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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01화 (301/733)

<제301화>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수가 없다

아리아드네는 뚜벅뚜벅 걸어서 상석에 앉은 루비나 공작부인과 이사벨라 사이로 향했다.

이 구성에서 그녀가 말을 걸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백작부인인 이사벨라뿐이었다.

“언니.”

따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일부러 친근한 호칭을 골랐다.

“산 카를로에 돌아온 걸 축하해.”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오찬장을 꽉 차게 울렸다. 아주 다정한 미소를 띤 채였다.

이사벨라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어, 어?”

아리아드네는 얇은 여름용 장갑을 낀 손으로 이사벨라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사벨라도 왕궁에서 열리는 오찬인 만큼 비단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있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했다. ‘맨손으로 저 계집애랑 손 안 잡아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나오는 대사와 음성은 정반대였다. 지금 가식의 여왕은 아리아드네였다.

“오—랜만에 만나니 너무 반가워.”

아리아드네는 여상스럽게 덧붙이는 척, 배에 힘을 준 채 중요한 얘기를 했다.

“‘형부’께서 급작스레 식사 초대가 있다고 하시면서 여기로 데려다주셨는데, ‘언니가 불러준’ 자리였구나.”

그녀는 주요 단어에 강세를 팍팍 넣어 발성했다.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만 들으면 여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이사벨라가 사고 친 여동생을 위해 루비나 공작부인과 화해할 자리를 주선한 듯한 모양새였다.

이 오찬장에 모인 귀부인들은 모두 루비나 공작부인의 일파이기는 했지만, 은밀한 내막까지 모두 공유받을 정도로 긴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런 거였나’ 하는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부인네들의 기색을 확인한 아리아드네는 회심의 미소를 띤 채 이사벨라가 뭐라고 반박할 새를 주지 않고 몰아쳤다.

“배 속의 조카는 잘 자라고 있지? 몸은 건강하고?”

여기서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내뱉었다가는 자기가 매정한 언니가 될 판이었다.

이사벨라는 가뜩이나 저번 카멜리아의 결혼식 때 데 마레 추기경과 연락을 안 한 일이 소문 났을까 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집을 박차고 나왔을 땐 자신만만했지만, 친정의 뒷받침이 없는 백작부인은 서러울 일이 많다는 걸 이미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친정집과 연을 끊었다는 이야기마저 공식적으로 돌게 되면 가뜩이나 안 좋은 평판이 더 관리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여자의 인생은 결혼 한 방’이라던 자신의 믿음이 틀렸다는 걸 결혼을 한 이후에야 알았다.

이사벨라는 어쩔 수 없이 아리아드네의 유도신문에 넘어갔다.

“그, 그래. 건강해.”

“태동은 해?”

“막달이니까, 활달해.”

훈훈하기 짝이 없는 자매간의 대화였다. 그 틈을 타 아리아드네는 자기가 노리던 대사를 싹 끼워 넣었다.

“그렇구나. 그럼 나 조카 옆에 앉아도 돼?”

이사벨라는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입을 닫았다. 여기에서 ‘응’ 말고 무슨 답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건 고작 끄나풀에 지나지 않는 이사벨라 선에서는 결코 내줄 수가 없는 답이었다.

이사벨라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고, 루비나 가까운 곳에 앉은 귀부인들 몇몇이 동요했다.

이 꼴이 나는 건 저들의 시나리오에 없었던 듯했다.

결국 저쪽의 최종 보스가 나섰다.

“데 마레 여백작.”

루비나 공작부인이 느릿한 말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아리아드네는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그런데 예를 표할 필요도 없었다. 되돌아온 말은 예의가 아까울 정도였다.

“이 자리는 선객이 있어. 자네가 앉을 수 없네.”

루비나 공작부인은 턱을 들어 오찬장 뒤쪽을 가리켰다.

“저 친구의 자리지.”

루비나 공작부인이 가리킨 방향에는 루비나 공작부인의 하급 귀족 출신 시녀가 방석 같은 것을 껴안다시피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요새 가장 총애하는 자야.”

하지만 진정 총애하는 자라면 진작에 자리에 앉히지 않고 세워놓을 리가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공작부인의 시녀를 찬찬히 살피고는 루비나 공작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미친.’

루비나 공작부인이 말하는 총애하는 상대는, 그녀의 시녀가 들고 있는 방석 위에 앉아 앞발을 핥고 있는, 아주 조그만 프렌치 불독이었

다.

- 왈!

