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96화 (296/733)

<제296화> 파티 크래셔

베르나르디노 경은 조심스레 알폰소 왕자를 불렀다.

“저하.”

“음?”

“사소한 일이기는 한데⋯⋯.”

베르나르디노 경이 고한 내용은 잡혀 있던 알폰소 왕자와 데 마레 추기경 사이의 알현 인사 날짜에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트레베로에 위치한 성황청으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알현은 부득이하게 돌아오신 다음으로 미루셔야겠다고⋯⋯.”

디노 경은 왕자의 표정에서 ‘왜?’라는 질문을 읽었다.

“아직 대외비입니다만, 루도비코 법황이 위독하다는군요. 전 대륙의 추기경들이 트레베로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말이야 법황의 무사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위해 모이는 거라지만⋯⋯.”

“콘클라베 준비군.”

콘클라베는 선대 법황이 승하했을 때 추기경 전원이 모여 차기 법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였다.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으며, 만장일치로 차기 법황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될 때까지 감금된 상태로 하루 한 번씩 재차 투표했다.

“지금 세력 구도가 정확히 어떻게 되지?”

루도비코 법황은 아직 50대 중후반밖에 되지 않았다. 젊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노환으로 죽을 나이도 아니었고, 건강 체질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러니 자연히 법황이 내정한 후계자도 없었고 적극적으로 물밑작업중인 차기 주자도 없었다.

“루도비코 법황이 이끌던 신교파와 데 마레 추기경이 이끄는 구교파의 대립이 있습니다.”

머릿수가 많은 쪽이 차기 법황이다.

“에트루스칸 왕국과 살라만타 왕국, 그레도 왕국 쪽의 추기경들은 구교를 지지하는 편이지만 나머지는……. 전부 다 신교라고 봐야죠.”

“북부 연합은 보나 마나 신교겠고.”

“예, 갈리코가 그나마 부동표라고 볼 수 있었는데.”

“성전을 계기로 법황과 딱 유착했겠군.”

“정확하십니다.”

알폰소는 피식 웃었다. 어리둥절해진 베르나르디노 경은 반사적으로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며 앞니를 검사했다.

안 그래도 어제 왕궁의 귀부인에게 참 아름다우시다고 주접을 떨었는데도 반응이 없어서 마음이 아팠었다.

알고 보니 이빨 사이에 양상추가 끼어 있었어서 잠자리에 들어 이불을 차며 좌절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빨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웃으십니까, 왕자님?”

“아냐.”

그러나 알폰소는 이런 베르나르디노 경의 공포심도 모르고 말을 안 해주려 들었다.

“왕자님!”

디노 경의 재촉에야 알폰소는 입을 열었다.

“잘하면 데 마레 추기경의 숙원사업이 이뤄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

“네? 데 마레 추기경의 숙원사업이요?”

베르나르디노 경은 잠시 헤매더니 물었다.

“법황 선출?”

알폰소는 미소만 짓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갈리코가 법황과 끈끈해진 것은 어디까지나 법황이 살아 있는 동안이었다.

예사크 전쟁, 그러니까 성전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의 거래는 끝났다.

정확하게는 루도비코 법황이 자기가 받아먹을 것만 챙기고는 아직 갈리코 측에 대가를 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루도비코 법황은 공고한 후계자를 만들어놓지 않은 채 병석에 누웠다.

갈리코의 대가—그게 무엇이든지 간에—를 이어서 치를 다음 대가 없다는 뜻이다.

헤매던 디노 경이 재차 물었다.

“이게 왜 에트루스칸 측 추기경에게 유리하죠?”

“갈리코가 진정한 의미의 부동표가 되었을 테니까.”

루도비코 법황의 후계자가 없기 때문에 신교파 쪽에서 선출된 다음 대 법황은 갈리코 왕국에 보답을 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

자신은 받은 게 없기 때문이다. 갈리코 왕국이 성황청에서 뭔가를 받아내려면 새로운 빚을 지워야 하게 생겼다.

에트루스칸 왕국 차원에서 개입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러나 이제 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산 카를로에 앉아서는 더더욱.

