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지나치게 긴 목숨줄
이폴리토는 달력에 동그라미 하나를 더 쳤다. 데 마레 추기경이 트레베로로 떠난 지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났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는커녕, 트레베로에서 산 카를로를 향해 출발했다는 연락조차 없었다.
법황이 죽으면 열리는 콘클라베가 끝나야 아버지가 돌아올 수 있는데, 루도비코 법황이 오늘내일하는 상태로 끈질기게 오래 버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이제 좀 죽어주면 안 되냐고!’
혹시, 아버지가 차기 법황이 되시면 내가 법황의 아들? 같은 신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이제 이폴리토는 그렇게 대단한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집에서 아빠 없이 지내는 건 가시방석 위에서 먹고 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사벨라가 산 카를로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후—이 망할 놈의 여동생은 수녀원에 갇혀 있을 땐 오빠 오빠 하며 갖은 알랑방귀를 다 뀌더니 나오게 될 때는 자기 탈출한다고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집안이 가진 가장 좋은 말을 타고 여동생의 새 저택에 방문하려고 했다.
굳이 이제 와서 이사벨라에게 위엄을 세우려는 건 아니고, 매제인 오타비오에게 위세를 보이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망할 이복동생 아리아드네가 죽어도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 “그 말은 추기경 예하와 가주만 타는 말이에요.”
옛날 같았으면 거만하게 호통도 치고 바로 엄마한테 달려가 일렀겠지만 요새의 이폴리토는 그렇게 팔자가 좋지 못했다.
그는 비굴하게 여동생을 설득했다.
- “아, 깐깐하게 굴지 좀 말고. 말 한번 탄다고 닳냐?”
물론 이폴리토의 ‘비굴’, ‘설득’과 일반인이 생각하는 설득에는 차이가 좀 있었다.
- “오가면서 사고라도 나면 책임지실 수 있으세요?”
못돼 처먹은 것이 말싸움은 또 오지게 잘해서 져주는 법이 없었다.
- ‘아 이 재수 없는 계집애⋯⋯!’
면전에다 대고 욕을 박지 않는 것 정도가 이폴리토가 생각하는 ‘비굴’이었다.
- “야, 말이 안 되면 가문 문장 찍힌 은마차라도⋯⋯. 내가 직접 모는 거 아니고 마부가 모는 거니까 네가 타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 “주세페! 이폴리토 도련님 나가신다!”
그는 씩씩거리며 이복동생의 집무실을 나섰다. 이렇게 된 김에 아무 말이나 타고 가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허락을 받아 꼭 그 말을 타고 가겠다고 결심했는데, 그만 그 아버지가 아직까지도 돌아오시지 않고 있다.
‘이젠 여동생 집에 지나치게 오래 안 찾아갔어. 늦은 것까지 쌓여서 선물이라도 크게 사 들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용돈이 다 떨어졌다. 그렇다고 때려죽여도 이복 여동생에게 돈을 타 쓰긴 싫었다.
‘언제 와요 아부지⋯⋯.’
이폴리토는 울상을 지은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져서 루도비코 법황의 침상에 내리꽂으면 참 좋을 텐데.
아니, 기왕 하늘에서 벼락을 한 발만 내리꽂아 준다면 루도비코 법황의 침상보다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침상 쪽이 낫겠다.
아리아드네는 아직 미혼이었다. 그 말인즉슨 그녀에게 가족은 데 마레 사람들 외에는 없다는 뜻이다.
추기경은 성직자라 작위를 승계할 수 없고, 이사벨라는 결혼해서 출가외인이다.
이폴리토는 넘치는 상상력으로 아리아드네의 서쪽 끝 방과, 마구간을 순차적으로 노려보았다.
* * *
드디어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준비하게 된 아리아드네는 할 일이 많았다.
