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07화 (307/733)

<제307화> 이사벨라의 난산

산실 안에서 산파가 내리는 다급한 지시가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 “백작부인의 가슴팍과 배를 눌러! 뼈가 부러져도 되니까 마구 눌러!”

- “마님 호흡부터 확보할까요, 아니면 아기부터 꺼낼까요?”

- “지금은 그게 그거야! 애가 안 나오면 호흡을 확보해도 소용이 없어! 아기씨부터 꺼내시게! 이대로면 둘 다 죽어!”

바톨리니 백작부인 클레멘테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기분이 마구 좋아지고 있었다.

‘진짜로⋯⋯. 죽는 건가?’

이사벨라가 정말로 저세상으로 간다고 하니 용기가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산실에서 하녀의 울음소리 같은 게 나기 시작했다. 클레멘테의 용기는 비례해서 치솟아 올랐다.

남한테 싫은 소리라고는 절대 못 하는 클레멘테의 입에서도 드디어 안 좋은 소리가 나왔다.

“백작부인은 무슨⋯⋯.”

쥐죽은 듯이 고요하던 이 방에서 거의 24시간 만에 들린 사람 목소리였다.

남매 중 한 명이 내뱉은 첫 발화(發話)이기도 했다. 오타비오가 고개를 번쩍 들어 누나를 바라보았다.

“⋯⋯.”

오타비오는 죽은 사람처럼 파리한 낯빛을 하고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클레멘테는 조금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내가 좋아하는 티가 너무 났나? 그래도 오타비오한테는 자기 아내고 나한테는 올케인데 숨이 끊어지기 전부터 이러는 건 조금 너무했던⋯⋯.

“매형한테 부탁해서 나 돈 좀 빌려주라. 4000 두카토.”

장장 만 하루를 기다렸다가 꺼낸 첫 말치고는 참 면구스러운 청이었다. 클레멘터는 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타비오야.”

오타비오는 누나의 대답을 기다리며 숨이 막힐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민망한 청인 것을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그냥⋯⋯,”

클레멘테는 원래 말을 천천히 하는 편이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날에는 참 복장이 터졌다.

그렇다고 재촉할 처지도 되지 않으니 오타비오는 명줄만 줄어들 뿐이었다.

“사제님께서 집에 오시면⋯⋯. 공작부인께 가서⋯⋯. 다시 한번 청을 넣어 봐⋯⋯.”

한마디로, 이사벨라가 뒈지면 루비나에게 가서 빌라는 소리였다.

“아 누나!”

클레멘테는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너희 매형한텐⋯⋯. 지금은 좀 그래⋯⋯.”

가장 최근에 피우던 바람이 좀 꼬리를 밟힌 것 같았다.

남편이 아무리 허허 웃는 사람 좋은 노인이라지만 지금 친정에 큰돈을 달라기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남편도 누그러질 것이다. 항상 그랬다.

이사벨라가 죽었으니 협박당하던 지긋지긋한 과거와도 안녕이다! 이사벨라를 제외하면 남편한테 일러바칠 사람도 없다.

“⋯⋯좀만 기다려 봐⋯⋯. 나라고 친정이 안 좋게 되는 게 좋겠니⋯⋯.”

클레멘테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되는 건 그녀도 바라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렸었는데 오타비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콘타리니 가 평판이 많이 떨어졌어⋯⋯.”

“⋯⋯.”

오타비오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사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저번 카멜리아의 결혼식에서 깽판을 쳤을 때에는 그 본인도 땅이라도 파서 숨고 싶었다.

“⋯⋯내가 그래서⋯⋯. 쟤⋯⋯.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쟤는 아니라고.”

오타비오는 벌컥 성을 냈다.

“누나가 좀 더 말렸었어야지!”

클레멘테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오타비오를 꼬나보았다.

“⋯⋯네가⋯⋯. 들은 척이라도 했니?”

“열심히 안 말려서 그런 거잖아!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리면 누가 알아들어!”

오타비오로서는 ‘저 계집애는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된다’고 말려도 들을둥 말 둥 했을 판에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여자는 외모보다는 성품이 최고다’ 같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흐리멍덩한 만류가 귀에 들렸을 리가 없었다.

“⋯⋯별게 다 내 탓이야.”

클레멘테도 억울했다.

강한 워딩으로 말렸다가 오타비오 놈이 이사벨라에게 그걸 홀라당 일러바치면 뒷감당은 클레멘테 혼자 하게 될 텐데, 그 위험부담은 어쩌라는 건가!