이 사태를 미리 대비해두었다면 좋았겠지만 알폰소는 왕세자도 아닌 왕자에 불과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의 몫이다. 무능과 고약한 성품이 겹쳤다는 이중고가 있었어도 어쨌거나, 이 나라의 국왕은 레오 3세였다.

왕자는 그제야 물었다.

“그런데 법황은 갑자기 왜?”

‘법황’이 죽은 뒤의 논공행상이 루도비코란 사람이 왜 쓰러졌는지, 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슬플지, 망자는 삶을 잘 정리했는지보다 훨씬 중요하다.

높은 지위 특유의, 감내해야 할 어려움이었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답니다.”

알폰소의 표정이 굳었다. 베르나르디노 경이 바로 대답했다.

“예, 독살을 의심하고 있다고 하네요.”

“배후는 당연히 아직 못 찾았겠군.”

“예. 그런 일에 어디 속 시원한 배후가 나오는 법이 있습니까.”

알폰소는 이를 악물었다. 디노 경은 왕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했다.

필경 마르그리트 왕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서둘러 가벼운 주제를 골라 입에 담았다.

“그나저나 데 마레 추기경 예하는 쏠쏠한 용돈벌이를 놓치게 되셨군요.”

알폰소의 눈에 궁금함이 떠올랐다. 디노 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다.

“그 왜, 이번 주말에 있는 화제의 결혼식 있잖습니까.”

알폰소도 기억이 났다. 왕국 제일로 부유한 상인과 남작의 딸이지만 어쨌건 귀족 여식이 결혼한다고 해서 장안의 화제였다.

그 귀족 여식은 아리아드네의 친구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그 결혼식 주례를 데 마레 추기경께서 서기로 되어 있었다고 하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거마비가 한두 푼이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왕자는 문득 입에서 나오는 대로 던졌다.

“상인의 결혼식인데 인맥이 대단하군 그래.”

“상인의 인맥이 아니라, 신부 친구 인맥으로 주선한 자리라고 들었습니다.”

자기가 이 말이 듣고 싶어서 다 알면서 던진 말인 건 베르나르디노 경의 대답을 듣고서야 자각했다. 디노 경이 물었다.

“그분……도 오실 텐데 왕자님은 참석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베르나르디노 경은 라리에사와 엘코가 각자 개입한 이후 엉망으로 어그러진 알폰소와 아리아드네의 관계는 잘 몰랐다.

그는 다만 알폰소가 에트루스칸 왕국에 있었을 적 눈길을 뚫고 산 카를로로 올라갔던 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차 안에서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던 일들만을 알고 있었다.

알폰소는 미소를 지었다.

“거길 내가 어떻게 가나.”

며칠 전 구아티리에 후작의 만찬을 빠져나간 왕자가 어딜 갔다 왔는지도 전혀 모르는 베르나르디노 경은 왕자의 말을 반쪽만 알아들었다.

“아무래도 왕자 저하께서 상인의 결혼식에 가시기는 좀 그렇지요?”

그리고 생각했다.

‘뭐, 오늘만 날인가.’

조만간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파티가 있을 거였다.

수도에서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라고 했으니 오늘 결혼식장으로 사용된다는 타란토 공작가의 빈 저택은 한 번 더 손님맞이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왕궁일 수도 있고.

그 파티에는 수도에 사는 웬만한 사람은 모두 다 참석하게 될 거다. 될 인연이시면 그분도 오시겠지.

베르나르디노 경은 만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훨씬 더 공교로워질 것은 꿈에도 모르고.

* * *

“아니, 이사벨라. 여보야. 그래도 이건 좀…….”

“왜요? 우리가 어디 못 갈 데 가요?”

“아니, 일단 초대장도 못 받았고…….”

“초대장 따위, 내가 수도로 돌아온 걸 알았으면 카멜리아는 당연히 보냈을 거라고요!”

오타비오는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 아니, 오늘부터는 카멜리아 비텔 리가 되는 전 여자친구의 결혼식장에 쳐들어가려는 자신의 아내를 말리려고 시도는 했다.

“카멜리아가?”

오타비오가 보기엔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카멜리아는 이사벨라한테 약혼남을 뺏겼다.

아무리 옛날에 친했었다지만 오타비오는 남자를 뺏기고서도 우정이 유지되는 친구 사이는 듣도 보도 못했다.