왕자궁의 행정은 총괄하는 베르나르디노 경 측에서는 왕자궁 측에서는 사전에 그려둔 그림이 없으니 이번 일의 진행은 타란토 공작가와 의논해 전적으로 데 마레 백작님 의향대로 하시면 된다고 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아리아드네는 수도에 파견 나와 있는 타란토 공작가의 대리인과 미팅부터 하기로 했다. 그 약속에 가던 길이었다.
- 히히히이이이이힝!!
- 히히힝!!
이륜마차에 묶인 말 두 마리가 안타깝게 울부짖었다.
아리아드네가 탄 은마차 뒷바퀴의 축이 마차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다. 마차가 전복되고 있었다.
- 쿠쿵⋯⋯. 쾅!
마차는 도로 측면의 가로수를 한 번 들이받고 비스듬히 멈췄다. 대각선으로 허공에 떠버린 멀쩡한 쪽 바퀴가 허무하게 공회전했다.
“아가씨—!!”
혼비백산한 수하들 달려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문을 뜯어!”
“차체를 들어 올려!”
아리아드네는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유지하려 애썼다. 마차가 흔들리며 크게 놀랐지만 어디 잘못 다친 데는 없는 느낌이었다.
“아가씨! 무사하십니까 아가씨!”
그녀를 안타깝게 찾는 주세페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주세페.”
틀어져서 열리지 않는 나무 문짝 너머로 아리아드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놀랍도록 착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괜찮으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장 꺼내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위세를 보이던 주세페와 뒤에서 따라오던 수하들은 대번에 달려들어 문짝을 떼어내 아리아드네를 구하고, 튕겨 나간 마부를 수습했다.
도로변 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앉은 아리아드네는 주세페에게 전후 사정부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주세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뜻이 아니야.”
“마차의 뒷바퀴 축이 헐거웠습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풀어놓은 것처럼?”
주세페는 깜짝 놀라며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리아드네는 혀를 차며 대답하지 않았다. 주세페는 그게 자신에 대한 불신임의 뜻이라고 생각했는지 급하게 덧붙였다.
“백작님과 추기경 예하께서 사용하실 마구며 장비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제가 직접 살핍니다. 이 마차도⋯⋯.”
그는 손가락으로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삼 일 전에 제가 직접 점검했던 겁니다. 그땐 멀쩡했습니다. 천신님과 제 어머니를 걸고 맹세합니다.”
아리아드네는 주세페가 긴장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나는 자네를 질타하는 게 아니야, 주세페.”
물론 마구간 책임자라면 두 번 연속으로 말과 관련한 사고가 터지게 한 무능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세페는 어디까지나 아리아드네 소속 남자 하인 전반을 책임지는 자였지 마구간 책임자나 경호만을 책임지는 자는 아니었다.
마구간을 직접 확인한 것은 순전히 그가 아리아드네를 위해 뭐라도 하나 더 하고 싶어 했고, 출신부터가 마구간지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뭐든지 다 직접 하려고 동동거리지 마.”
이건 주세페를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윗사람이 되려면 일을 적당히 잘라서 나누어 줄 줄도 알아야 해.”
“하지만 이 부분을 줄일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의 안위에 대한 일이지 않습니까!”
“마구간 점검이 현재 내 안위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총 책임자 고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잠시 넘기게.”
주세페는 ‘책임자로서의 일을 타인에게 넘기라’는 이야기 부분만 토막 쳐서 듣고는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울상을 짓고 마저 사고 수습을 하러 돌아갔다.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가장 어려워.’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을 꼬지 않고 똑바로 전달했다. 그런데도 그게 가서 닿지 않았다.
그냥, 주세페가 생각하는 우선순위대로 일을 처리하면 되고, 덜 중요한 건 남한테 시키면 된다는 단순한 조언이었을 뿐인데.
그걸 그의 상급자의 위치에서 말하자 조언이 아닌 압박이 되었고 일을 줄이라는 배려는 배려가 아닌 주세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심판자의 매서운 눈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차에게 나중에 주세페에게 오해가 없도록 잘 말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주세페와 일하는 것은 이 점이 좋았다. 주세페는 말귀를 썩 잘 알아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산차를 통할 수 있었다.
