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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94화 (294/733)

<제294화> 카멜리아의 결혼식

무어인 남자와 와 이사벨라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처음에 그를 원했던 것은 이사벨라였으되, 이사벨라를 발견한 무어인 남자는 놀랍도록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하늘의 별이나 인생의 목표라도 만난 것 같은, 강렬한 시선이었다.

이 상황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남편도 남편이었지만 일단 노예 상인이었다.

“부, 부인.”

그는 손짓·발짓을 하며 이사벨라의 관심을 여자 노예들에게 돌리려 애썼다.

“그게⋯⋯. 저 사람은 판매용이 아닙니다.”

이사벨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당신이 쓰려고 빼둔 거야?”

상인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런 소리 했다가 칼 맞으면 어떡하냐는 표정이었다.

“아뇨, 아뇨. 노예가 아닙니다. 중앙대륙까지 호위를 위해 고용한 칼잡이예요.”

상인은 갑판 위를 슬쩍 쳐다보았다.

“칼도 잘 쓰고 원래 자기 나라에서 높은 신분이었던 모양입니다. 저런 노예를 구매하시려면 가격이 어우⋯⋯. 1500 두카토 (약 15억 원) 도 너끈히 넘을 걸요?”

1500 두카토라는 말에 오타비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상인이 뭐라 뭐라 추가적인 설명을 하는 동안 무어인 남자는 갑판에서 저벅저벅 걸어 내려왔다.

부두로 이어진 널빤지는 경사가 심했지만 그는 마치 허공을 밟는 것처럼 일 점 흔들림이 없었다.

남자는 이사벨라의 코앞까지 와서 입을 열었다.

“나를 고용하겠나?”

진한 억양 때문에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완벽한 문법의 에트루스칸어였다.

이사벨라는 의외의 상황에 흥미롭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말도 하나요?”

“음.”

“어디서 배웠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사벨라도 딱히 대답이 꼭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위아래로 훑어본 무어인 남자의 외양은 몹시 만족스러웠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새카만 피부는 반질반질 윤이 났으며 눈코입 모양도 중앙대륙 사람과 다르게 이국적으로 생겼다.

이 사람에게 칼을 들려 호위로 데리고 다니면 온 수도 사람들이 다 그녀만 바라볼 것이다.

이사벨라는 오타비오에게 몸을 돌려 남편에게 졸랐다.

“여보, 노예는 아니지만 고용인은 하겠대! 응, 데려가면 안 돼요?”

어느 모로 보아도 수상한 남자였지만 오타비오는 한 번에 1500 두카토가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나머지 부분을 잘 고려하지 못했다.

“네 급료는 얼마지?”

오타비오의 반말에 무어인 남자의 인중이 실룩댔다. 그러나 그는 주먹질 대신 낮은 소리로 내뱉었다.

“중요치 않아. 한 달에 10이면 족해.”

“10 두카토⋯⋯?” (약 천만 원)

작은 돈이 결코 아니었다. 그걸 그렇게 편안하게 내뱉는 무어인 남자의 말에 오타비오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에 상인이 끼어들었다.

“이 사람은 원래 나라에서 왕족이었답니다!”

상인이 침을 튀기며 양념을 쳤다.

“그런 사람을 단돈 10 두카토에 고용하실 수 있으시면 아주 거저 얻으시는 겁니다!!”

확인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의 눈에서는 탐욕이 한 번 더 빛났다.

무어인 남자도 자기가 왕족이라는 상인의 호언장담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오타비오, 제발요?”

오타비오의 눈에서 동공지진이 났다.

하지만 상인과 이사벨라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콜 사인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오타비오마저 흔든 한마디가 있었다.

“10이 어려운가? 그렇다면 5만 받겠다.”

아. 반값은 못 참지.

그 와중에 이사벨라가 오타비오를 ‘이것도 안 사주면 넌 남자도 아니다’라는 눈길로 쏘아보았다. 오타비오는 엉겁결에 외쳤다.

“조, 좋아. 5 두카토!”

“꺄아!”

이사벨라가 환희에 찬 비명을 질렀다. 평소에 하던 대로 오타비오의 목에 팔을 감으려고 했지만 배가 튀어나와서 그러지는 못했다.

물주에 대한 예우로 펼치는 감격의 세리머니가 다 끝나고 나자 그녀는 그제야 남자에게 물었다.

“이름은?”

이제 고용주가 되었겠다, 곧장 던지는 하대였다. 하지만 남자는 불쾌한 기색 없이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아키-릴루.”

그가 태어난 땅의 말로, ‘신의 지팡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입술을 삐쭉거리더니 말했다.

“발음이 너무 어려워. ‘아고스토’ 어때?”

