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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00화 (300/733)

<제300화> 매끄러운 혓바닥

청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아리아드네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런, 관객이 안 계실 줄 알고 오늘은 푸른 심해의 심장을 안 걸고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전시하듯이 목에 걸치고 올 걸 그랬다.

하지만 그녀의 자태는 그것이 없더라도 압도적이었다.

정오의 햇살이 오찬장 입구에 선 그녀를 비추었고 청보라색 드레스에 올올히 박힌 금사와 은사의 자수가 휘황찬란한 광휘를 내뿜었다.

그것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루비나 측 귀부인 중 몇몇은 제 위치를 잊고 아리아드네의 드레스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크흠!”

루비나 공작부인이 언짢은 기색을 보이자, 빈 의자 하나를 가운데에 끼운 채 공작부인의 옆에 앉은 아마빛 머리의 귀부인이 큰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선동단장처럼 기강을 잡는 이 귀부인은 다름 아닌 터질 듯한 만삭의 배를 움켜쥐고 있는 콘타리니 백작부인, 이사벨라였다.

‘쟤는 어쩌다 저기에 앉아 있어?’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가 참 재주도 좋다고 생각했다.

루비나가 자기만큼이나 싫어할 상대가 이사벨라일 텐데.

루비나의 아들에게 대륙을 건너 떨쳐 울리는 난봉꾼의 위명을 하사했고, 피사노 영지에 틀어박히게 만든 장본인 아닌가.

그녀의 이복언니는 참 재주도 좋고, 비위도 좋았다.

* * *

이사벨라도 자신의 비위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돈 앞에선 못 할 짓이 없었다.

이사벨라가 루비나의 끄나풀이 되게 된 계기는 카멜리아의 청구서로 돌아가야 한다.

“이게 뭐야!”

하필이면 루비나 공작부인께 인사를 드리러 가게 된 날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의 청구서를 손에 쥔 이사벨라는 울부짖었다.

‘이번 달 말까지 전액 변제가 불가능할 시에는 왕궁 법정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문구가 적힌 청구서였다.

청구서의 말미에는 카스틸리오네 남작의 직인과 함께 법률가의 날인이 찍혀 있었다. 무섭게시리.

“신경 안 쓰게 해준다며!”

할 말이 없는 자의 대응은 틀에 박힌 듯 같은 법이다.

“왜 남의 편지를 마음대로 뜯어봐?!”

“이게 왜 남의 편지야?! 콘타리니 가 앞으로 온 편지잖아! 난 콘타리니 가 안주인이야!”

그러나 오타비오는 이사벨라와 말싸움을 하면 항상 본전도 못 건졌다.

“그나저나 1만 2천 두카토?! 이걸 이번 달 말까지 갚으라고? 이게 말이나 돼?”

오타비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사벨라의 말이 맞았다.

월말까지 1만 2천 두카토 변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변명조로 웅얼거렸다.

“애초에 원금은 8천 두카토밖에 안 됐다고⋯⋯.”

“나머지는?!”

8년간 복리로 붙은 이자와 이사벨라의 결혼식 깽판 값이다. 제 죄는 생각도 못 하고 이사벨라가 울부짖었다.

“고리대금업자들도 아니고!”

쉴 새 없이 화장대 앞에서 화장품을 찍어 바르면서 터트리는 분노였다.

오타비오는 방향은 틀렸지만 직관적인 마누라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실, 고리대금업은 콘타리니 가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타비오의 아버지, 그러니까 돌아가신 전대 콘타리니 백작은 예비 사돈댁에서 융통한 8천 두카토로 고리대금업을 했다.

물론 훌륭한 예삽교 신자가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포르토 공화국 출신의 레무교도 상인을 하나 대리인으로 내세워서 연이자 4할로 알차게 해 먹었다.

그럼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느냐? 당연히 카멜리아가 며느리로 들어올 줄 알았기 때문에 다 생활비와 품위유지비로 써 버렸다.

콘타리니 가는 애초에 풍족한 집안이 아니었다.

영지를 기반으로 하는 구귀족이기는 하되 비옥하거나 큰, 그렇다고 위치가 좋은 영토도 아니었기 때문에 매해 영지에서 나오는 가용 현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큰딸인 클레멘테도 부유한 바톨리니 노백작의 후처로 보내야 했던 것이고, 후계자인 오타비오의 배우자감도 고작 남작가의 딸로 고른 것이다.

그런데 철없는 오타비오는 자기에게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줄 알았다.

이제 그는 어른이 되어 피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저지른 짓의 뒷수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누라 입에서 간접적으로 자기 아버지 욕을 들으며 오타비오는 생각했다.

‘참자, 참자, 저 여자 배 속에는 내 자식이 있다.’

다행히 오타비오는 이사벨라의 패악질을 영원히 듣지는 않아도 됐다.