“⋯⋯쟤 죽고 나면, 남편도 마음이 풀려서 친정에 돈 빌려주는 거 허락할 거야⋯⋯.”

오타비오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매형이 이사벨라 싫어하셨어?”

아니, 그랬던 건 아니지만. 묻지 좀 마. 입 좀 닥쳐. 클레멘테는 온화한 미소를 간신히 지어 보였다.

“⋯⋯좀만 더 기다려 봐라.”

그녀는 덧붙였다.

“⋯⋯너 홀몸 되고, 시간 좀 지나고.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야. ⋯⋯바톨리니 백작님께 부탁해서 돈도⋯⋯. 한번 여쭤보아 볼게⋯⋯.”

클레멘테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거라면 거의 책임지겠다고 확약하는 거였다.

오타비오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당황했다.

아내와 그 태중의 첫 아기가 죽어가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돈 생각하며 마음이 가벼워진 자기가 좀 너무한 인간 쓰레기가 아닌지 좀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가 내지른 것 같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사벨라였다. 그리고 가냘픈 울음소리 하나가 함께 터져 나왔다.

“으애애애애애앵!”

그다음은 산파와 하녀들의 기쁨에 벅찬 함성과 웃음소리였다. 산실에서 고참 하녀 하나가 뛰쳐나와 오타비오에게 고했다.

“가주님! 축하드립니다! 아주 예쁜 따님이십니다!”

“응? 으응?”

오타비오는 당황해서 잠시 말을 잊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사벨라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는데⋯⋯. 그렇다면 나한테⋯⋯. 아내가 없는데 자식은 있다는 건가?

나는 그럼 자식 딸린 사별남? 어떻게 키우지? 새 장가,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님께서도 청색증이 오시는 것 같아 다들 우려가 컸는데 지금 빠르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응?”

아내도 있다는 건가?

“결론적으로⋯⋯. 아기와 산모 둘 다 건강합니다!”

오타비오는 아기는 있는데 아내가 없을 걱정은 넣어둬도 되게 되었다. 그에게는 부인도 있었고 자식도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기적입니다!”

여전히, 돈만 없을 뿐이다. 가족은 온전했다. 이게 온전한 가족이라면 말이다.

그는 누나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클레멘테 역시, 이사벨라가 살아났다는 소식에 전혀 기쁘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하녀들이 보지 못하게 조그만 두 주먹을 소매 안에서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건 돈을 안 빌려주겠다는 뜻이다. 오타비오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입꼬리만 애써 올려 웃었다.

* * *

“두 분께서 이렇게까지 나서 주시다니⋯⋯.”

수도에 있는 타란토 공작가의 대리인은 몹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저희 타란토 공작가로서는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비앙카 공녀의 ‘후견인’으로 알폰소 왕자, 처음 들어보는 직위인 ‘구이다타’로는 데 마레 백작이 임명되었다는 말에 타란토 공작가에서는 안도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었다.

루비나 공작부인을 피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전쟁터에서 갓 돌아온, 혈기방장할 나이대의 젊은 왕자와 시집도 안 간 미혼의 여백작이라니, 도무지 일을 잘할 것 같은 조합이 아니었던 것이다.

- “그 두 분께서는 그냥 명예직으로 수락만 하신 것 같은데, 실무는 공작가 측에서 다 처리해야 하게 생겼네요. 어쩔 수 없지요.”

위 인선을 듣자마자 타란토 영지의 살림꾼, 겐나로소 자작이 했던 말이었다.

- “다음 주 중에 남쪽에서 데뷔탕트 파티 준비를 전담할 인력을 꾸려서 수도로 올려보내던지, 뭐 제가 직접 가던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래도 괜찮았다.

데뷔탕트 파티에 ‘샤프롱’이 서는 경우에는 가문이 한미한 아가씨가 수도 사교계에서 올바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후견인’이 서는 드문 경우는 인맥 소개에서 방점이 조금 빠지고 대신 금전적 서포트를 한다.

하지만 타란토 공작가에는 그런 역할을 해줄 사람 따위는 필요 없었다.

피사노 공작가가 신설되기 전까지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유일한 방계 공작가였다.

그 누가 감히 타란토 공작가를 사교계에 소개하고 공작가에 돈을 꿔준단 말인가.

