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297화 (297/733)

<제297화> 청구서

오늘의 신랑, 카루소 대표는 부른 배를 붙들고 고개를 쳐든 채 그의 말에 대답도 안 하고 그를 스쳐 지나가는 임산부를 보고 당황했다.

신랑을 무시하는 결혼식 하객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 결혼에 이의 있소!’를 외칠 신부의 전 남자친구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가 임신한 여자분이면 어떤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도 그 가능성은 탈락이다.

주변 사람들도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인사하는 신랑은 아무래도 모든 관심의 중심일뿐더러, 이사벨라는 워낙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임신까지 했으니 더더욱.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손님들에게 인사하고 있던 카멜리아 역시 이 소란을 알아챘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사벨라!”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한달음에 달려와서 이사벨라의 앞을 막아섰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콜레지오니에서 맞춘 순백색 최고급 예복이 햇빛을 받아 화사하게 반짝였다. 이사벨라는 코웃음을 쳤다.

시간이 촉박해서 오늘 입을 드레스를 콜레지오니에서 맞출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살이 쪄서 밝은색 드레스를 입지는 못했지만, 애만 낳아 봐라.

나는 백작부인이다. 앞으로 내가 입을 드레스는 콜레지오니 미만은 단 한 벌도 없을 거다.

대답 없는 이사벨라에게 카멜리아는 재차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하지만 이사벨라는 분기탱천한 카멜리아에게 대답하는 대신, 뒤늦게 비척비척 따라온 오타비오의 팔짱을 꼈다.

카멜리아는 오타비오의 얼굴을 보고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카멜리아!”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뒤로 넘어가려고 하자 신랑, 카루소 대표가 달려와서 자신의 아내를 얼른 부축했다.

“너, 너⋯⋯!”

카멜리아는 부들부들 떨면서 이사벨라를 향해 손가락을 쳐들었다.

“너였냐⋯⋯!”

카멜리아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오타비오가 자신과의 결혼을 질질 끈 이유. 별다른 이유를 대지 않고 파혼한 이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던 이유.

카멜리아는 ‘언제부터였어’라고 울부짖으려다가, 여기는 자기의 결혼식장이고 자신의 새신랑이 본인의 팔을 붙든 채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이사벨라 데 마레. 내 결혼식장에서 나가 줄래?”

이사벨라는 ‘데 마레’라는 호칭에 약간 열이 받았지만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건 채, 카멜리아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사벨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지만, 카멜리아에게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타비오를 향해 말했다.

“오타비오, 역시 상인의 파티라서 그런지 손님 대접이며 에티켓이 형편없네요.”

뒷목을 잡는 카멜리아를 두고 오타비오가 눈치를 보며 답했다.

“으, 응?”

“어딜 남작가의 딸이 백작 부인한테 먼저 말을 거나요? 난 이런 사교계 파티는 듣도 보도 못했어요.”

이쯤 되니 잔치 분위기는 난장판이 났다. 하객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카멜리아와 이사벨라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 채 모여들었다.

- “귀족님네들 파티는 진짜로 안 이래?”

- “난 이 정도면 충분히 최고급 일류라고 생각했는데⋯⋯.”

- “왕궁 요리사가 내온 음식이라며. 신부 쪽은 남작가고.”

- “남작은 하급 귀족이잖아. 진짜 귀족들은 안 그럴 수도 있지⋯⋯.”

이 이야기를 듣는 카멜리아는 원통해서 귀에서 김이 날 것만 같았다.

“야!”

하지만 카멜리아가 아무리 먼저 말을 걸어 보았자 이사벨라는 철판이라도 두른 듯—면상에 깐 건 확실해 보였다—절대로 카멜리아가 거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임산부한테 소리를 지르다니 정말 교양 없어요. 그렇죠 오타비오?”

“그,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여보야가 카멜리아가 드세서 너무 힘들었다고 그랬잖아요. 내가 카멜리아가 얼마나 여자다운데 그럴 리가 없다고 그랬는데 오늘 보니까 여보야 말이 맞네.”

“내, 내가 그랬나?”

카루소 대표가 나서서 여기서 당장 나가라는 투로 외쳐 보았으나 남작가 딸의 말도 씹는 이사벨라가 한낱 상인의 말에 대꾸를 할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강제로 끌어내자니 임산부였다. 가히 무적 방패가 따로 없었다.

카멜리아가 혈압이 올라 쓰러지기 직전에 구원군이 나타났다. 줄리아 데 발데사르였다.

“이사벨라 데 마레!”

줄리아는 후작 영애였다. 제아무리 백작부인이 되었다손 치더라도 이사벨라는 줄리아에게는 대답을 해야 했다.

이사벨라는 그제야 못마땅한 표정으로 새초롬하게 답했다.

“레이디 줄리아.”

하지만 한 마디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콘타리니 백작부인이거든? 이사벨라 데 마레가 아니라. 그렇게 불러줘.”