손바닥만 한 회색 개가 위풍당당하게 짖었다.

앞발 두 개로 몸을 지탱하고 선 모양새가 어찌나 기세등등한지 아주 그냥 왕궁 정도는 혼자 지킬 기세였다.

루비나는 시녀에게 손짓해 강아지를 데리고 오게 시켰다.

분명히 귀족 출신의 시녀인데도 하녀처럼 부림당하고 있는 루비나의 시녀는 체념한 듯 강아지를 데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루비나는 길고 고운 손가락으로 소중하게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작고 금쪽같아서 아직 이름을 못 정했어. 어때, 귀엽지?”

“⋯⋯예, 귀엽네요.”

“제 분수를 모르는 인간보다 백번 나아.”

루비나는 이글거리는 눈매로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어떤 하룻강아지가 도리도 모르고 제 주제에 맞지도 않는 자리를 수락했다는 얘기를 들었지.”

아리아드네는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루비나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별다른 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여기서 기세로 밀리면 끝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라가 양아치라면 루비나는 진짜 막장 깡패로구나.’

겪어본 적 없던 전생의 예비 시어머니는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였다. 저런 여자가 궁에서 근 30여 년을 버틴 비결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님이 무르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라 정말로 본인의 뛰어남 때문이었다면 속성 과외라도 듣고 싶었다.

루비나는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아리아드네를 계속 몰아붙였다.

“작위에도 안 맞고 연배에도 안 맞는데 꾸역꾸역 욕심을 내는 어린애의 탐욕에 어르신인 내가 한 수 가르쳐줘야 하지 않겠니?”

오찬장 안의 귀부인들 모두가 숨도 안 쉬고 그 둘을 주시하고 있었다.

“공작부인.”

아리아드네는 맞받아치기로 했다.

대놓고 ‘네가 정부(情婦)니까 타란토 공작가가 너를 싫다고 하지’라고 하기엔 여파가 너무 클 것이고, 본인도 그렇게 떳떳하지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추기경의 사생아 아닌가.

“모름지기 어르신이시라면.”

그렇지만 궁에서 잔뼈가 굵은 아리아드네는 저런 무데뽀 루비나를 상대로는 사교계 식 사소한 트집이야 잡으려면 삼백 개도 더 잡을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랫사람 밥은 실하게 먹여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리아드네는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점심 식사 초대라고 듣고 왔는데 손님 대접이 형편없는데요. 앉을 자리 하나도 없어요.”

루비나 공작부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의 시녀를 불렀다.

“데보라.”

공작부인의 시녀는 프렌치 불독을 쿠션째로 의자에 내려놓았고, 양옆에서 하녀들이 나타나 식탁 위에 강아지용 식기들을 세팅했다.

아미를 찌푸리며 자기가 앉으려던 자리에 개 밥상이 차려지는 걸 보던 아리아드네는 재차 말했다.

“이렇게 대접하신다면 전 루비나 공작부인께 밥 못 얻어먹은 것으로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이에 루비나가 조소하며 답했다.

“빈자리가 없긴 왜 없어?”

그녀는 턱 끝으로 하녀들이 드나드는 작은 쪽문 쪽을 가리켰다.

“저기, 손님 전용 상이 있잖아.”

개가 앉아서 먹을 만한 사이즈의 작은 상이었다.

강아지용 테이블 앞에는 의자라기보다는 발 받침에 더 가까운 스툴이 하나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조잡한 개밥그릇 같은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개죽 같은 음식과 함께였다. 루비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거기 말고도 자리 많네. 거,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자리에 앉아 보던가.”

아리아드네가 말을 걸 수 없거나, 구아티에리 후작부인과 바톨리니 백작부인과 버티고 있는 자리.

“아니면 뭐 자네 말대로 집에 돌아가서 들거나.”

아리아드네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은 모두, 그녀가 오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수작이었다.

루비나는 결국 레오 3세에게 비앙카 공녀의 샤프롱 역할을 맡으라는 허락을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깡패처럼 패악을 부리며 아리아드네를 코너로 모는 것이었다.

산 카를로의 그 누구도 감히 비앙카의 샤프롱이 되지 않으려고 들 때, 선택권이 없어진 타란토 공작가의 무릎을 꿇려 그 손을 잡으려고.

