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이해할 수 없는 태도
“알폰소.”
왕자가 국왕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레오 3세는 애매하게 상냥한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에트루스칸의 유일한 태양을 뵙습니다, 폐하.”
“가족끼리 아침부터 무슨 예를 취하고 그래.”
국왕은 손을 휘둘러 알폰소가 무릎을 꿇으려는 것을 막았다.
왕자는 엘코 경을 대동한 채였다.
예사크에 있는 동안 서류업무는 모두 엘코 경이 봐 왔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왕자 본인보다 엘코 경에게 묻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국왕 역시 혼자가 아니었다. 법학자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국왕 뒤에 양피지 뭉치를 들고 공손하게 서 있었다.
그 외에도 국왕은 비서관인 델피아노사 경은 물론이고 내각 3인방—발데사르, 마르케즈, 콘타리니—를 모두 소집했다.
“이걸 한번 보려무나.”
국왕은 법학자에게서 건네받은 양피지 뭉치를 왕자에게 던졌다.
알폰소는 그 뭉치를 날렵하게 허공에서 잡아챘다. 국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양피지는 왕자가 라리에사 대공녀와 작성한 혼인서약서의 법적 효력에 대한 검토보고서였다. 알폰소는 내용을 쭉 훑고는, 결론 부분을 읽었다.
“효력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른다.”
왕자는 미간을 좁힌 채 법학자를 바라보았다. 안 써놓느니만 못한 결론을 대체 왜 써놓았느냐는 질타의 눈빛이었다.
“아. 설명 드리겠습니다!”
법학자는 얼른 일어섰다.
“혼인이란 양 당사자의 의사의 합치에 의한 쌍무계약으로 동시에 요식행위이기도 하고⋯⋯.”
그는 아주 오랫동안 길고 복잡하고 법률용어가 많이 들어가며 어려운 설명을 했다.
사람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그의 장광설을 끝까지 들어준 건 순전히 레오 3세가 그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학자의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알폰소 왕자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위해 딱 한 마디의 질문을 던졌다.
“요약하면?”
“그러니까⋯⋯.”
그는 혼인이 성립하려면 당사자의 이름, 혼인한다는 내용, 양당사자의 서명, 그리고 성직자의 주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왕자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직자가 현장에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혼인서약서는 원칙적으로 무효입니다. 약혼의 효력뿐이 없지요.”
법황의 특별허가가 필요한 이혼과 달리 파혼은 쉬웠다.
상대방에게 귀책사유가 있으면 일방적으로 해도 되었고, 그냥 마음이 바뀌어서 파혼하고 싶은 경우라도 상대방에게 충분한 손해배상만 해주면 가능했다.
분쟁이 있을 때 성황청의 종교법정이 아니라 국왕의 법정에 선다는 점도 파혼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장점이었다.
“문제는 예외조항입니다.”
법학자는 설명했다.
만약 상대방이 이 혼인계약서를 성황청 산하 성직자의 문서보관소에 맡겨 등록했다면, 거기에 있는 문서는 다 적법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성직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유효한 혼인계약서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였다.
알폰소가 물었다.
“성직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왔던 성직자를 불러서 물어보면 되는 거지만, 성직자가 없었다는 사실은 무슨 수로 증명하나?”
“역시 왕자님이십니다. 핵심을 딱 짚으셨어요.”
법학자는 짝, 박수를 쳤다.
“그래서 문제인 겁니다. 없었다는 증명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몽펠리에에 거주하는 모든 성직자의 24시간 알리바이를 제출받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알폰소는 생각에 잠겼다.
‘성황청 산하 성직자의 문서보관소’는 추기경 내지는 대주교급 교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수도원이나 동네 사제님도 설치 가능했다. 덕분에 각종 위조사건의 온상이 되었지만, 교회법은 교회법이었다. 공의회나 아니면 추기경 회의에서 바뀌기 전에는 불합리해도 지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혼인서약서를 발로아 대공가가 집에 잘 가지고 있으면 이 혼인은 무효입니다. 약혼일 뿐입니다. 약혼이라면 왕자님께서 원하시면 진행하셔도 되고, 원하지 않으시면 파혼하시면 그만이죠.”
어제까지만 해도 알폰소는 ‘어차피 할 결혼, 토 달지 말고 진행하시게.’라고 답했을 것이다.
방법은 틀렸지만 자기를 목숨을 걸고 좋아했고 또 자신 때문에 혼기를 놓쳐버린 불쌍한 여자였다.
책임지는 게 맞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책임지는 게 맞았는데⋯⋯.