주세페와 산차는 언제부터 그랬는지 둘이 투덕거리기도 하고, 속닥거리기도 하고, 하여간에 친했다.
그 둘을 생각하니 아리아드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모든 인간관계 사이에 거간꾼을 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그래. 모든 인간관계에 산차를 낄 수는 없지.’
그때와는 한눈에 달라진, 누가 봐도 어른이 된 외양이지만 그때와 똑같은 햇살 같은 미소. 곤란할 땐 약간 두둑하게 올라가는 눈 밑 애교살.
그 미소를 짓는 남자는. 자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왜 무더운 장마철 날씨처럼, 쨍한 햇살을 쏟아붓더라도 다음 순간 구름이 하늘을 덮어버린 것처럼 싹 어두워질까.
“백작님.”
“응?”
다른 생각을 하던 아리아드네는 주세페의 말에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그럼 지금 타란토 공작가 측에 마차가 전복되었으니 오늘 만남은 취소한다고 연락할까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차가 뒤집어졌을 때도 안 오던 두통이 왔다.
“아니야!”
“예? 예? 하지만 이 상태로 진행하시기엔⋯⋯.”
타란토 공작가의 대리인에게 ‘마차가 전복되었으니 오늘의 약속을 미루자’고 이야기하면 데 마레 백작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온 산 카를로가 알게 된다.
그런 소문이 나 봤자 좋아할 사람은 루비나 공작부인밖에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정대로 진행해야 해.”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폈다.
마차가 전복되며 원래 문짝이며 벽이던 널빤지가 산산조각이 나 스커트 자락이며 머리카락에 달라붙었지만 크게 다친 곳도 없었고 심각하게 찢어진 곳도 없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옷과 머리를 탁탁 털었다.
“말을 다오. 가자.”
주세페의 말을 받아 달리며,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날 계속 노리는 거지? 이폴리토라면, 왜 이폴리토에게 붙여놓은 감시 체계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거지?
* * *
“아가씨!”
저녁에 집에 돌아온 아리아드네를 씻겨주며 산차가 외쳤다.
“여기 또 멍이 있잖아요!”
분노한 산차의 잔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그럴 땐 다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오셔야 한다니깐요!”
“안 돼, 그럴 수가 없었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따낸 비앙카 공녀의 구이다타 자리인데.”
그녀는 산차의 눈총을 피해 거품 섞인 욕조 속에 몸을 깊숙이 담그며 입을 뾰족하게 내밀어 보글보글 포말을 만들었다.
난 잘못한 게 없다는, 불만 가득 섞인 표정이었다.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가 돌면 루비나가 어떻게든 샤프롱 자리를 차지하려고 수를 쓸 거라고.”
오랜만에 견습 하녀의 에이프런을 걸친 산차가 한심하게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발끈해서 외쳤다.
“왜!”
크게 불던 비눗방울이 얼굴 앞에서 폭, 터졌다.
“제 앞에서 그런 애교 부리지 마시고, 밖에 나가서 좀 부려 보세요.”
산차는 비누를 묻힌 큰 솔을 들어 아리아드네의 등을 박박 문지르며 한탄했다.
“이걸 나만 보고 치우다니. 국가적 차원의 애교 낭비다, 애교 낭비.”
“악! 아파!”
“저한테 하시듯이 남한테도 하시면 지금쯤 애가 셋이셨을 걸요?”
산차는 잔소리를 이어갔다.
“나 같으면 마차 전복됐다고 동네방네 떠들어싸서 왕자님 문병 오게 만들었다!”
“왕자님?”
아리아드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비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둥근 어깨와 쇄골에 해초처럼 엉켜 동그란 윗가슴에 달라붙었다.
“으이구! 이걸 내가 보고 앉았다니!”
산차는 아리아드네의 등을 미는 손길에 힘을 더 빡빡 주었다.
“아야! 아니 근데 너 무슨 얘기 들었어? 왕자님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