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시린 봄밤의 꿈
금발의 남자는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봄의 정원이었지만 새벽 늦은 시간은 추웠다.
아리아드네가 찬바람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폰소는 입을 열었다.
“⋯⋯나 안 보고 싶었지.”
산만한 덩치에 기억보다 한층 더 굵어진 목소리로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뭐라고?”
추궁, 분노, 아리아드네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나. 안 보고 싶었느냐고.”
발음은 불분명했고 어투에선 투정으로 가장한 다정함이 묻어났다. 아리아드네는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너 취했어?”
“응.”
그녀는 헛웃음이 났다. 생각했던 재회가 전혀 아니었다.
4년 만에 만난 거였다. 형편없이 취해서 구겨진 몰골로 야밤에 그녀의 정원에 나타나다니.
그녀가 상상했던 모습은 예사크의 전쟁영웅이 그녀를 불러 근엄하게 그녀의 부정에 대한 추궁을 하는 거였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상상이라고 질타할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체자레와 함께했던 세월은 그녀에게 상흔을 남겼다.
아리아드네는 남녀관계에서는 티끌 같은 오점만 있어도 자기방어를 하는 데에 급급하고는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남녀관계에 있어서는 공과 과가 상계되지 않는다는 걸 거기서 배웠다.
그저 성별이 남자인 궁정 귀족과 차라도 마실라치면 눈을 부라리며 그자와 무슨 관계냐고 닦달하던 세월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대놓고 부정의 증거—공식적인 약혼과 파혼—가 만천하에 공표되어 있는데 기껏 하는 말이 ‘나 안 보고 싶었어’라니, 너무 하찮아서 웃음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아리아드네에게 기꺼운 만남 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고슴도치처럼 방어적이었지만 긍지는 드높았다.
왕자가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꽃가마에 태워 왕궁으로 데리고 들어갈 거리는 꽃밭 같은 상상을 한 적은 없었지만 아리아드네의 지난 세월은 결혼했다는 소문이 도는 왕자가 미혼 여자의 집에 몰래 숨어드는 걸 용인할 정도로 비굴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 취해서 날 찾아온 거야?”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에서 반가움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냉기에 알폰소는 고개를 들었다.
“그게⋯⋯.”
그는 취기와 애정이 사라지지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알폰소가 변명을 마칠 기회는 없었다.
반짝. 2층의 방 중 하나의 창문이 밝아졌다. 새카만 창문에 서 있던 아리아드네는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폴리토의 방이었다.
- 달칵.
창틀 고리를 여는 소리가 났다.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A! 떠나!”
그녀는 숨죽여 외쳤다. 부지불식간에 부르는 호칭도 바꾼 채였다.
왕자가 여기에 있는 걸 이폴리토에게 들키면 안 됐다. 수도 없이 복잡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외친 그녀는 이내 후회했다. 알폰소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후원의 출구까지는 200 피에디는 족히 되고도 남았다.
아무리 빨리 떠난다고 해도 출구까지 달리는 모습이 이폴리토의 눈에 들키지 않기는 어려웠다.
알폰소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2층 창문에 불이 켜진 걸 보자마자 처마의 그늘 아래로 뛰어들었다.
차라리 그 편이 실내에 있는 사람에게서 몸을 숨기기에 나았다.
‘어떻게든 숨겨놨다가 몰래 내보내야겠어⋯⋯!’
알폰소가 집 벽에 붙은 것을 확인한 아리아드네는 열쇠 꾸러미를 집어들고는 그대로 일 층으로 달음박질쳐서 내려갔다.
“헉, 헉!”
귀부인은 뛸 일이 없다.
집어드는 가장 무거운 물건이 펜대인 그녀는 고작 30여 피에디쯤 되는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을 달려 내려갔을 뿐인데도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일 층 부엌 쪽의 쪽문으로 달렸다.
여기가 알폰소가 뛰어든 처마에서 가장 가까운 출입구였다. 주방과 마구간은 아리아드네의 땅이다.
이폴리토나, 추기경의 측근은 여기에 드나들 일이 없고, 아리아드네의 사람이라면 알폰소가 그들의 눈에 띄더라도 입단속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쪽문으로 가는 작은 방 몇 개를 능숙하게 지났다. 눈감고도 거닐 수 있는 공간이었다.
쪽문이 있는 가장 작은 방에 도달해서는 방문에 달린 빗장을 채웠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지나가더라도 이 방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주의를 다한 그녀는 쪽문에 달린, 개와 고양이가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은 문을 열어젖혔다.
- 드르륵!
그리고 과연,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남자 부츠가 보였다.
데 마레 가문에서 사용하지 않는 가죽이었다. 알폰소가 틀림없다. 그녀는 숨죽여 속삭였다.
“바로 안쪽으로 들어와!”
아리아드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곧장 쪽문 전체를 열었다.