놓고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따듯한 체온, 숨결에 따라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 달콤한 머스크와 젖은 흙냄새, 약간의 풀과 시트러스가 섞인 그녀의 체향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녀가 제아무리 잔악무도한 악녀에 탕녀라고 하더라도, 그 녹색 눈을 들여다볼 때는 모든 근심·걱정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시간이 겅중겅중 뛰어서 도망갔다.
왕자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법학자가 실용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다.
“파혼에 관해서라면⋯⋯. 작성 과정에 여러 가지⋯⋯. 음, 그렇습니다. ‘잡음’이 있었으니 별다른 손해배상 없이도 파혼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알폰소는 물었다.
“이제까지는 혼인서약서가 무효인 경우에 대한 설명이었고⋯⋯. 유효인 경우엔 어떻게 되는 건가?”
“만일 이 혼인서약서가 성황청 산하 성직자의 문서보관소에 들어가 있으면⋯⋯.”
법학자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간단합니다. 왕자님께서는 유부남이신 거죠. 이혼은 교리상 불가능하니, 혼인 생활의 실체가 아예 없었음을 들어 법황 성하의 혼인 취소 교지를 받으시는 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는 덧붙였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죠.”
알폰소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다만⋯⋯. 부부 사이의 정교 관계가 없었음을 증빙하는 게 혼인 취소 교지를 받을 때 가장 흔하게 쓰는 방법이고 왕자님께서는 대공녀님과 얼굴을 보지 못하신 지 3년이 넘으셨으니⋯⋯. 일단 요건이 성립은 하는군요. 요건 성립과 법황 성하께서 특별허가를 내어주시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지만요.”
이때 레오 3세가 법학자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알폰소야. 너는 이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레오 3세가 의뭉스럽게 물었다.
알폰소는 갑작스러운 부친의 태도 변화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대신 국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큼큼.”
그 눈빛에 되레 자기가 민망해진 마르케즈 백작이 나섰다. 그는 국왕 대신 국왕이 갑자기 저러는 이유를 전했다.
“사실 외드 대공 측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왕은 눈길을 피했고, 왕자의 시선은 대신 마르케즈 백작을 향했다. 내용을 촉구하는 눈빛이었다.
“왕자 저하의 승전과 귀환을 축하하고, 혼인 약속을 상기시키며, 트레베로 등 제3국에서 왕자님을 한번 만나뵙고자 하는 의사를 표명하였습니다.”
알폰소의 얼굴이 이번에는 대놓고 구겨졌다.
‘누구를 머저리로 아나.’
저번에 갈리코에 국빈방문했을 때 그 난리를 쳐 놓고 또 에트루스칸 왕국 밖에서 만나자니, 양심은 꿀이라도 바꿔 먹은 게 틀림 없었다.
“제3국이라지 않니.”
레오 3세가 짐짓 다정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알폰소가 갈리코에 가게 된 원흉이 하는 소리였다.
왕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고 분위기는 스산해졌다.
마르케즈는 수습을 위해 얼른 덧붙였다.
“저하. 국왕 폐하께서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꾸신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알폰소는 내키지 않았지만 마르케즈를 위해 장단을 맞춰 주었다.
“무슨?”
“우리 측 사람이 전해준 정보인데, 필리프 4세의 건강상태가 지금 상당히 안 좋답니다.”
오귀스트 공주의 사망 이후로 필리프 4세는 정신을 놓고 칩거에 들어갔다.
며칠 밤을 새워 울기도 했고 정신줄을 놓고 막무가내로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처럼 헛것을 보며 헛소리를 하는 일은 없었다.
이제 갈리코 내부에서는 슬슬 필리프 4세가 다시 권좌로 돌아와 정상적으로 왕권을 행사하는 게 불가능할 거라는 이야기가 대두되는 중이었다.
“미혼인 필리프 4세는 후계자가 없지요.”
엘코 경이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타비오의 눈이 빛났다.
오타비오는 오늘 회의에서 꼭 한마디는 하고 싶었다.
첫 회의 참석인데, 존재감을 뽐내지 못하면 영원히 그림자가 되어버릴거라는 조급증이 그를 안달나게 했다.
하지만 레오 3세와 알폰소 왕자가 주로 발언중이고, 그 외로는 전문가나 산전수전 다 겪은 외교 베테랑인 마르케즈 백작 정도가 발언권을 가지고 있으니 끼기가 어려웠다. 급이 안 맞는 것이다.
그러나 엘코는 달랐다. 그동안 끼지 못했던 젊은 콘타리니 백작, 오타비오는 엘코가 발언을 하자 자기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라리에사 대공녀는 왕위계승권이 없지 않습니까?”
오타비오는 위풍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여 발표했다.
“그녀의 아버지 외드 대공은 브리앙성을 버리고 발로아가 되면서, 목숨과 현재의 지위를 보장받았습니다.”
