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라파엘과 알폰소의 대면 (2)
“나대고 있는 건 그쪽이야, 발데사르.”
엘코 경은 지지 않고 라파엘에게 마주 대거리했다.
“감히 여기에 나타날 생각을 하다니.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야. 너는 정말이지 말도 못 할 정도로 뻔뻔하군.”
라파엘은 인상을 찡그린 채 알폰소에게 물었다.
“알폰소, 저 닭대가리가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알폰소는 이 호전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알폰소가 엘코를 바로 말릴 거라고 생각했던 라파엘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적지않이 당황했다.
오늘 라파엘이 생각했던 상황은 이게 아니었다.
오늘은 마땅히 알폰소가 라파엘의 노고를 치하하고, 자신의 죄책에 대해 사과하고 또 해명하는 자리여야 했다.
알폰소의 죄책은 산처럼 많았다. 그간 연락하지 않은 것도, ‘부인’이 생겼다는 루머가 돌게 한 것도 다 알폰소가 사과하거나 아니면 해명해야 할 일이었다.
연락에 관해서는, 그래. 백번 양보해서, 전쟁터에 있는 동안엔 연락하기가 어려웠을 수 있었다.
부대는 이동하는 법이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동안에 편지를 쓰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랬으면 돌아온 뒤에라도 즉각 아리아드네에게, 아니, 그녀의 약혼과 파혼 때문에 그럴 감정이 들지 않았다면 최소한 라파엘에게라도 먼저 찾아왔어야 했다.
라파엘은 자기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아리아드네의 경우에는 체자레의 일이 꼬여 있었기 때문에 알폰소가 화났거나 서운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라파엘 본인은? 모두 알폰소를 위해 헌신했을 뿐이었다.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가른 것은 물론이요, 4년간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되는 여인 옆에 딱 붙어 있었으면서도 고백 한 번 하지 않았다.
다 알폰소가 아리아드네를 그에게 부탁하고 갔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오늘 알폰소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고, 그에게 아리아드네의 입장을 대변한 후, 마지막 통보를 할 작정이었다.
이제까진 너를 위해 선을 지켰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정정당당하게 겨루자. 양보하지 않겠다.
굳이 아리의 입장에서 그녀를 위한 변명을 해주기로 한 것은 사막의 편지에 대한 속죄였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라파엘로서는 속죄할 기회조차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알폰소는 분노와 반가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오늘 라파엘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나도 변하지 않은 친우의 모습에 순간 반가움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내 개선식 날 보았던 남녀의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분노로 속이 메슥거렸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아니 여인을 한쪽 팔에 끼고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가던 은발의 호리호리한 미청년.
그날 보았던 흑발의 여인은 알폰소가 기억하던 아리아드네보다 키가 상당히 컸다. 알폰소는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길.
지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의 전쟁터에서 다져진 알폰소의 안력으로는 그 정도 거리에서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었다.
그게 아리아드네일 경우라면 더더욱 그랬다. 몇 년을 꿈에서 오매불망 그렸는데 그런 그녀를 그가 못 알아볼 리가.
엘코 역시 자기도 발데사르와 ‘그분’을 보았다고 호언장담했다.
알폰소는 엘코와 아리아드네와 라파엘이 개선식에 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엘코의 주장일 뿐이다. 사실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혹여나 엘코도 잘못 보고, 자신도 잘못 봤던 상황이면 어쩌나.
그렇다. 그날 봤던 여인은 기억 속의 그녀보다 키가 컸다.
다른 사람이어야 했다.
알폰소는 희망을 찾아 자기 머릿속을 홀로 헤맸다.
아니면 반대로, 아리아드네‘라서’ 잘못 본 것 아닐까. 내가 그녀를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을 본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했던 흑발 여인의 실루엣은 기억 속의 그녀와 똑같았다.
그날 보았던 흑발 여인은 은발 미청년의 품 안에 약간 버겁게 안겨 인파를 헤치고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었다.
그 뒷모습이 아리아드네였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알폰소는 이를 악물었다. 베르나르디노 경과 만프레디 경만 중간에 껴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양쪽의 눈치를 살폈다.
알폰소의 침묵을 기회 삼아 엘코 경은 당당하게 외쳤다.
“감히 왕자님께 말 붙일 생각일랑 하지도 말게! 네 배신을 네가 알렷다!”
“배신?”
라파엘은 그제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알폰소로부터 고개를 돌려 엘코 경을 노려보았다.
“배애신? 그게 무슨 소리야.”
까득. 라파엘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봐, 자네 같은 평민들은 배신하려는 상대방을 위해 황금을 들고 바다를 건너나?”
‘평민’ 소리를 듣자마자 엘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라파엘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그때 그 돈은 그저 팔자만 고칠 정도의 금액이 아니라, 군자금이었다.
작은 나라의 한해 재정에 비견할만한 액수였다. 발데사르의 후계자라도 유혹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정도의 금화다.
“아니면 왕자의 이복형이 자기 약혼녀에게 무례한 짓을 할 때 검을 들고 그녀를 지키나? 도대체 언제부터 ‘배신’이 이런 상황에서 쓰이는 단어가 됐어?”
라파엘은 입꼬리를 올리며 엘코 경을 쳐다보았다.
“검을 못 드는 거지 문해력이 없어진 건 아니잖아?”
엘코 경은 시뻘게진 얼굴로 하나 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이 새끼가!”
하지만 라파엘은 도도하게 엘코 경을 무시했다. 태도에서 엘코 경은 자기와 말을 붙일 급이 아니라는 내심이 풀풀 풍겼다.
입을 다문 채 이 광경을 다 보고 있던 베르나르디노 경은 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라파엘⋯⋯! 이러니까 엘코가 어려서부터 널 싫어했지⋯⋯.’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말건 중요치 않았다. 라파엘은 다시금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알폰소, 저 새끼 왜 저래?”