“콘치즈건 디 멜란자네*건 상관없어. 도대체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줄리아는 소리를 질렀다. 이사벨라는 뒤로 휘청, 했다. 오타비오가 깜짝 놀라서 그녀를 부축했다.

“여보!”

소리를 지른 줄리아도 되레 함께 놀랐다. 입만 산 이사벨라가 오타비오에게 안긴 채로 짹짹거렸다.

“여긴 손님 대접이 형편없어. 축하해주러 온 손님이 유산이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아, 어지러워⋯⋯. 귀 아파⋯⋯.”

그러나 순 엄살이라고 치부하기도 뭐했던 것이, 확실히 만삭의 임산부치고는 너무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누군가가 의자를 가져다주었고, 이사벨라는 거기에 걸터앉았다.

“고마워요.”

이사벨라는 의자를 갖다준 사람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듯이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줄리아는 한숨을 쉬고는 이사벨라에게 말했다.

“이사벨라. 가증 그만 떨고 나가.”

이사벨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줄리아.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한쪽 편만 들지 말라고.”

“내가 아는 건, 넌 네 여동생 약혼자를 뺏으려다가 수녀원으로 끌려가서 갇혔고. 지금은 네 친구의 약혼자를 뺏은 주제에 그 친구의 결혼식에 와 있다는 사실 뿐이야. 네가 인간이니?”

주변이 술렁거렸다. 체자레 공작과 데 마레 백작, 그리고 그녀의 친언니의 이야기는 엄청나게 유명한 이야기라 전 산 카를로에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평민 중에는 이사벨라의 얼굴까지는 대부분 몰랐다. 오늘 드디어 그 유명한 사람의 얼굴을 영접한 것이다.

- “저 사람이 그 사람이야?”

- “근데 진짜 머리털 나고 처음 봤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예쁘긴 하네.”

- “배가 불렀는데 그럼 배속의 애는 누구 애예요?”

- “옆에 있는 남자 애겠지?”

-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야?”

- “몰러.”

하지만 이사벨라는 이사벨라였다.

“그럼. 인간이고 말고.”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줄리아에게 승리자의 미소를 날렸다.

“인간이 때 되면 해야 하는 일을 다 하고 있는데 내가 인간이지, 인간이 아니면 뭐겠니?”

이사벨라는 자신의 부른 배를 껴안고 의자에 기댄 채, 서 있는 줄리아를 위아래로 의기양양하게 훑었다.

“줄리아, 너도 나이가 꽤 되는데 약혼자 생겼단 얘기조차 없더라?”

줄리아에게도 몇 차례의 혼담이 들어왔으나 본인이 부모님께 강경하게 저항해서 그 혼담들을 모두 물리쳤다.

“사람이 때가 되면 결혼하고 자식을 봐야 어른이 되지.”

이사벨라의 미소가 야비해졌다.

“줄리아야. 예쁘고 좋은 때가 얼마나 갈 것 같아?”

이사벨라는 피식 웃었다.

“아. 뭐 예쁜 때는 취소.”

줄리아는 ‘저게 미쳤나!’라며 들이박으려다가—그녀는 좀 더 혈기방장한 라파엘의 친혈육이었다—카멜리아의 결혼식을 자기 때문에 망칠 수는 없어서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참았다.

임산부 방패를 정말이지 제대로 활용중인 이사벨라는 쉴 틈 없이 조잘거렸다.

“데려가 줄 남자를 찾지 못한 여자의 말로는 결국에는 수녀원이야.”

이사벨라는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끌려가기 전에 잘해야지, 줄리아야.”

“수녀원 얘기 한번 잘했다.”

낮고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뒤늦게 도착한 아리아드네였다.

“오랜만이네, 언니.”

이사벨라는 인상을 쓴 채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왜 안 나타나나 했다.”

“난 언니가 여기에 나타날 줄 몰랐고.”

“참 다들 내가 못 올 데 온 것처럼 군다.”

“못 올 데 온 것 맞으니까.”

“앞으로 자주 돌아다닐 거야. 난 이제 콘타리니 백작부인이니까.”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뒷말은 ‘날 버리고 널 선택한 아버지에게도 똑똑히 보여줄 거야.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거.’였지만, 씹어 삼켰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아리아드네에게 밀려 떨어져나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내가 갈 수 있는 곳, 갈 수 없는 곳 관리질 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 너야말로 데려갈 남자 없는 신세 아니니?”

이사벨라는 줄리아에게 해서 잘 먹혔던 공격을 재차 시도했다.

“난 네가 체자레 공작과 파혼할 줄 정말 몰랐어.”

다 지나간 이야기를 재차 꺼내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는 아리아드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네가 뭐 그렇게 고고하다고 그렇게 좋은 혼처를 갖다 버리니? 나 그분이랑 아무것도 안 했어. 정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이사벨라는 흘긋 오타비오의 눈치를 보았다.