너무 떨려서 말소리도 부자연스럽게 빨랐고 손도 덜덜 떨렸다.
하지만 훌륭했어! 멋졌어! 왕자의 수하에 대한 완벽한 일침이야!
‘⋯⋯그런데 왜 다들 나를 저렇게 한심하게 쳐다보는 거지?’
마르케즈 백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해주었다.
“콘타리니 백작. 알폰소 왕자님께서는 이미 갈리코 왕좌에 대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
“갈리코 왕국의 공주셨던 모친, 고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 덕이지요. 알폰소 왕자 저하께서는 갈리코의 필리프 4세와 이종사촌 지간이십니다.”
오타비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연한 일인데 흥분해서 까먹고 있었다. 죽고 싶었다.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오타비오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인지 그 뒤로는 아무도 오타비오를 신경 쓰지 않았고 논의는 다음 차원으로 넘어갔다.
“왕자 저하. 외드 대공은 이름만 없다뿐이지 섭정공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갈리코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입니다.”
마르케즈 백작의 설명에, 레오 3세는 추임새를 넣었다.
“그 딸과 결혼하면 필리프가 죽고 난 뒤엔⋯⋯. 알지? 루이 왕자인지 뭔지는 이미 죽었으니까, 네 앞에는 아무도 없다.”
알폰소와 동률인 왕위계승권자는 몇 명 더 있었다.
하지만 갈리코 내부를 꽉 잡은 외드 대공이 적극적으로 지지만 해준다면 바로 옆에 붙은 왕국의 왕자이자 외드 대공의 사위인 알폰소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약이 문제가 아니었다. 갈리코 왕국을 통째로 먹어치울 수 있는 것이다!
“폐하.”
하지만 알폰소는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인생이 그렇게 생각한 대로 술술 풀리기만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번에 레오 3세가 꽃놀이패로 춤을 추고자 했을 때 알폰소는 갈리코 왕국에 끌려가서 죽을 뻔했다.
왕자는 감정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국왕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은 알폰소의 얼굴에서 존재하지 않는 짜증을 읽어냈다.
“외드 대공의 서신이 이상합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외드 대공은 알폰소 왕자에게 ‘당장 라리에사를 보낼 테니 라리에사가 이동하는 동안 결혼식 준비를 완료해 놓아라’ 비슷한 전갈을 보냈을 것이다.
라리에사는 알폰소보다 한 살 많았다. 즉, 그의 하나뿐인 딸은 혼기를 많이 넘겼다.
게다가 예비신랑 쪽은 중앙대륙에서 가장 주가를 올리는 전쟁영웅일뿐더러 하나뿐인 에트루스칸 왕국의 후계자였다.
추가로 잘생기고 성품 좋기로 유명하기도 하겠다, 예비신부 쪽에서는 일을 미룰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외드 대공은 라리에사를 바로 보내는 대신에 알폰소와 직접, 일대일로 먼저 만나고자 한다.
이건 사전 조율이 필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남에게 맡길 수 없을 만큼 보안이 중요한 내용의 비밀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건 결코 사양입니다. 평생 한 번이면 족해요.”
알폰소 왕자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레오 3세는 더는 강권하지 못하고 끄응, 앓는 소리만 냈다.
“외드 대공이 왜 저렇게 나오는지 좀 더 알아봐 주시지요.”
알폰소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혼인서약서가 성황청 산하 성직자의 문서보관소에 들어 있는지도 함께요.”
“그게⋯⋯. 궁정 귀족들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지만⋯⋯.”
“아버지.”
레오 3세는 퍼뜩 놀랐다.
“으, 응?”
“추가적인 첩보 없이 제가 외드 대공을 만나러 출국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폰소 왕자는 쐐기를 박았다. 레오 3세는 불만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가 이 정도로 마무리되고 알폰소 왕자는 먼저 떠났다.
왕자와 그의 수하가 방을 나가고 시종들이 왕자에게 예를 표하는 와중에, 오타비오는 알폰소의 추가 요구를 상기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왕자가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혼인에 적극적이라고 들었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건가⋯⋯?’
어차피 할 결혼이라면 혼인서약서가 무효인지 유효인지가 왜 궁금한 거지?
오타비오는 루비나에게 이 이야기를 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아오, 그 여자 진짜 짜증나!”
오타비오는 분통을 터트렸다.
“왜요, 왜요?”
마차 안에서 만삭의 이사벨라가 오타비오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는 입술을 부루퉁 앞으로 내민 채 투덜거렸다.
“우리 남편 속상하게 하는 사람은 용서 못 해.”
오타비오는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이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마누라였다.
“설사 그게 루비나 공작부인이래도 용서 못 해요.”
그렇지만 오타비오의 행복은 짧았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는 다시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 글쎄. 루비나 그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