레오 3세는 후견인 내지 샤프롱이 비앙카를 위해 근사한 파티를 주최해주기를 바랐지만, 그건 그저 국왕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 “우리끼리 할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수도에 있는 공작가의 대리인은 알폰소 왕자와 데 마레 백작에게 미리 첫인사를 한 번 드리고, 비앙카 공녀가 수도에 도착한 뒤에 인사 자리를 양측에 각각 한 번씩 주선하면 될 줄 알았다.

데뷔탕트 파티 당일에 세 명이 함께 서 있으면 왕자와 백작의 역할은 끝이다.

그런데 데 마레 백작은 물론이고 알폰소 왕자까지 타란토 공작가의 빈 저택에 몰려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시시콜콜한 실무의 디테일을 물어보며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예산은요?”

“생각해두신 콘셉트는 있나요?”

“수도에서 꼭 만나고 싶으신 사람이나 꼭 피하고 싶으신 사람은요?”

데 마레 백작은 추기경의 서녀(庶女) 출신으로, 신학 공부가 깊어 유명해졌고 흑사병 환난 중 백성을 구휼한 공으로 백작위를 받은 여자라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손에 펜과 종이를 들고 겐나로소 자작⋯⋯, 아니, 무슨 장사꾼 같은 눈빛으로 체크리스트를 적고 있었다.

왕자는 한술 더 떴다. 이쪽은 장사꾼 냄새는 나지 않았다. 왕실의 기품이 어디 가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지만 그는 기품이 철철 넘치는 표정과 자세로 앉아 목각인형처럼 리액션만 계속했다.

“비앙카 공녀님은 피부톤이 어떤 색이신가요?”

“음.”

“공녀님께 유독 어울리는 색깔이나 즐겨 사용하시는 색이 있나요?”

“음.”

“선호하시는 분위기나 음률이 따로 있습니까?”

“음.”

도움이 될만한 건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는 주제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타란토 공작가의 대리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차라리 왕자가 없는 편이 일하기가 편할 것 같았다. 눈치 볼 사람은 한 명 줄어들 것 아닌가.

“저하. 피곤하시면 귀가하셔도⋯⋯. 실무적인 일로 왕자 저하를 심려케 해 드리려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진심이었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괜찮네.”

“미팅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은데 뒤 일정이⋯⋯.”

“없네.”

공작가의 대리인은 정말이지 자리가 좌불안석이라 버티기가 힘들었다.

공사다망한 국가의 후계자를 앉혀 놓고 ‘저희 공녀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색깔은 노란색이시고 체크 무늬를 사랑하십니다. 체크 무늬에 병아리가 수 놓여 있으면 자지러지시지요.’ 같은 이야기를 하기엔 그는 자기검열이 지나치게 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데 마레 백작의 질문에 최대한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으로 답하는 것으로 알폰소 왕자의 시간을 아껴드리는 쪽으로 타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타란토 공녀는 애초에 그렇게 취향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공작가의 대리인은 왕자가 지쳐 쓰러질까 봐 걱정했지만 사실 이 방에서 가장 체력이 좋은 사람은 알폰소 왕자였다.

눈으로 흘깃 보기만 해도 자명했다.

옆에 앉은 데 마레 백작의 두 배 반은 너끈히 넘을 것 같은 흉통에, 실제로 전투에 쓰였을 잔근육들이 두툼한 공단 재질의 예복을 뚫고 눈에 보였다.

근육이 저렇게 많으면 배도 빨리 고파질 것 같다. 공작가의 대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간단하게나마 마실 것을 준비해 올까요? 애프터눈티와 간식을 가져오겠습니다.”

“간식. 좋지.”

알폰소 왕자의 눈에 오늘 처음으로 반짝임이 깃들었다.

타란토 공녀가 좋아하는 옷감이니 색이니 할 때는 약간 죽은 생선 같아 보였던 청회색 눈이었다.

공작가의 대리인은 간식 이야기에 왕자 저하께서 반색하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 마레 백작께서는 간식류나 티 샌드위치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십니까?”

그녀는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티 샌드위치 쪽으로 부탁드릴게요.”

“⋯⋯그럼 나도 티 샌드위치 쪽으로.”

공작가의 대리인은 굳이 메뉴를 통일시켜 주시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려다가, 왕자에게 창피를 줄까 봐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모든 종류를 다 가져오면 되지 뭐. 타란토 공작가에는 손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한 모든 종류의 다과가 다 준비되어 있었다.

공작가의 대리인이 드디어 자리를 비웠다. 타란토 가의 수도 별장 응접실에는 단둘만 남았다.

알폰소가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가가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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