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모두가 고사하는 감투
“청구서? 나한테 그런 거 왔다는 얘기 대체 왜 안 했어?!”
깍듯하던 존대와 애교스럽던 말투는 온데간데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이사벨라는 오타비오에게 비명을 질렀다. 오타비오도 더는 못 참겠는지 언성을 높였다.
“내가 어디까지 너한테 맞춰줘야 해?”
오타비오 최초의 반란에 이사벨라는 뒷목을 잡고 넘어갔다.
“뭐?!”
오타비오는 다음 일격을 찌를까 말까 고민했다. 사실 그 빚은 다 이사벨라 때문에 진 빚 아닌가.
하지만 자기 애를 밴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모질지는 못했던 그는 결국 공격의 수위를 한 톤 낮췄다.
“내가 집안에 일어나는 일을 다 너한테 보고해야 하냐고! 가장은 나야!”
오타비오는 배려한 거지만 이런 말을 듣고서도 참을 이사벨라가 아니었다.
“네가 가장이면! 내가 밖에 나가서 이런 말을 안 듣게 해야지! 자기 여자 하나 보호 못 하는 네가 가장이야?!”
오타비오는 다시 한번 폭발했다.
“갈 곳 못 갈 곳 구분 못 하고 카멜리아 결혼식 같은 곳에나 가자며 나대니까 그딴 소리를 듣지!”
이사벨라는 발끈했다.
“뭐야! 그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네가 잘했다는 거냐?”
“어떻게 자기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이사벨라는 급기야 마차 안에서 흐느끼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대개 자기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사랑 하나 보고 오타비오를 선택했는데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얘기였다.
“배불러 수녀원에서 나갈 때 수녀원장이 날 어떤 눈으로 쳐다봤는지 알아?!”
그녀의 어머니, 루크레치아가 추기경에게 흔히 하던 술책이었다.
이런 짓을 난생처음 당해보는 오타비오는 긴가민가했다.
배가 불러 수녀원에서 나올 때 이사벨라는 분명히 좋아하지 않았나⋯⋯?
오타비오가 수녀원을 떠나는 이사벨라를 직접 본 건 아니니 그녀가 기뻐했던 건 그를 봐서였고 떠난 거 자체는 슬펐나⋯⋯?
“아악! 배 아파!”
이사벨라는 배를 껴안고 신음했다. 임산부 최후의 공격이었다. 오타비오도 여기에는 놀랐다.
“헉!”
“으흑⋯⋯. 아흑⋯⋯.”
“어떡하지? 뭘 해줄까?”
안절부절못하는 오타비오에게 이사벨라가 쏘아붙였다.
“돈이나 벌어와!”
* * *
집에서 그렇게 털린 오타비오는 팔라지오 카를로에 등청해서도 여자들 기 싸움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국왕 폐하라고 해서 여기서 자유로운 건 아니구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어도, 심지어 마누라가 없어도 이 사달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 남자라는 생물이었다.
“타란토 공작가 측에서 비앙카 공녀님의 샤프롱으로 절대로 루비나 공작부인만은 안 된다는 조건을 걸어서⋯⋯.”
발데사르 후작의 보고에 레오 3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는 또 왜 그런다고 하느냐.”
발데사르 후작은 국왕의 눈치만 살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유지만—정부라서 싫다—그렇다고 곧이곧대로 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수도에 있는 귀부인 중 할만한 분을 다 수소문해 보았으나 마땅한 분이 딱히 안 계십니다.”
“마땅한 사람이 왜 없어?”
레오 3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수도에 넘쳐나는 게 귀부인 아니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거기 마르케즈 백작의 부인도 예법에 밝기로 이름이 높고 발데사르 후작의 안사람도 현숙하고 아이들을 잘 키운 부인이지 않소?”
발데사르 후작과 마르케즈 백작이 동시에 움찔, 몸을 떨었다.
순발력 있게 제일 좋은 변명거리를 선점한 사람은 마르케즈 백작이었다.
“저희 안사람은 요새 건강이 좀 좋지 않아서⋯⋯.”
