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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02화 (302/733)

<제302화> 새로 나온 애피타이저

앞에 나선 만프레디 경이 유쾌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저하. 새로 나온 애피타이저겠죠.”

베르나르디노 경도 추임새를 넣었다.

“왕국에서 최고로 고귀하신 귀부인인 루비나 공작부인께서 설마 그런 짓을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조리돌림’ 같은 저급한 단어를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는 투였다. 알폰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강아지 전용 테이블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 나라의 적통 왕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이사벨라였다. 그녀의 자수정 눈동자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알폰소는 강아지 테이블에서 개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오찬장을 가로질러 루비나 공작부인 앞에 그 개밥그릇을 내려놓았다.

- 탁!

쥐죽은 듯이 조용한 식당이었다. 도기 그릇 안에서 개죽 찰랑대는 소리까지 여과 없이 들렸다.

루비나 역시 안색이 허옇게 질린 상태였다. 알폰소가 입을 열었다.

“주인이 한술 뜨기 전인데 객이 어찌 먹겠나.”

겉으로는 흔한 식사예절 이야기였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알았다.

- ‘이 개죽 네가 다 먹으라는 소리잖아!’

만프레디 경이 잽싸게 강아지 테이블로 달려가서 강아지 사이즈로 만든 개 숟가락을 들고 왔다.

수프를 뜨는 수저 부분이 개 앞발 모양으로 귀엽게 파여 있었다. 그가 해맑게 권했다.

“드시죠.”

- 퐁당!

개 숟가락이 루비나 공작부인 앞의 개죽에 처박혔다. 만프레디는 빙글빙글 웃으며 덧붙였다.

“최신 유행 애피타이저 다 식겠네.”

루비나는 알폰소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알폰소는 담담한 표정으로 루비나의 눈빛을 마주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한, 마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둘의 시선이 한참을 대치하던 끝에, 루비나는 결국 탁! 소리를 내며 손으로 테이블을 쳤다.

“여기까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비나는 회색 프렌치 불독만 달랑 안아 들고선 오찬장을 떠났다.

시녀 데보라가 각종 강아지 물품들을 챙겨 들고 그 뒤를 허둥지둥 따랐고, 얼굴색이 새파래진 만삭의 이사벨라가 종종거리며 그 뒤를 이었다.

그다음엔 눈치 빠른 순서대로였다. 이 자리에 초대되었던 귀부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루비나 공작부인 뒤를 따라 우르르 빠져나갔다.

흡사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 같은 퇴장이었다.

베르나르디노 경은 시종을 불렀다.

“거기, 여보게.”

주인과 대부분의 손님들은 사라졌지만 식당도 남았고 음식도 아마 그대로일 것이다. 낭비는 나쁜 것 아닌가?

“식사 준비는 다 되어 있겠지?”

오찬장 안에서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시종이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예!”

“왕궁 주방 입장에선 누가 먹든 상관은 없을 테니 준비된 대로 그대로 다 내오게.”

“36인분인데, 지금은 10여 분 밖에 안 계셔서⋯⋯.”

“36인분 그대로 다 가지고 와. 저 양반들 먹는 양 상상 안 가나?”

기사들은 안 그래도 당장 뭔가 먹이지 않으면 봉기라도 일으킬 태세였다. 시종은 납득하고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이렇게 루비나의 오찬장을 점거하고 밥까지 빼앗은 기사들은 좀 전까지 귀부인들이 우아하게 앉아 있던 아름다운 의자에 흙먼지 묻은 신발을 신고 아무렇게나 걸쳐 앉기 시작했다.

굳이 루비나 공작부인을 따라 나갈 생각까지는 없던 귀부인들도 이쪽에 남은 사람들의 몰골을 보고는 삼삼오오 오찬장을 떠나 버렸다.

기사들은 훈련을 갓 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땀에 전 머리카락과 옷은 물론이요, 오래 묵은 훈련용 갑옷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알폰소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그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의 아리아드네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는데 그는 하필이면 이런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그는 조용히 소매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내려고 해 보았지만, 소매에 묻어 있었던 흙먼지가 볼에 옮겨 묻었을 뿐이다.

