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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09화 (309/733)

<제309화> 자꾸만 겹치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공포감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주술이 잘못된 건가? 여전히 보이는 거야? 오 안 돼, 그럴 순 없어.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여자는 최악의 신붓감이다.

세기의 미녀이건 왕의 딸이건 상관없다. 시장가치가 제로로 수렴하는 것이다.

절대로 남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폰소에게는 더더욱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사람과 마주친 작은 야생동물처럼 순간 굳었다.

그리고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알폰소는 성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단 한걸음에 테이블 이쪽으로 건너왔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왼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는 다가왔고, 그녀는 피했다. 그러나 피하려던 그녀는 소파 등받이에 막혔다.

알폰소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눌린 아리아드네 위로 소파에 한 발을 올린 채 그녀의 손을 높게 잡아 올린 알폰소의 몸이 겹쳤다.

“아직도 네 계모는⋯⋯!”

거기까지 말한 그는 위화감을 느끼고는 입을 닫았다. 그 역시, 과거에 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계모는 죽었다. 죽은 지 오래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체온과 체온이 맞닿았다.

그는 그녀의 손의 온도가 차갑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손의 온도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손은 왜 그래?”

아리아드네 역시 어딘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알폰소가 잡아들어 올린 그녀의 손은, 왼손이 아닌 오른손이었다.

“내 손⋯⋯.”

그녀는 뒤늦게 알폰소에게 잡힌 자기 오른손을 보았다. 마차 사고에서 얼굴을 가리느라 그녀의 양팔에는 파편에 생채기가 났었다.

사실 마차가 옆으로 굴렀으니 잘못 짚어서 멍이 들었을 수도 있고. 전신이 그 모양이라 정확히 뭐 때문에 알폰소가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살펴본 자기 오른손은, 약지를 따라 팔꿈치까지 희미하게 보라색과 노란색 멍이 들어 있었다.

“마차 사고⋯⋯. 며칠 전에 마차 사고가 있었어서.”

알폰소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아리아드네가 황급하게 덧붙였다.

“경미한 사고였습니다, ⋯⋯저하.”

알폰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경미했다는 평가절하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두는 거리감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손의 압통에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아.”

그녀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작은 한숨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알폰소는 손의 힘을 바로 풀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바로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손등에 입술을 맞출 때와 같은 각도로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어 든 알폰소는 손목을 옆으로 돌리며 상처를 주의 깊게 살폈다.

“요즘 경미한 마차 사고는 탑승객한테 이런 상처를 입히나?”

말수가 없다는 게 중평인 왕자이자 전장의 기사는 숙녀의 손목을 상세히 살피며 자기가 평소에 할 하루 치 말을 그 자리에서 다 했다.

“어딘가에 체중을 실어 짚다가 입은 상처고⋯⋯. 긁힌 정도가 아니야.”

그는 그녀의 팔 안쪽 근육을 눌러보려다가 말았다. 다시 아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말했다.

“사실 진짜로 다친 곳은 손이 아니라 팔꿈치.”

이대로라면 사고 현장을 추리하는 걸 넘어서 재구성이라도 할 기세였다. 아리아드네는 반쯤 포기하고 실토했다.

“⋯⋯전복사고.”

전복사고라는 말에 알폰소의 눈이 커졌다.

“마차가 넘어졌어요.”

알폰소의 언성이 높아졌다.

“데 마레 백작가는 대체 주인 보필을 어떻게 하는 거지?”

생전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던 사람이 그러니 더더욱 위협적으로 들렸다. 둘은 여전히 소파에 딱 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의 호흡이 빨라지고 맥동이 올라가는 흥분이 얇은 공기층을 넘어 전염되듯 느껴졌다. 눈앞의 남자는 지금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알폰소, 그러지 마.”

아리아드네는 본능적으로 가장 친숙한 호칭을 써서 알폰소를 말렸다. 그녀는 그를 달래려 눈을 보고자 했다.

앞으로 내민 상체가 그의 정강이 언저리에 밀착했다. 귀부인의 공단 드레스와 군인의 가죽 부츠가 맞닿으며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우리 식솔은 최선을 다했어.”

사정하듯, 달래듯, 노래하듯 어르는 목소리였다.

“지금 이게 단순 관리 소홀 사고가 아니라 막기가 어려운 거 같아.”

“단순 사고도 아니라고?”

알폰소의 심경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누가 자꾸 나를 노리는 게 아닐까 싶어.”

급기야 알폰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다고?”

스타카토로 딱딱 떨어지는 어미가 왕자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대변했다.

“누가. 너를. 노린다고?”

청회색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것 같았다.

“누군지는 몰라.”

아리아드네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려다가 물리적으로 막혔다. 알폰소가 손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이 막힌 건 어딘지 어색했다. 하지만 당황한 그녀는 지금 정확히 뭐가 잘못됐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노리는 상황에 알폰소는 화가 났다. 아리아드네는 그 상황을 해소시켜 주면 그의 화가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다.

“금방 찾아낼게. 알아서 할게.”

생략된 뒷말은 ‘그러니까 화내지 마, 네가 화내는 걸 보는 게 무서워’였다. 그 말까지 다 했어야 했다.

“알아서. 한다고?”

알폰소의 목소리는 한 톤 더 낮아졌다. 이젠 분위기가 정말 위압적이었다.

정치적인 자리에서야 자기보다 더한 상대들을 편하게 가지고 노는 그녀였지만 이 분위기는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사적인 자리도 공적인 자리도 아니었고, 레오 3세를 상대하듯이 이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쳐내거나 약점을 잡아 쫓아낼 일도 아니었다.

