi): 효모를 넣고 빵을 만든 뒤, 가운데를 반으로 갈라 크림을 잔뜩 넣은 빵.

크림은 생크림을 주이고, 레몬, 오렌지 껍질, 설탕절임 과일, 견과류 등을 이용해 향기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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