만능 핑계를 뺏긴 발데사르 후작은 눈에 안 띄게 마르케즈 백작을 흘겼다. 별 이유 없이 거절하려니 혓바닥이 길어졌다.
“제 부인은 담이 작은 사람이라 감히 그런 중책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타란토 공작가와 왕가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두렵습니다.”
진실은 이랬다. 그들은—자기 부인만 빼고—비앙카 공녀의 샤프롱을 맡아줄 귀부인을 찾아온 산 카를로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제의를 받은 귀부인들은 하나의 질문을 던진 후 일제히 손사래를 쳤다.
- “루비나 공작부인은 어쩌고요? 네? 하고 싶어하셨는데 타란토 공작가 쪽에서 고사했다고요?”
실제로 얼굴색이 새파래진 사람들도 있었다.
- “아휴, 안 돼요! 누굴 잡으려고!”
루비나는 현재 사교계의 왕이었다.
어차피 그녀와 마주칠 일이 없는 미혼 아가씨들은 상대적으로 그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지만 기혼 부인들은 루비나의 숨소리 하나, 턱짓 하나에도 영향을 받았다.
루비나가 허락하지 않으면 갈 수 있는 사교계 행사가 없었고, 이용할 수 있는 의상실이나 보석상이라고는 없었다.
수도의 큰손인 그녀의 눈에 밉보일 수 있는 상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 “저는 못 합니다,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이게 발데사르 후작이 지난주 내내 서른 명 넘는 귀부인들에게 들은 대답이었다.
“다른 사람이 진짜로 없어?”
발데사르 후작이 기가 질린 표정으로 고했다.
“수도는 물론이고 지금 수도에 계시지 않더라도 수도 사교계에 비앙카 공녀님을 소개해 줄 수 있는 분이라면 전부 다 여쭈어보았습니다. 백작위 이상의 유부녀라면 다 청해 본 것 같습니다.”
“참말로?”
“치보 후작부인, 몬테펠트로 노후작부인, 구아티에리 후작부인, 발조 백작부인, 아텐돌로 백작부인⋯⋯.”
목록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국왕이 물었다.
“치보 후작부인은 왜 거절했다고 하는가?”
“5월에는 수도를 떠나 있을 예정이라 일정상 어려우시다고⋯⋯.”
“몬테펠트로 후작부인은?”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시다고⋯⋯.”
“구아티에리 후작부인은?”
“아프실 예정이라고⋯⋯.”
핑계도 많았다. 발데사르 후작이 읊은 리스트 중에는 심지어 왕궁 난쟁이와의 추문 때문에 홍역을 치른 살바티 후작부인도 있었다.
이쯤 되니 레오 3세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국왕의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레오 3세는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타란토 공작가에 루비나랑 하라고 하면 안 되나?”
마르케즈 백작이 답했다.
“제가 두 번쯤 이미 이야기해 봤는데.”
깊은 한숨을 동반한 채였다.
“그러느니 그냥 타란토에서 데뷔탕트를 하고 마시겠답니다.”
레오 3세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비앙카는 중앙대륙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그리고 레오 3세는 부모가 없는 비앙카의 큰아버지이자 왕가의 웃어른으로서, 그녀의 혼사에 도장을 찍어줄 권한자였다.
비앙카 공녀가 산 카를로에서 최대한 성대하게 데뷔탕트 행사를 치러야 입소문이 퍼져서 다시 한번 대륙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가장 비싸게 비앙카를 팔아넘길 심산이었다. 레오 3세는 한탄했다.
“이놈도 저놈도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들고 짐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폐하.”
마르케즈 백작이 고했다.
“제가 생각을 해 보았는데, 차라리 왕족을 샤프롱이 아니라 후견인으로 세워서 비앙카 공녀님의 데뷔탕트 파티를 치르면 어떻겠습니까?”
짜증이 난 레오 3세가 빽 소리를 질렀다.
“왕가 가족이 루비나 말고는 없는데 비앙카가 싫다지 않나!”
“아니 아니, 제 말씀은 남자 가족 말입니다, 폐하.”
레오 3세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알폰소나 체자레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뒤에서 그림자처럼 앉아 있던 델피아노사 경이 최초로 입을 열었다.