지금 이 둘에게는 루비나 공작부인 알현 약속이라는 제한시간이 걸려 있었다.

제아무리 이사벨라가 막 나가도 그렇지 루비나와의 약속을 파투낼 수는 없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오타비오는 이사벨라의 눈치를 보느라 그만 한 가지 사실을 깜박하고 말았다.

루비나 공작부인이 이사벨라 데 마레를 정말, 정말 싫어하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은 금세 현실이 되었다.

콘타리니 백작 부처가 루비나 공작 부인의 응접실로 들어서서 인사를 올리자마자 루비나 공작부인은 이사벨라에게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은 채 오타비오만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거는 기대는 ‘저거’보다는 컸어.”

문맥상 ‘저거’는 이사벨라였다.

이사벨라의 눈매가 대번에 샐쭉해졌지만 오타비오를 하늘이 도우사 예법상 이사벨라는 루비나에게 먼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끊이지 않고 오타비오만을 향해 쏟아부었다.

“소문은 들었네만, 정말로 ‘저거’야? 자네는 보는 눈이 그렇게나 없나?”

오타비오는 무심코 ‘그러게요.’라고 말할 뻔하다가 자신의 혓바닥을 씹어 넘겼다. 그는 루비나도 두려웠지만 이사벨라는 두 배로 두려웠다.

루비나는 언성 한끝 올리지 않고 계속 이사벨라를 우회적으로 두들겨댔다.

“자네가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어.”

오타비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습니까.”

이사벨라는 입술을 앙다문 채 남편의 구두 뒤축을 찼지만, 이미 오타비오가 인정을 해 버린 뒤였다. 루비나는 오타비오를 매섭게 훑었다.

“내 눈은 산 카를로 구석구석 안 미치는 곳이 없다네. 여자 하나 잘못 들여서 이게 무슨 짓인가.”

오타비오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루비나 공작부인의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부인은 팩 짜증을 냈다.

“내가 손님 있을 때 들어오지 말랬잖아!”

“아, 그것이⋯⋯. 공작부인께서 이 일은 무슨 일이 있어서 즉각 알리라고 하셔서⋯⋯.”

시녀는 공작부인에게 귀엣말을 했다. 루비나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고, 오타비오와 이사벨라는 긴장한 채 그녀를 주시했다.

루비나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는 이사벨라에게 짓씹듯이 내뱉었다.

“피는 못 속이지.”

이사벨라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예쁜 눈만 깜박였다. 루비나는 마저 말했다.

“네 여동생이 비앙카 공녀의 샤프롱 자리를 수락했단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이글거리는 눈은 이사벨라를 잡아먹을 듯했다.

“어쩜 자매가 이렇게 쌍으로 앞뒤를 모르고 나대지? 가정교육을 미친 여자한테 받았나?”

계속 낮게 깔리던 루비나 공작부인의 음성에 드디어 짜증이 들어가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때, 그와 명징하게 대비되는 꿀 떨어지는 예쁜 목소리가 답했다.

“공작부인, 아니, 마마.”

이사벨라가 여자마저도 홀리는 마성의 눈웃음을 지으며 루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엄마 욕에도 아랑곳없는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루비나의 험한 말을 들은 대가로, 백작부인인 이사벨라는 공작부인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루비나와 대화할 자격이 생긴 상태였다.

“저는 제 동생처럼 처신을 잘못하지 않아요. 저한테 온 비앙카 공녀님의 샤프롱 제의는 당연히 거절했는걸요.”

루비나는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그건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그걸로 생색을 내?”

하지만 이사벨라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받아쳤다.

“아이, 제 동생은 정말로 험한 아이랍니다. 제 분수를 몰라요.”

루비나는 이사벨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분수’라니. 분수를 모르는 게 누군데.

네가 체자레에게 한 짓이 있는데 너도 좀 찔려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알아들은 게 틀림없는데도 얼굴에 철판을 깐 듯 방글방글 웃으며 루비나를 쳐다보았다.

이사벨라가 꺼낸 바로 다음 말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필시 오타비오를 옆에 세워둔 채 ‘내 아들 체자레 앞에서 궁둥이를 흔든 년이 할 말이 아니다’라고 일갈했을 것이다.

“루비나 공작부인, 부인께서는 공작부인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왕비의 자리에 오르셔야 할 분입니다.”

‘요것 봐라?’

“왕실 가족들에게 온전히 그 일원으로 인정받으시는 게 그 첫걸음입니다. 타란토 공작가가 지금처럼 나오는 건 국왕 폐하의 짝이신 공작부인을 인정하지 않는 참으로 무도한 짓입니다!”

이사벨라는 짐짓 정의감에 불타는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비앙카 공녀는 좋든 싫든 루비나 공작부인을 샤프롱으로 맞이해야 할 거예요.”

루비나는 내심 혹했지만 겉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무슨 수로?”