- 덜컹!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탑 같은 덩치를 가진 금발의 젊은이가 쏟아지듯이 무너져내렸다.
“⋯⋯!”
- 쿵!
- 풀썩.
쪽문이 반동으로 닫힌 것과 동시에 아리아드네는 작은 방에 쌓여 있던 지푸라기 더미 위에 쓰러졌고, 그녀 위로 알폰소가 쓰러졌다.
둘의 몸이 완전히 겹쳐졌다. 아리아드네의 귓가에 밀착한 알폰소의 두터운 입술 사이로 호두가 섞인 달큰한 술 냄새가 훅 풍겼다.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내 보았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폰소!”
곯아떨어진 것인지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미동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필사적으로 알폰소를 밀어내기 위해 끙끙댔다. 뒤쪽 쪽문이 닫혔을 뿐이지 잠겨 있지 않은 게 못내 불안했기 때문이다.
“윽!”
그녀가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알폰소를 밀어내다가 힘이 빠져서 그대로 뻗었을 때, 낮고 작은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로 있어.”
느리고, 나지막하고, 슬픔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그는 재차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까.”
체자레와의 약혼도, 라파엘과의 관계도, 답장이 오지 않은 편지들에 대해서도, 배신의 명명백백한 증거에 대해 캐물어야 했지만 묻지 않을 거였다.
물어보는 순간 그들은 더는 이렇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축 늘어졌던 알폰소의 손이 점차 위로 올라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약조가 무색하게 손등에 불거진 파란 핏줄이 박동했다.
그 커다란 손은 아주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아리아드네의 허리선을 타고 올라왔다.
아리아드네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의 따듯한 맨손은, 장갑을 꼈지만 차가운 그녀의 손을 찾아 깍지를 잡아 끼었다.
“잠시만 이대로 있자.”
그녀의 손을 찾아 꽉 잡은 그의 호흡이 고르게 가라앉았다.
어미를 찾은 아가처럼, 집을 찾아든 짐승처럼,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도달해 안심한 숨결이었다.
“⋯⋯.”
그녀 역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가만히 있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그들은 함께할 수가 없으니까.
아리아드네 역시 따질 말이 많았다. 넌 자리를 잡자마자 나를 잊었냐고.
내가 보낸 황금으로 예사크에서 무명(武名)을 날리더니 그 권력으로 결국 더 큰 권력을 줄 다른 여인을 찾아 떠나가 버렸냐고.
그리고 그 여인이 여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으니 즐기기 위해 취해서 나를 찾은 거냐고, 알폰소에게 비수를 꽂자면 수도 없이 꽂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사실 정원에 서 있는 알폰소를 발견한 순간 자기는 그를 추궁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널.’
창문을 열었을 땐 설마설마 했다. 그의 금발머리를 보았을 때까지도 설마 알폰소이려나 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에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게 알폰소가 맞구나. 내 알폰소가 내 얼굴을 보러 돌아왔구나.
그리고 미움과 원망보다 따듯함과 그리움이 먼저 밀려들어왔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내가 너를.’
사랑했나 봐.
처음엔 목적적으로 접근했었다. 회귀 후, 나를 왕비로 만들어 줄 남자라고 생각해서 순진한 그를 꾀어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올곧음에 반했다. 아라벨라의 죽음 앞에서 눈길을 뚫고 올라와 준 알폰소에게 흔들렸다.
갈리코 공작에 의해 그녀가 위험에 처하자 알폰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그녀를 구해냈다.
소년 왕자는 그녀를 구해낼 정치적 자산이 없었고 자연히 그에 따른 대가를 아주 비싸게 치러야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해냈다.
아마 돌아가신 왕비님의 캐비닛 안에 갇혀서, 그때 알폰소를 사랑하게 되었던 게 아닌가.
그를 사랑하는 대신 충직한 신하가 되겠다고, 죄를 지은 나는 당신 옆에 있을 수 없다고 충성의 맹세를 읊었지만 사실 그때부터 욕심을 냈던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일은 모두 다 과거가 되었다. 그 욕심은 한낱 욕심일 뿐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끝났다.
알폰소는 이제 남의 남자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알폰소의 다른 여자, 아니, 그의 유일한 여자의 존재를 아리아드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둘 사이에 공유되는 순간, 그는 돌아가야 한다.
부인이 있는 남자가 사적으로 미혼의 여인을 만나는 일이 흐르는 방향은 결국 하나뿐이니까.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그런 상황에 스스로를 처박을 만큼 멍청이는 아니니까.
그런데 그러면 알폰소의 얼굴을 더는 볼 수 없다.
‘하⋯⋯.’
그의 고른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마치 깊이 잠든 것만 같은 규칙적인 호흡이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시간이 멈춰서 이대로 박제되어 영영 멈추기를.
여기서 더 전진할 미래가 없는 관계니까,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런 터무니없는 소원은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 달각달각.