“아-고스토⋯⋯.”

전생과 똑같이 되었다.

* * *

“그게 그렇게 됐다.”

경악한 표정의 친구들에게 청첩장을 나눠주며 카멜리아는 선언했다.

“결혼식은 다음 주 토요일이야.”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했는지 그녀는 겸연쩍게 덧붙였다.

“너무 촉박한가?”

너무 촉박하다고 해 봤자 결혼식 날짜를 미룰 건 아니었지만. 친구 무리 중 유일한 경력자인 가브리엘레가 말했다.

“아니, 뭐 결혼식 준비야 되면 되는 거고. 빨리 해치울 수만 있으면 빨리하면 할수록 좋은 거긴 한데⋯⋯.”

가브리엘레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코르넬리아가 완성했다.

“신랑은 도대체 누구야?!”

모두의 궁금증이었다. 카멜리아와 오타비오의 파혼이 확정된 지는 한 달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선이야?”

“설마 원래 만나던 남자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니지?”

친구들의 질문세례에 카멜리아는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둘 다 아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음⋯⋯. 굳이 따지자면, 아리아드네가 소개해 준 거라고 해야 할까나. 아리아드네 덕에 만난 사람이야.”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검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팍을 가리켰다.

“내가?”

그런 짓이라고는 한 적이 없다.

자기한테 고백했던 남자를 남에게 소개시켜 주는 어마어마한 짓이라도 할 요량이 아니라면 아리아드네가 아는 미혼 남자라고는 이폴리토 정도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폴리토를 카멜리아에게 소개시켜주진 않았을 것이다.

“난 소개시켜 준 적이 없는데?”

아리아드네의 얼빠진 표정을 본 줄리아가 물었다.

“도대체 누군데?”

이제 슬슬 짜증이 날락말락 하고 있었다. 카멜리아도 더 숨기는 건 의미가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운을 띄웠다.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이기는 한데⋯⋯.”

친구들이 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말은 차마 못했지만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리네⋯⋯ 아버지?’

미혼남이긴 하지 않은가. 근데 그분이 결혼을 할 수가 있나?

친구들의 그 기색을 읽은 카멜리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카루소 비텔리!”

그게 누구야. 친구들은 그 이름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혼란에 빠졌다.

아리아드네만 한 박자 늦게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군지 깨달았다.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나올 이름이 도무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루소 대표 말이야? 보카네그로 상회의?”

보카네그로 상회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야 친구들이 알아들었다.

“그, 그, 이번에 흑사병 난리 거치면서 엄청 커진 상단 말이지?”

“그 상단 대표?”

“나이가 많아?”

“미혼인가?”

아리아드네는 커진 눈으로 카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카멜리아, 카루소 대표를 어디서 만났어?”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그분, 자식⋯⋯. 있는 건 알지?”

딸이라고 말하려다가 그건 대외비니까 얼버무렸다.

카루소 대표가 자식의 유무나 기존 혼인 경력 같은 걸로 사기를 칠 위인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한 달은 짧더라도 너무 짧았다.

악의 없이도 사정 설명을 다 못 할 수 있는 기간 아닌가.

“페트루⋯⋯. 아니, 피에트로 말하는 거지?”

카멜리아는 대답했다.

“알고 있어. 만나기는 아리아드네의 자택 정원에서 만났지.”

친구들의 어쩌다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참 좋아. 날 편안하게 해 주는 남자는 이 사람이 처음이야.”

그 뒤로는 왁자지껄했다. 축하한다는 이야기, 너무 잘됐다는 이야기 등등.

새 콘타리니 백작 오타비오가 아무도 몰래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사교계에 파다했던 만큼, 다들 카멜리아를 양껏 축하해 주었다.

카멜리아도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가 살았다. 사실 지금 결혼식 통보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카멜리아는 의기양양했다.

“그래, 사람이 좋으면 다 된 거지! 결혼생활은 그게 다야!”

가브리엘레가 되레 호들갑스럽게 카멜리아를 칭찬했다.

가브리엘레는 결혼 이후로 특히 더 작위와 가문도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었지만 굳이 경사를 앞둔 친구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초를 칠 정도로 눈치가 없거나 못돼먹지는 않았다.

“오타비오는 진짜 사람이 너무 신의가 없어. 잘 헤어진 거야, 잘 헤어진 거!”

의리와 믿음을 중요시하는 코르넬리아는 자기다운 덕담을 해 주었다. 줄리아도 한마디를 얹었다.

“나 그분 얼굴 아는데, 로맨스 그레이야. 나이답지 않게 잘생기셨어.”

역시 얼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리아였다. 아리아드네 역시 진심으로 축하를 건넬 수 있었다.