어쩔 줄 모르게 된 아리아드네의 눈가에 습기가 찼다.

“화내지 말아줘.”

그녀로서는 왜 알폰소가 그녀를 앞에 세워두고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마차 사고를 당했다는데, 누가 그녀를 노린다는데 안됐다, 힘들겠다는 이야기가 먼저 아닌가?

“내가 지금⋯⋯!”

알폰소의 언성이 드디어 올라가려고 할 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서류를 산더미같이 들고 들어온 타란토 공작가의 대리인이었다.

가슴팍에 얹은 서류는 그의 얼굴을 다 가리고 정수리 위에까지 올라왔다.

서류 더미 꼭대기에는 샛노란 체크 무늬 원단과 병아리 인형이 올라가 있었다.

“이게 비앙카 공녀님께서 좋아하시는 원단의 샘플인데, 데뷔탕트 무도회의 데코레이션도 이걸로 하시고 싶어하실지는 따로 여쭤봐야⋯⋯. 응?”

공작가의 대리인은 뒤늦게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그는 서류 더미 뒤에서 고개를 옆으로 빼냈다.

“아무 일 없는 거지요?”

왕자와 백작은 처음과 똑같이 테이블 양쪽에 앉아 있었다.

약간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그런데 역시,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오?”

데 마레 백작과 알폰소 왕자의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원래 왕자가 창가 쪽 자리, 백작이 난로 쪽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지금은 둘이 반대였다.

“해가 드니까 왕자님께서 숙녀분과 자리를 바꿔 주신 거로군요. 세상에, 배려심도 깊으셔라.”

공작가의 대리인은 뒤뚱대며 서류를 티 테이블 한쪽 구석에 내려놓았다.

사실 왕자가 백작의 의자로 돌진한 상황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걸 알아챈 백작이 필사적으로 창가 쪽 소파로 달아난 것이지만 그가 진실과 가까워질 방도는 없었다.

“그냥 말씀을 하시지 그랬어요. 커튼을 치면 되는걸.”

공작가의 대리인은 창가로 가 커튼을 매만져 속커튼을 쳤다. 실내로 들어오는 햇살이 부드럽게 반토막이 났다.

“그럼 마저 회의하실까요?”

* * *

그는 팔라지오 카를로에서 나설 때까지는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용무를 보러 왕궁을 나선다고 말했고, 출입 명부에 이름을 적었고, 기사단의 정복을 입고 똑바로 걸었다.

하지만 왕궁 밖 땅을 밟자마자 엘코는 거친 재질의 갈색 망토를 뒤집어썼다.

키는 크지만 외모는 평이한 엘코가 서민들이 애용하는 평범한 망토를 걸치자 외팔도 애꾸눈도 가려져 그는 정말로 특징 하나 없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고 말았다.

왕궁 안에 유일하게 장애 있는 사람으로 모두의 눈에 항시 띄는 그로서는 되레 편안한 일이었다.

그가 타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면서 찾아간 장소는 카스텔 라비코 외곽의 빨간 벽돌 집이었다.

겉으로는 아주 평범한 중산층의 거주지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간 엘코 경을 맞이한 것은 심지어 머리가 벗겨진 수사님이었다.

“들어오시게, 들어오시게.”

사람 좋아 보이는 딸기코 대머리 수사님은 넉넉한 표정으로 엘코를 집 안으로 들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중년 수사는 꼼꼼히 집 안의 커튼을 치고는 짜증과 외국어 억양이 짙게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행이 붙진 않았겠지?”

“사람을 뭘로 보고.”

“뭘로 보긴. 여자 하나 못 죽인 병신으로 보지.”

중년 수사는 곰방대를 집어들어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였다. 상대에게 권하지는 않았다.

“아직 보고의 답이 오진 않았는데, 위에서 실망이 크실 거야.”

“누구 때문에 실패한 건데.”

엘코 경의 음성에도 짜증이 묻어났다.

“어떤 머저리들이 죽이려다 실패해서 독이 잔뜩 오른 걸 몰래 자연스럽게 죽이려니 어렵지. 바보같이 손만 안 댔어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었어! 처음 실패한 다음에 그 집안에 경계가 얼마나 올라간 줄 알아?”

할 말이 없었는지 수사는 애꿎은 곰방대만 뻑뻑 빨았다.

중년 수사는 얼핏 봐서는 산 카를로에 흔한 하급 성직자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어딘가 이상했다.

그의 사제복은 에트루스칸에서 입는 것과는 허리띠를 묶는 방법이나 내피의 재질 같은 것들이 달랐고, 무엇보다 이 시간은 에트루스칸 왕국의 하급 성직자라면 예배당에 소속되어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미사 준비를 돕든, 수도원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든, 골방에서 묵언수행을 하든, 평일 대낮에 놀고 있을 수 있는 에트루스칸 성황청 소속의 하급 성직자는 없었다.

“⋯⋯이제 어쩔건데.”

수사는 이빨 사이로 단어들을 내뱉었다. 새어 나오는 담배 연기는 덤이었다.

“그 여자가 다시 알폰소 왕자한테 접근하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엘코 경은 몸서리를 쳤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왕자에게 입이라도 턴다면 책임 소재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더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목숨을 간절히 원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엘코 경 자신이었다.

“고민해 봐야지.”

“고민해 봐야지? 속 한번 참 좋으슈?”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났는데!”

엘코 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팩, 냈다.

“‘그 물건’은 준비해 왔어?”

중년 수사가 답하지 않자, 그는 재차 재촉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했던 그 물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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