이사벨라는 그 특유의 매혹적인 눈웃음을 쳤다. 거기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제 동생은 제가 가장 잘 안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루비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필시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저렇게 나오는 것이다. 그녀는 상제를 앞으로 기울였다.

“자세히 말해 봐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공작부인은 좀 더 편하게,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사벨라는 그 예쁜 입을 열어 조잘조잘 자기의 계책을 루비나의 귀에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루비나는 산속의 왕 호랑이같이, 기세와 추진력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으되 옆에 똘똘한 책사가 없어서 손해를 보는 타입이었다.

콘타리니 노백작 생전에는 그가 그 역할을 해주었었는데 그 아들은 영 맹탕이었다.

괜히 발탁했다고 후회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밉상이던 그 마누라가 꾀주머니라니?

이사벨라의 계책을 다 들은 루비나 공작부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가가 콘타리니 백작가를 ‘왕궁 법정’에 고소한다지? 왕국 법정의 법관을 정하시는 건 국왕 폐하야. 네가 이 일을 성사시킨다면 너희가 원하는 귀족으로 법관이 지정되도록 내 힘을 써 보마.”

오타비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콘타리니 가문은 안전하기 짝이 없는 고리대금업을 굴리고 있었기 때문에 원금은 거의 대부분 보존을 하고 있었다.

다만 4000 두카토의 이자를 갚을 길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원금이야 오타비오 본인이 법관으로 앉더라도 안 갚을 도리가 없지마는 이자는 법관이 편파적으로 판정을 내리면 한 푼도 안 갚고 빠져나갈 수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그는 본능적으로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여보! 오늘 우리 집의 가장은 자기야! 잘한다! 힘내!

* * *

이런 사정으로 루비나의 친위대가 되어버린 이사벨라의 기강 잡기에 오찬장에 모인 귀부인들은 제정신을 차렸다.

아리아드네의 존재감에 넋이 나갔던 그들은 정신줄을 재차 붙들고 몸 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그리고 언제 아리아드네가 들어왔냐는 양 자기들끼리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마치 사전에 약속되었던 것만 같은 움직임이었다.

‘오호라, 이렇게 나오시겠다.’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치졸한 수였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아리아드네를 빠르게 타격했고, 또 고립시킨 채 공격했다.

‘기습을 당하니 역시 좀 불리하네.’

아리아드네는 좌석 배치를 둘러보았다.

삼십 명은 넘고 사십 명은 안 되는 귀부인들이 둥글게 둘러앉은 긴 타원형 테이블이었는데, 이 식탁 전체에는 빈자리가 고작 세 개뿐이었다.

‘아는 얼굴은 그럭저럭 있지만⋯⋯. 친하다고 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최악의 구조다. 아는 얼굴이라고 하면 무도회에서 오다가다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는 사람 정도였다.

딱 수치를 당하면 빠르게 소문은 나겠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의 인적 구성이다.

친분으로 옆자리를 내주길 부탁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쯧.’

아리아드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부탁을 하게 되면 같이 왕따를 당하자고 부탁하게 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자리는 혼자서 헤쳐나가는 게 맞다.

그녀는 자리 배치를 면밀히 관찰했다.

빈자리는 세 개였는데, 하나는 백작부인과 후작부인 사이, 하나는 후작부인들 사이, 마지막 하나는 루비나 공작부인과 이사벨라 사이의 빈자리였다.

‘⋯⋯이건 심리 게임이잖아.’

아리아드네는 이 구도가 어딘가 몹시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생의 이사벨라가 즐겨 사용하던 수였다.

후작부인과 후작부인 사이의 자리는 기초적인 함정이다. 아리아드네는 백작이기 때문에, 저 두 명 중 누구에게도 말을 붙일 수 없다.

그냥 앉아버린다면 초대 없이 무단으로 자리를 차지해 버린 무뢰배가 된다. 예의범절을 모른다고 두고두고 씹히기 딱이다. 각하(却下).

백작부인과 후작부인 사이의 자리가 언뜻 보면 정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기 앉은 후작부인이 루비나 공작부인과 상당히 친한, 구아티에리 후작부인이라는 점이 함정이었다.

아리아드네가 구아티에리 후작부인 근처의 바톨리니 백작부인—이 사람도 전생 체자레의 상간녀 중 하나로, 최대한 점잖게 말해 별로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다—에게 ‘혹시 옆자리가 비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구아티에리 후작부인이 대신 ‘아뇨,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서요.’라고 대답해 자리에 못 앉게 할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이사벨라는 그렇게 쫓겨난 사람이 얼굴이 빨개져 자리를 못 찾고 우왕좌왕하는 꼴을 친구들과 함께 팔짱 낀 채로 비웃고 즐겼다.

‘그럼 정답은 루비나 공작부인 옆자리지.’

아리아드네는 상석을 향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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