오타비오가 별말 안 하는 것 같자 이사벨라는 더 해도 되겠다 싶었는지 한 보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그렇게 터무니없는 오해를 해서 제멋대로 파혼하고는 그 뒤로 이렇게나 시간이 오래 흘렀는데 여전히 혼자잖아? 너 어떡할래?”

이사벨라는 이제 숫제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여자한테는 모래시계가 흐른다고. 때를 놓치면 아기를 가질 수 없어. 아기라는 행복을 모르고 살 거니?”

자기 아기는 아직 배 속에 있었으니까 본인도 아기가 주는 행복이 뭔지 몰랐으면서 이사벨라는 되는 대로 던졌다.

“넌 가뜩이나 작위도 있잖아. 성격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게 말이야. 남자들은 잘난 여자 부담스러워 해. 굽힐 줄 모르면 시집 못 갈걸? 내가 친언니로서 정말로 널 아껴서 조언해 주는 거야. 통상적인 가족의 사랑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소중한 거라고.”

“⋯⋯통상적인 가족의 사랑이 소중하면 아버지한테 인사나 하지 그랬어?”

“뭐?”

“언니 산 카를로로 와서 아버지한테 인사 한 번도 안 했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밀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우겼다.

어차피 남들이 내밀한 집안 사정을 알 게 뭔가. 데 마레 추기경한테 가서 물어볼 것도 아니고.

“했어! 편지 보냈다고! 모르면서 끼어들지 마!”

“그럼 아버지에게 답장 못 받은 거야?”

이사벨라는 끝까지 아득바득 우겼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카멜리아의 결혼식에는 원래 아버지께서 주례를 서시기로 되어 있었어.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오셨을 뿐이야. 언니가 아버지와 연락이 되었으면 그걸 몰랐을 리가 없잖아.”

이사벨라가 어물거렸다.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답장을 못 받은 게 아니라 언니가 연락 안 한 거지?”

이사벨라의 귓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오타비오도 덩달아 당황했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연락 좀 드려. 사람의 도리를 설파할 거라면 우리, 사람 구실 좀 하고 살자.”

그리고 청명한 목소리 하나가 더 끼어들었다.

“잘 모르면 끼어들지 말라는 말은 정말로 맞는 말이지요.”

은발의 호리호리한 남자 하나가 또박또박 걸어와 아리아드네의 팔짱을 꼈다.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라파엘?”

“아리.”

그녀는 슬그머니 팔짱을 빼려 했지만, 남자는 놓아주지 않았다.

“제가 남자 일반을 대변할 자격은 없지만 전 개인적으로 못된 사람을 싫어할 뿐이지 잘난 여자를 부담스러워하진 않습니다.”

라파엘은 이사벨라의 뒤에 서 있는 오타비오를 일별했다.

“아, 못난 남자는 싫어합니다.”

지금 자신의 꼴이 어떤지 알고 있는 오타비오는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자기의 남자가 기에서 밀리는 꼴을 본 이사벨라가 분노했다.

“오타비오!”

하지만 이사벨라의 호통 한 마디로 바뀔 거였으면 애초에 밀리지도 않았다.

기에서는 오타비오와 이사벨라 두 명을 한 번에 상대하고도 거뜬한 라파엘은 씩 미소를 지으면서 그 둘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혼자 사는 것보다 더 불운한 건 누군가의 차선책에 불과한데 그럭저럭 눌러앉아서 행복하다고 자위하며 사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되새겨보게 하는 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간신히 라파엘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거절했는데도 남들 앞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팔을 잡는 건 부담스러웠다.

라파엘은 실례했다던가 미안하다는 공치사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팔을 문질렀다.

그렇지만 라파엘은 확실히 카멜리아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아리아드네와 라파엘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제정신을 차린 카멜리아가 눈물을 닦으며 다가왔다.

이번에 그녀는 말이 안 통하는 이사벨라를 타깃으로 하지 않았다.

“오타비오.”

신부 화장이 번져서 얼룩덜룩했다.

“내가 지금 우는 건 네가 그리워서 우는 게 결코 아니야.”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 결혼식을 망쳐서 열 받아서 우는 거야.”

확실히, 화날 만했다.

“너 왜 내 청구서에 답장 안 해.”

이사벨라가 드디어 카멜리아의 말에 반응했다.

“청구서⋯⋯? 무슨 청구서?”

하지만 이번에는 카멜리아가 이사벨라의 말을 무시했다.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 그 청구서는 찢어버려.”

오타비오의 얼굴이 밝아졌다.

‘봐 주는 건가?’

하지만 카멜리아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법률가와 상담해서 빌린 돈, 그 이자, 파혼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결혼식 비용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정신적 손해배상, 일체의 부대비용까지 싹 다시 계산해서 보낼 테니까 목 씻고 기다려.”

* 디 멜란자네

: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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