알폰소는 벽에 걸린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 보고는 공황에 빠졌다.

이제 오찬장에 남아 있는 여성은 데 마레 백작, 아리아드네가 유일했다.

알폰소가 망가져서 작동을 멈춘 사이에 만프레디 경은 슬금슬금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갔다.

“데 마레 여백작을 뵙습니다.”

무릎을 굽히며 멋들어지게 예를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선선히 웃으며 답례했다.

“만프레디 백작가의 삼남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만프레디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를 아세요?”

‘진실을 보는 소녀’, ‘랑부예 구휼원의 성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이 그의 이름을 안다니! 그 뺀질뺀질한 만프레디 경조차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이, 이거 진짜 가, 가문의 영광인데?!”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산 카를로 사교계에서 만프레디 경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야! 기분 좋다!”

만프레디 경은 장화 뒤축으로 박수라도 칠 수 있을 정도로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 것 치고는 문장 하나를 호흡 한 번에 다 읊어버린 것이 영 수상했지만.

“아니, 그건 둘째치고, 점심 같이 들고 가지 않으실래요? 보니까 어차피 시간이 좀 뜨신 것 같은데.”

만프레디가 데 마레 백작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며, 로트쉴드 경이 베르나르디노 경에게 물었다.

“베르나르디노 경, 만프레디 저 친구 약혼녀 있지 않았어요?”

로트쉴드 경은 예사크에서 새로 합류한 외국인이었다.

“갑자기 왜 저렇게 촐싹대요?”

에트루스칸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의 눈에도 보였나 보다.

디노 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디노 경의 부관인 데실리오 경이 테이블 밑으로 로트쉴드 경의 발을 찼다.

“아야!”

“쉿!”

데실리오 경은 만프레디 경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차였잖아요!”

“뭐?”

데실리오 경은 엄청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으스대며 말했다.

“만프레디 경이 예사크에 가 있는 동안 하도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고 다른 남자랑 결혼했대요.”

“아이고⋯⋯.”

비밀인 것 치고는 목소리가 좀 컸지만 만프레디 경은 데 마레 백작에게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만프레디 경은 억울하다고, 자기는 편지 썼다고 하는데, 뭐 저 양반 꼬락서니를 보세요. 어디 꼬박꼬박 편지 썼겠어요?”

데실리오 경은 나이가 제일 어린 축인 데다가 모두가 예사크에 가 있는 동안 자기는 산 카를로에 남아 있었어서 거드름을 피울 수 있는 상대가 로트쉴드 경밖에 없었다.

“그렇죠, 제 말이 맞죠 디노 님!”

하지만 베르나르디노 경은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만프레디 저놈, 왕자님이 데 마레 백작과 사귀셨던 걸 모르나?’

만프레디 경은 헤실헤실 웃으며 데 마레 백작에게 잘 보이려고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었다.

‘저놈, 저러다가 내일 훈련 때 경을 칠 텐데⋯⋯.’

아니나 다를까, 알폰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 미간에 주름이 갔다가…….

‘난 모르는 척해야겠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며, 침묵은 금이었다.

베르나르디노 경은 내일 알폰소 왕자가 기사들 전체가 아니라 만프레디 하나만 콕 짚어 뺑뺑이를 돌리길 천신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 * *

“멍청한 것!”

- 철썩!

루비나 공작부인은 임신부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가차 없이 이사벨라의 뺨을 갈겼고, 이사벨라는 공작부인의 고급 무어 제국산 양탄자 위를 사정없이 굴렀다.

“네 계책을 믿고 내 그대로 행했더니 결국엔 웃음거리가 되어버렸어!”

루비나는 분을 못 이겨 씩씩댔다.

“뭐? 내 동생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아주 그냥 입만 살아서는!”

이사벨라의 고운 아마빛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붉은 양탄자 위에 흩어졌다.

뒤에 선 오타비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이 사태를 어찌할 테냐! 배짱 좋게 나에게 비앙카의 샤프롱을 서게 되는 대가로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의 고소 건을 해결해달라고 해놓고선 이 깽판을 쳐놔?!”