“⋯⋯어. 그게⋯⋯. 그것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는데요⋯⋯.”
델피아노사 경은 알폰소 왕자를 어릴 때부터 보아 왔다.
샤프롱을 대체하는 후견인이라면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파티 준비를 자기 손으로 해야 했다.
“알폰소 왕자님께 데뷔탕트 파티 준비를 맡기면⋯⋯.”
그 뒤의 상상은 모두에게 어렵지 않았다.
메뉴는 흑돼지구이, 마실 것은 흑맥주로 통일, 장식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고 흙바닥에 텐트 치고 악사 대신 취한 기사들이 맥주잔을 포크로 두드리며 전쟁 나갔을 적 이교도 머리통으로 칼치오* 하던 얘기나 신나게 지껄이는 그런 파티, 아니 잔치가 될 것이다.
“⋯⋯체자레 공작님은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이번에는 하루종일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오타비오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체자레를 너무 잘 알았다.
“그게⋯⋯. 체자레 공작님은 아름다운 것과 기예에 능하시기는 한데요⋯⋯. 조금 너무 능하셔서⋯⋯.”
오타비오의 상상 속에는 체자레가 연 파티가 총천연색으로 펼쳐졌다.
멀쩡한 창문에 암막 커튼을 치고 새빨간 독주가 오가는 가운데, 둥근 테이블마다 입에서 입으로 체리 옮기기 게임 중이고 어린 비앙카 공녀는 오들오들 떨고 있으며 가장 예쁜 아가씨들, 아니 여성분들—왜냐하면 오타비오가 알던 체자레 공작은 유부녀라고 해서 딱히 사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앉은 테이블에는 체자레 공작이 착석해 있는⋯⋯.
레오 3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침음성을 냈다.
게다가 체자레 공작이 후견인이라면 어차피 루비나 공작부인이 샤프롱인 것과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레오 3세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 없나?”
“없는데요.”
발데사르 후작의 칼 같은 대답이 뒤를 이었다. 레오 3세는 발칵 성을 냈다.
“자네가 충분히 안 찾아봐서 그래!”
발데사르 후작은 솔직히 할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는 자신이 산 카를로에 있는 백작가 이상의 귀족가를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했음을 어필했다.
“그렇다고 공녀님 샤프롱을 남작부인으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레오 3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럼 이건 어떤가. 좀 젊은 여자로 하는 거야. 젊은 부인들한테는 안 물어봤을 거 아니야.”
“그건 맞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후보군이 확 늘어났다.
새로 백작부인이 된 이사벨라는 물론이요, 오타비오의 누이인 바톨리니 백작부인 클레멘테, 오단토니오 데 몬테펠트로 노후작의 며느리이자 남편이 아버지의 백작위를 물려받아 가지고 있는 아리아드네의 친구 가브리엘레 등이 모두 비앙카의 샤프롱이 될 수 있었다.
“그, 부인들한테만 물어보지 말고 작위 있는 여자나 그런 사람들도 빼놓지 말고 다 물어보게. 물어봤던 사람한테도 또 물어보고.”
“⋯⋯알겠습니다.”
“할만한 사람한텐 다 물어봐. 사람이건 오징어건 외국인이건 상관없어. 알겠나?”
“알아들었습니다.”
발데사르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리아드네는 발데사르 후작이 집에 방문하기 전에 먼저 보낸 공문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나한테까지 왔다고?”
산차가 물었다.
“그게 뭔데요?”
“타란토의 비앙카 공녀의 샤프롱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향서.”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간략하게 왜 이게 원래는 자기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걸 맡는 사람은 루비나 공작부인에게 완전히 찍히게 된단 소리네요?”
“그렇지.”
“안 하실 거죠, 아가씨?”
산차는 불길함을 느꼈다.
“⋯⋯왜 대답이 없으세요, 아가씨?”
“산차.”
“네?”
“우린 어차피 찍혔어.”
아리아드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비앙카 공녀에게 접근할 일생일대의 기회야. 한다. 이거.”
*칼치오(Calcio): 14세기 피렌체에서 즐겼던 공놀이. 일종의 중세식 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