오직 중요한 건 알폰소의 의견이었다. 엘코가 뭐라고 짖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런 라파엘의 입을 막은 것은 의외로, 알폰소의 말이 아닌 엘코 경의 일갈이었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너! 그래, 이복형의 약혼자라니 말 한번 잘했다! 데 마레 여백작의 일 말이다! 네가 진정 결백하다고 천신께 맹세할 수 있겠나!”
라파엘은 순간 얼어붙은 채 엘코 경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알폰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알폰소는 예리하게 잡아챘다.
“라파엘⋯⋯.”
얼어붙은 라파엘을 향해 알폰소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자.”
묻기 힘든 질문이었다. 만일 질문에 대한 답이 긍정이라면 그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물어야 했다. 알폰소는 뱃속에서 한 음절, 한 음절을 끌어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개선식 날 왕궁 앞에 나와 있던 거, 너였나?”
알폰소는 어렵사리 덧붙였다.
“⋯⋯아리아드네와?”
‘아리’라는 말이 도저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와 아리아드네 사이에서는 이미 그만큼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들은 라파엘의 얼굴에 비로소 이 상황을 이해하겠다는 기색이 나타났다.
그런데 동감하며 이해한다는 표정이 아니라, 머리로는 알겠는데 도저히 용납은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아, 그러셨어? 그게 문제셨어?”
“발데사르!”
뒤에서 파들파들 떨며 부르짖는 엘코 경의 목소리를 배경음악처럼 깐 채, 라파엘은 알폰소에게 이죽거렸다.
“우리 왕자님께서 그래서 화나셨어? 이거, 질투구나? 그래. 그날, 네 개선식에 나랑 아리랑 같이 갔었어.”
“라파엘⋯⋯!”
왕자의 청회색 눈에서 자제력으로 눌러놓았던 분노가 터졌다. 의심이 확신이 된 것도 문제였지만, 칭호조차 붙지 않은 ‘아리’라는 호칭에 눈이 돌 것만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저놈은 대체 언제 저렇게 좁혀 놓은 건가.
하지만 라파엘은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그래. 어려서부터 단짝 친구지만 못 믿고 질투를 할 수도 있지.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갈라가며 4년 동안 너에 대한 신의를 지켰는데 그으래도 못 믿고 질투할 수도 있지. 여자 문제잖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머리 제대로 돌아가는 사내새끼 없지. 이해해. 그럴 수 있어. 근데.”
라파엘의 붉은 눈이 새파란 분노로 타올랐다.
“질투도 할 자격이 있는 분이 하셔야지. 저는 부인이 있다면서, 뭐? 유부남이 질투? 언제부터 우리가 무어인 풍습을 따랐냐? 왜, 사막에서 오래 살더니 사막 사람처럼 삼처사첩 하시게?”
알폰소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라파엘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다 맞는 말이라서 더 미칠 거 같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 마음은 어떤 걸까. 아리에게 화가 난 건가, 아리를 보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저 미련일 뿐인가.
“알폰소! 넌 변명도 안 해?”
라파엘이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압박해왔다. 그러나 알폰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파엘은 언제나 순발력과 언변이 좋은 친구였지만 알폰소는 그 반대였다.
그의 장점은 약자에 대한 포용과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였지만, 공격받는 상황에서의 빠른 반격은 알폰소의 장점이 아니었다.
부대의 지휘관이자 부하들의 생명을 책임진 기사로서 공적인 장소에서는 밀리지 않고 이권 다툼을 하는 일에 익숙해졌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여전히 아니었다.
라파엘의 날 선 혀는 자제를 모르고 알폰소의 마음을 난도질하며 들어왔다.
“그래! 나 아리 좋아해! 아니, 사랑해!”
- 푹.
언젠가 가슴에 단도가 찍혔었을 때 이것과 비슷하게 아팠더랬다.
잠시, 아니 어쩌면 오래 두 눈을 감고 있다가 가만히 뜬 알폰소는 겨우 짧은 말을 건넸다.
“⋯⋯난. 널 친구라고 믿었었는데.”
인간적인 실망과 사랑의 아픔이 투박하게 집약된 한 문장이었다. 알폰소의 단정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라파엘의 입으로 직접 듣기 전에는 남들이 뭐라고 음해를 하건 믿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얼굴을 마주 보게 된 친구가 또랑또랑한 발음으로 그가 맡기고 갔던 자신의 사랑을 사랑한다 말한다.
엘코가 덧붙였던 각종 이야기—인파 속에서 라파엘과 아리아드네의 부적절한 스킨십이 있었다던가, 산 카를로 사교계에 데 마레 백작과 발데사르 가의 소후작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던가—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알폰소는 그런 저열한 이야기를 입에 담아 친구와 자신의 전 애인을 욕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할 말이 아주 많이 남은 표정이었다.
“허! 너 실망한 표정이다? 지금 실망할 사람이 누군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래?”
라파엘의 입장에서는 이제까지 자기가 했던 헌신이 모조리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순전히 알폰소를 위해 4년을 참았다.
이젠 아니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 아니었다.
“넌 4년이나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졌었어!”
라파엘은 알폰소가 4년 넘게 아리아드네에게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으니 아리아드네가 자신이 이미 알폰소와 헤어졌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어도 넌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알폰소는 이것이 자신이 물리적으로 아리아드네 옆에 없었던 것을 질타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알폰소는 정말이지 먼저 연락을 그만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이 왜 이렇게 꼬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아리아드네와 친밀한 사이라고 이렇게 다짜고짜 화를 내?”
라파엘은 분노를 터트렸다.
“황금을 갖다 줄 때는 잘만 받았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