만삭의 이사벨라는 간신히 배를 껴안고 몸을 추슬러 무릎을 꿇고 일어났다.

그녀는 네발로 기어가 루비나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읍소했다.

“거기서 왕자가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난 무슨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일을 완성하는 수하가 필요하다고! 왕자가 나타났다고 그 고얀 년이 기세등등해서 입꼬리 올리는 꼴 봤지!”

이사벨라는 길게 울부짖었다.

“제발, 제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신다면 제 재주가 뛰어남을 공작부인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리아드네 그년은 제가 가장 잘 압니다! 반드시 공작부인 앞에 무릎 꿇게 해 드리겠습니다!”

루비나는 발길질로 이사벨라를 떨쳐냈다.

“일 없다!”

이사벨라가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아악!”

루비나는 포도주색 눈을 가늘게 뜨며 이사벨라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알아봤어야 했어. 내 아들한테 치마 안 속곳까지 벗어줬으면서 그 애 안사람 자리 하나 꿰차지 못한 계집인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니?”

옆에서 듣고 있던 오타비오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이사벨라는 오타비오에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루비나에게 집중하느라 남편 쪽을 쳐다볼 짬을 낼 수가 없었다.

“그, 그건 그런 것이 아니라⋯⋯!”

“변명 따윈 필요 없어.”

루비나는 단호하게 이사벨라의 말을 끊었다.

“그때 실패 한 번. 오늘 실패 두 번.”

그녀는 검붉은 공단 구두 앞코를 바닥에 엎어진 이사벨라의 턱에 걸어 그녀의 얼굴을 치켜들었다.

“실패가 한 번이면 실수려니 하지만⋯⋯ 실패가 두 번이면 그건 실력이야.”

루비나의 구두가 빠져나가자 이사벨라의 얼굴이 힘없이 융단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곧바로 고개를 발딱 들고 필사적으로 빌었다.

“공작부인! 아녀요!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시면 이번엔 정말로 잘 해낼 수 있어요!”

루비나는 큰 감흥 없이 비웃었다.

“콘타리니 백작부인께서 그렇게 능력이 있으시면 내 도움 없이도 카스틸리오네 남작가 일도 해결 잘하시겠지?”

루비나는 한숨을 쉬며 손짓을 했다. 나가라는 제스처였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꺼져. 사람 불러서 끌어내기 전에.”

이사벨라가 루비나에게 좀 더 매달리려는 기색을 보이자 오타비오가 아내를 만류했고, 그 사이에 루비나 공작부인은 귀신같이 내실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시녀 데보라가 둘을 바깥으로 이끌었고, 이렇게 콘타리니 백작부부는 루비나 공작부인의 처소에서 쫓겨나듯 나오고 말았다.

“흑⋯⋯. 흑흑⋯⋯.”

왕궁 복도에 서서 만삭의 이사벨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었다.

“우리 어떡해⋯⋯.”

여느 때처럼 가식을 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카멜리아네 빚 다 못 갚으면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저택에서 내쫓겨⋯⋯?”

루비나 공작부인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했던 등신 같은 오타비오가 말했다.

“근데 있잖아 이사벨라.”

“응.”

“자기, 정말로 체자레랑 잤어?”

이사벨라는 뭔가 거대한 망치 같은 것이 자기 뒤통수를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우⋯⋯!”

마누라의 침음성에도 불구하고 오타비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거 아니지? 자기가 나한테 그런 적 없다고 했잖아. 맞지?”

“윽⋯⋯! 아윽⋯⋯!”

이사벨라가 배를 움켜쥐고 쪼그려 앉았다. 오타비오가 약간 성난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내려다보았다.

“또 배 아픈 척해서 대화 안 하려고?”

그는 팔짱을 끼고 이사벨라를 쳐다봤다.

“내가 같은 수에 계속 속는 머저리인 줄 알아? 당신 나 무시해? 이거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야!”

이사벨라의 치맛단이 짙은 색깔로 젖어 들어갔다.

“오줌까지 지렸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여보.”

“⋯⋯이 미친 새끼야!”

이사벨라가 밭은 호흡 사이로 간신히 내뱉었다.

“양수 터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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