카멜리아는 특히 질투가 심하고 손익계산에 민감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리 없었다.

“내가 아는 카멜리아라면 안 그럴 거 같은데.”

“뭐?”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카멜리아를 나보다 잘 아시나보다아.”

그녀의 어조에 비아냥이 담겼다.

“아아. 맞다. 난 그냥 친—구였지만 당신 카멜리아랑은 약혼자 사이였지 참? 몇 년이더라?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세상에, 팔 년? 팔녀어어언? 팔 년이나 사귀었으니깐 카멜리아를 제일 잘 아는 건 자기라는 거야?”

“이사벨라…….”

“팔 년이나 사귀었으면 했을 거 다 했겠네? 둘 사이에 뭔가 있었으면 확실히 가긴 좀 그렇겠다. 그렇지, 여보?”

“이사벨라아아…….”

“자기 혼전에 카멜리아랑도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 여보…….”

“건드렸구나? 나한테 했던 것처럼……! 흐흑, 흐흐흑…….”

“아니야, 아니야! 털끝 하나 안 건드렸어!”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하늘에 맹세코 안 했어!”

“나한테도 했잖아! 수녀원 면회실에서 다짜고짜 가터벨트부터 벗기더니…….”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여보.”

“다시는 안 한다고는 해놓고선 얼굴만 보면 또 훌러덩훌러덩……. 8년이나 사귀었으면 아주 그냥 마르고 닳도록 했겠어?”

“갈게!”

“걔 속옷도 다 외웠겠다?”

“카멜리아 결혼식 갈게! 가면 되잖아!”

“걔 이름 그렇게 부르지도 마!”

“그……. 그……. 뚱땡이 결혼식 갈게! 그러니까 그만 화내지 마, 울지도 마 여보. 응? 제발!”

오타비오의 반란은 이렇게 진압되고 그는 지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다.

타란토 공작가의 비어 있는 수도 저택으로 가는 길은 야속하게도 짧아 콘타리니 가의 마차는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저택 정문에 도착해 버렸다.

‘경비원이 검문하면 어쩌지?’

오타비오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초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인 계급의 잔치는 귀족 가문의 모임처럼 까다롭게 RSVP를 요구하지 않는 듯했다.

정문에서 손님맞이를 하는 인원은 카스틸리오네 가의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고급스러운 마차를 타고 결혼식 하객 같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오자 간단한 질문만을 던졌다.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셨습니까?”

그리고 오타비오의, 앙큼하다는 단어를 어느샌가 넘어서 무언가 어마어마한 것이 되어버린 듯한 아내는 마부가 대신 답해도 되는 일에 굳이 마차 창문을 내리고 확신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들어가십시오.”

- 덜커덩, 덜커덩!

떨고 있는 오타비오에게 그녀는 투덜거렸다.

“좀 전에 대화한 사람, 귀족가의 사용인이 아닌가 봐.”

오타비오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혼자서 자문자답했다.

“어떻게 내 얼굴을 모르지? 어이없네.”

이사벨라는 결심했다. 귀족의 클래스를 보여주겠다고.

추기경의 사생아로 사는 동안 원한에 맺혔던 사교계 예법이 하나 있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한다’는 규칙이었다.

이사벨라는 그간 무도회에 참석하면 체자레나 줄리아는 물론이요 코르넬리아며 펠리시테, 하다못해 카멜리아까지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백작부인이고, 카멜리아는 평민이다. 오늘 그에 대한 한을 풀 작정이었다.

“오늘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랑 신부의 새 출발을 마음에서부터 축하해 주십시오.”

마차에서 내리며 저택의 정원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들어가자 이사벨라의 눈에는 집사쯤 되어 보이는, 좀 높은 사람이 허리를 90도 각도로 꾸벅꾸벅 접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얼굴을 몰랐지만—카루소 대표가 아리아드네를 보러 데 마레 대저택에 처음 드나들기 시작했던 당시에 그는 연초 밀수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사벨라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오늘의 신랑, 카루소 대표였다.

이사벨라는 도도하게 걸어 카루소 대표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카루소 대표가 깜짝 놀라 배가 불뚝 나온 임산부, 이사벨라를 쳐다보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