쪽문 바깥쪽으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걷는 소리가 났다. 신발의 두꺼운 밑창으로 후원 산책로에 깔린 조약돌을 밟는 소리였다.
아리아드네의 귀에 들렸을 정도라면 알폰소의 귀에도 들렸다. 그는 언제 취해서 쓰러졌었냐는 듯이 자세를 바로잡고 쪽문 쪽을 노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쪽문을 잠가야 할지 고민했다. 열쇠꾸러미는 그녀에게 있었지만 발소리의 주인은 이미 쪽문에 너무 가깝게 와 있었다.
꾸러미에서 맞는 열쇠를 찾아 구멍에 넣고 돌리는 시간이 모자랄지 모른다.
부엌 쪽으로 달아나자니 이제 슬슬 동이 트는 시간이라 잠 없는 하녀들이 돌아다닐 동선과 얼추 겹쳤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아리아드네 쪽을 스윽 바라본 알폰소는 허리에서 검집을 채운 장검을 풀어 쪽문에서 들어올 침입자를 대비했다.
- 달칵!
쪽문이 열리고, 알폰소의 장검이 타이밍 딱 맞춰 침입자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러나 그의 검집은 쪽문을 연 사람을 때리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허공에서 멈췄다.
“꺄악!”
왜냐하면 들어온 사람은 얼굴이 익숙한 빨강머리 하녀였기 때문이다.
“!”
아리아드네는 재빨리 빨강머리 하녀, 산차의 손목을 잡아당겨 자기 등 뒤에 숨겼다.
“아가씨, 지금 이게 무슨⋯⋯?!”
산차 역시 의외의 인물을 마주하게 돼서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쉿!”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진 나도 몰라.
다행히 산차는 자기가 알아야 할 일과 몰라도 될 일을 잘 구분했다. 상황에 대해 캐묻는 대신에 산차는 재빠르게 보고를 올렸다.
“아가씨,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아가씨께서 방에 안 계시길래 나와봤어요.”
그녀는 쪽문 바깥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이폴리토 도련님께서 후원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며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시길래. 도움 될 일이 없을 것 같아 소리는 앞쪽 정원에서 났다고 그쪽으로 유도하고 오는 길입니다.”
산차는 주인 대신 왕자를 바라보며 다부지게 말했다.
“저는 모르는 남자분이신데.”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산차가 알폰소 왕자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다.
그녀가 하는 말의 함의는 자명했다. 모르는 척해줄 테니.
“지금 떠나셔야 할 것 같아요.”
다시 오진 말아라.
산차는 실무적인 내용을 덧붙였다.
“곧 부엌 하녀며 정원사들이 돌아다닐 시간이라 지금 가시지 않으면 남들 눈에 띌 거에요. 정원 옆 작은 문으로 나가시면 밖으로 이어져요.”
알폰소가 익히 아는 길이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품을 더듬었다. 거기에는 없었다. 그는 재차 주머니 위를 더듬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구리로 만든 낡은 열쇠가 거기 들어 있었다.
예사크에서 군량과 바꾸기 위해 귀중품과 금붙이를 내놓을 때도 끝내 내놓지 않았던 열쇠였다.
지금 돌려주는 게 어느 모로 봐도 합당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서요, 왕자님.”
참을성을 잃은 빨강머리 하녀가 그를 재촉했다. 알폰소는 고개를 끄덕, 해 보였다.
그는 떠나기 전에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알폰소를 마주 바라보았다. 청회색 눈과 녹색 눈이 만났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 * *
무사히 데 마레 대저택의 경계를 빠져나온 알폰소는 기억 속의 그 쪽문 옆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제 백마를 보았다.
- 푸르르!
고삐 따위가 나무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은 천연덕스럽게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 네가 날 여기 데려온 거냐?”
- 투루루!
말은 자랑스럽게 앞발을 들며 투레질을 했다. 알폰소는 피식 웃으며 말의 목덜미를 툭 쳤다.
“너 임마.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일 아니야. 네 맘대로 하면 어떡해?”
하지만 말은 ‘몇 번을 와 봤는데 내가 이 길을 잊겠어’ 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예사크에서 타던 군마가 아니라 어려서 왕궁에서 타던 백마를 타고 나온 게 패착이었다.
말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팔라지오 카를로로 돌아가니 이미 왕궁의 조찬 시간이 다 되어있었다.
“왕자님!”
엘코 대신 알폰소의 일정관리를 맡게 된 디노 경이 허둥지둥 그를 찾아왔다.
“아니, 도대체 어디 가 계셨습니까!”
“⋯⋯구아티리에 후작저.”
“그 후에요! 왕자님 혼자 사라지셔서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귀족의 정원을 헤매다 왔다고 해 두지.”
디노 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잔소리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찾으셔요.”
“갑자기?”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혼인서약서에 관해 검토한 내용이 돌아온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