사교계 앵무새들에게 떡밥을 던져줄 만한 일을 하지 않은 채 딱 두 시간만 버텨서 오후 회의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그게 개밥이 놓인 탁자에 앉는 일이라니, 웬만한 영애라면 진작에 울면서 집으로 뛰쳐나갔을 만한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몰리자 천하의 아리아드네라도 별다른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저걸⋯⋯. 눈 딱 감고 먹어?’

개죽? 못 먹을 건 없다. 베르가모 농장에서 살 때는 저런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데 마레 백작이 루비나 공작부인의 점심 식사 초대에 끌려가서 개죽을 먹고 왔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쫙 퍼질 것을 생각하니 손끝이 떨렸다.

‘생각하자, 아리. 뭐라도 생각해내자.’

아리아드네는 루비나의 오찬장 안에 망부석처럼 서서 개밥그릇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새 태세를 전환한 이사벨라가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구경했다.

가끔씩 프렌치 불독을 쓰다듬고, 자기 옆자리에 앉은 이름 모를 귀부인과 귓속말을 하며 깔깔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 * *

알폰소는 기사들과 오전 훈련을 마치고 연무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들 간소하게 가죽 갑옷 정도만 걸치고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로 본궁 중앙의 회랑을 가로질러 왕자궁으로 돌아가는데, 어디선가 소란이 있었다.

아니, 소란이라기에는 모자랐다. 소리도, 비명도, 물건 부딪히는 소리도 없었으니까. 그저 고조된 긴장감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고도로 단련된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그런 긴장감이었다.

알폰소는 바로 뒤의 만프레디 경을 돌아보았다. 그도 느낀 모양이었다. 만프레디 경은 알폰소 왕자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왼쪽입니다.”

알폰소가 느낀 방향과 같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직진했다.

평소 같았다면 무시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뭔가 그러면 안 된다는 동물적인 느낌이 있었다.

날 선 긴장감이 흘러나오는 곳은 작은 식당이었다.

- 쾅!

알폰소는 전쟁에서 시가전을 하듯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갓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10여 인의 기사들이 우르르 식당에 진입했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사십여 명의 귀부인들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애들처럼 화들짝 놀라며 새로 들어온 남자들을 맞이했다.

놀란 귀부인들의 수괴는 루비나 공작부인이었다.

“⋯⋯왕자 저하.”

루비나 공작부인이 마지못해 예를 표했다. 알폰소 왕자는 간단한 묵례로 답했다.

“⋯⋯.”

알폰소는 끔찍한 침묵이 지배하는 오찬장—그의 시선에서는 그저 식당—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을 확 잡아채는 여인이 있었다. 광채를 내뿜는 청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드레스 따위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품위 있게 땋아 올린 검은 머리 타래 아래로 피부 속 깊은 곳에서부터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윤기 나는 피부가 있었다.

동그란 이마에서 이어지는 높은 콧날, 크고 선명한 녹색 눈동자와 그에 대비되는 붉고 도톰한 입술이 그의 눈길을 잡아끌어 도무지 놓아주지 않았다.

“아리아드네.”

루비나조차 묵례로 갈음해버린 알폰소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데에 오찬장이 술렁거렸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알폰소는 의례적인 인사인 척 상황을 수습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

청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아리아드네는 장전하는 활시위처럼 우아하게 휘어지며 예를 표했다.

“알폰소 왕자 저하를 뵙습니다.”

알폰소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찰나 간에 불과했다.

“⋯⋯재미있는 식사군.”

그는 루비나 공작부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가 닿았던 것은 아리아드네가 서 있던 곳 옆에 차려져 있던 개밥, 아니, 개죽 그릇이었다.

알폰소 뒤로 한 걸음 처져 있던 만프레디 경이 탁, 치고 나왔다.

“이야—. 제가 모르는 새로운 애피타이저입니까? 제가 산 카를로에 있을 땐 신선한 샐러드에 레몬과 생선을 곁들여 먹는 게 유행이었었는데, 전쟁터에 갔다 온 사이에 유행이 엄청 많이 바뀌었군요?”

옆에서 베르나르디노 경이 찰떡같이 보조를 맞춰 주었다.

“그 뭐라더라? 건강식? 그거 아니야?”

“현미, 오트밀, 삶은 잡곡이나 그런 거. 맞죠?”

귀부인들이 어쩔 줄을 모르는 가운데 다 알면서 사람 바보 만드는 중인 만프레디 경이 킬킬거렸다.

알폰소 왕자는 그동안 싸늘하게 침묵을 지키며 루비나 공작부인만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면 설마⋯⋯.”

그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지금 손님 하나 불러다 놓고 조리돌림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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