“책임감 있고 생활력 있는 사람이 남자다운 거라면 카루소 대표는 정말 남자 중의 남자야. 카멜리아, 남편감 잘 골랐어. 축하해.”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건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 ‘카루소 대표는 평민인데, 그와 결혼하면 너도 평민으로 떨어지는 건데, 괜찮겠니 카멜리아⋯⋯?’

카스틸리오네 남작가는 애초에 대귀족과의 통혼이 하고 싶어서 콘타리니 백작가와 그 후계자 오타비오에게 목을 맸던 거였다.

큰 금액의 돈도 빌려주었고, 말도 안 되는 기간의 결혼 유예도 불평 없이—아니 불평을 하긴 했지만 어쨌건—참아냈다.

그런데 카멜리아를 보내서 신분 상승은커녕 평민과의 통혼이라니, 카스틸리오네 남작과 카멜리아가 그걸 용납할 수 있을까?

눈치만 보는 친구들의 기색에 카멜리아가 꿋꿋이 대답했다.

“결혼식은 최고로 호화롭게 치를 거야.”

왕궁이 대관이 된다면 왕궁이라도 빌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카스틸리오네 남작이 마련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결혼식 장소는 타란토 공작이 수도에 가지고 있는 빈 저택이었다.

타란토 공녀를 아는 게 아니라 공녀 밑에서 업무를 보는 사용인과 오랜 거래관계가 있어서 대관료를 지불하고 빌릴 수 있게 된 거라고 했다.

“음식은 왕궁에 있다가 나온 요리사를 섭외했고, 예복도 콜레지오니에서 맞췄어.”

그 외에도 예물이며 하객에게 줄 답례품이며 초빙하는 악단 등의 목록을 들어보니 정말로 휘황찬란했다. 산 카를로의 최고 중 최고만을 엄선한 목록이었다.

요컨대, 카멜리아는 방향을 홱 전환한 것이었다. 갑자기 ‘남자는 가진 거나 외모보다는 마음씨가 중하지!’라고 생각을 고쳐먹은 게 아니었다.

대귀족과 결혼하고자 목을 맸지만 그게 불가능해지자, 그녀는 돈이 매우, 매우 많은 남자를 골랐다.

현재 산 카를로에서 영지나 가보 같은 걸 제외하고 현금이 가장 많은 남자는 카루소 대표였고, 두 번째로 많은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나이가 많고 자식이 있고 등등은 부차적인 고려사항에 불과했다. 남자가 선량하고 그녀만을 바라본다는 점은 플러스였다.

절대로 오타비오와 누군지 모를 그의 아내에게 꿀릴 수는 없다. 그것만이 카멜리아의 숙원이었다.

“이제 귀족 가문의 잔치는 아니니까, 나랑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사람들만 초대할 수 있게 되었어.”

그 말을 하는 카멜리아의 얼굴은 어딘가 주눅이 들어 보였다.

“그래도⋯⋯. 와주지 않을래?”

줄리아가 반걸음 앞으로 나와 카멜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중 신분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하고, 또 무리에서 자기와 아주 친한 편은 아닌 줄리아였기 때문에 카멜리아는 조금 긴장했다.

줄리아가 안 온다고 하면 여기 친구들 중 반은 안 올 텐데.

- 덥썩!

줄리아는 카멜리아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당연히 가지 이 바보야!”

카멜리아는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코를 쿨쩍거렸고, 나머지 친구들도 모여들어서 줄리아에게 껴안긴 상태인 카멜리아의 등을 때렸다.

“그걸 그렇게 비장하게 선언까지 해야 하냐?”

“우리에 대한 믿음이 하나도 없구만?”

“그냥 다 불러. 아는 사람 다 불러. 이 목록을 보고도 안 오면 자기들 손해야.”

정말로 황금이 흘러내리는 듯한 준비목록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거 준비하느라 진짜 돈 많이 들었겠다.”

“무슨 걱정이야? 카루소 대표가 남편이고 카스틸리오네 남작님이 아버지인데?”

“괜찮아.”

카멜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아빠나 그이까지 갈 것도 없이, 콘타리니 가문에서 돌려받아야 할 돈이 있어.”

그녀는 평이하게 말했다.

“약혼 해제로 인한 배상금도 있을 거고. 빌려준 돈의 이자도 있고.”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들렸지만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빌려준 지 기간이 오래 지나서 이자만 해도 이 결혼식 치르고도 남아.”

* * *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의 결혼식이 유례없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진다는 소문을 들은 이사벨라 데 마레, 아니, 이제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는 앙칼지게 내뱉었다.

“그런 큰 행사에 날 초대 안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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