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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10화 (310/733)

<제310화> 지나치게 좋은 제안

엘코 경은 벌컥 성을 냈다.

“죽여 없애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후방 지원도 안 해주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는 상대방을 믿지 않았다. 협력하고 있는 처지이긴 하지만 갈리코 놈들은 신의라고는 모르는 야비한 자들이었다.

이 일이 어그러졌을 경우 저쪽은 꼬리를 자르고 튀면 된다.

윗선은 모르는 일이라고 오리발을 내밀고 아랫선은 재빠르게 성문 밖으로 나가 도망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가 그의 조국이었고 난 곳은 아니지만 그가 자란 곳이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다 불고 자수할까?”

지금 자수한다고 멀쩡할 수 있을까? 내쫓기는 건 당연하고 제아무리 자비로운 알폰소 왕자라도 그의 목을 붙여서 보내줄지 확신이 없었다.

포악한 군주라면 그의 사지를 잘라서 내다 버리고도 남을 일이다.

엘코 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폭군이 와도 이제 아무도 그의 사지를 잘라 내버릴 수는 없다.

‘이미 한 개가 없거든.’

몸도 성치 않은 외팔이로 왕궁에서 내쫓기면 검은커녕 쟁기도 들지 못하는 몸, 의탁할 데라곤 없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얼어 죽나 왕궁에서 참수당해 죽나 그게 그거다. 그렇지만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혼자 죽느냐, 갈리코의 외드 대공 일당, 정확하게는 라리에사 대공녀까지 다 껴안고 죽느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일이었다.

중년 수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천천히 거실 서랍에서 아주 큰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 엘코 경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다. 짜 맞추느라 고생했어.”

엘코 경은 일체의 치하나 감사 인사도 없이 서류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중년 수사의 얼굴에 혐오감이 스쳤다. 일말의 인간적 정도 없는, 정말로 상대방을 쓰레기같이 여기기 때문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엘코 경의 면상에 내던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말로 전해야 하는 종류의 일이었다.

“네가 부탁했던 자리도 마련해놨어. 그쪽에서 승낙만 하면 바로 서품받고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잘됐군.”

곧 죽어도 고맙단 이야기는 없는 놈이었다. 중년 수사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차라리 밤길에 확 죽여버리는 편이⋯⋯.”

“그놈을 무슨 수로 죽여?”

엘코 경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놈을 죽일만한 실력자가 있었으면 계집을 죽이는 데에 투입했었어야지.”

이 이야기만 나오면 수사는 할 말이 없었다. 한참 곰방대 끝만 물어뜯던 그는 겨우 한마디 했다.

“⋯⋯‘그분’께선 몸이 안 좋으셔서 더는 이쪽 일에 관여하지 않으셔.”

엘코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이젠 다 정리하고 그 윗선에서 지령을 내리시기로 했어.”

엘코는 충동적이고 머리가 나쁜 건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니 책임자가 ‘그분’에서 ‘그분의 모친’으로 바뀌어도 어차피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입 밖에 내뱉으려던 행동을 멈추게 한 건 과거에 들었던 말 한 줄이었다.

- “넌 네 어미를 닮았으니 만고에 쓸모가 없다.”

동일한 내용이 그가 제일 듣기 싫어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결국엔 똑같은 사람이 됐군.’

어쩌면 혈통으로 흐르는 악덕은 악의 꽃처럼 특정 나이를 지나면 제어할 수 없이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미를 닮은 무능과 배신이 꽃필지 아비를 닮은 비정함이 꽃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엘코 경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치웠다.

“두 번째 건은 처음에 얘기했던 대로 진행시켜. 지금 당장이라도 해줬으면 좋겠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궁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수사가 황급하게 물었다.

“계집은?”

엘코는 짜증스레 답했다.

“알아서 처리한다.”

죽이려던 시도가 두 번 실패했다. 머저리가 아닌 이상 저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였다.

물리적으로 치울 수 없다면 믿을 수 없게라도 해서 분리를 시켜 놔야 한다.

지금보다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야 했다. 엘코 경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관련된 자를 다 죽여 입을 막아버리는 게 틀린 이상 이 좁은 산 카를로 바닥에 영원한 비밀이라는 게 있을까.

“대공녀는 대체 언제쯤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는 거야.”

알폰소 왕자가 라리에사 대공녀와 혼인하고, 그들이 제대로 된 부부가 된 다음에 이 일이 밝혀지는 게 엘코가 유일하게 살아남을 방도였다.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자리를 잡은 라리에사 대공녀, 아니 왕자비가 저 사람이 우리를 위해 노력해 주었고 결과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었으니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구명에 나서 주면 된다.

지금 가진 것을 모두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새 시대의 왕비의 심복이 되는 길이었다.

갈리코 인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건 끔찍했지만 에트루스칸 왕궁의 일부가 된 여자라면 좀 나을 것이다.

“너 따위가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중년의 수사는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엘코 경은 울컥했지만 속으로 스스로를 다스렸다. 어차피 저놈도 모를 정보다.

“뭐든 빨리하라고 해, 빨리.”

라리에사 대공녀는 올해로 벌써 스물세 살이었다.

세월은 빠르니 수녀원에 들어가야 하는 나이로 통용되는 스물다섯 살이 코앞이었다. 너무 늙어서 석녀가 되면 어쩌려고 이렇게 미룬단 말인가?

“쓸모없는 간섭 말고 썩 꺼져.”

일단 그가 거하게 벌인 거짓말의 첫 번째 회수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여자가 가져왔던 황금은 에트루스칸 성황청의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안 닿는 자—그녀의 아버지이자 추기경—가 조만간 왕자와 독대하게 될 예정이다.

“이 더러운 연초 구덩이에서 꺼지는 게 내 유일한 소망이다.”

엘코 경은 다시금 그에게 자유를 주는 갈색 망토를 뒤집어 썼다.

“먼저 접선하기 전에는 연락하지 마.”

그는 문을 열고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 * *

라파엘은 꽤나 오랜만에 데 마레 대저택에 발을 들였다. 달라진 것들이 많았다. 모르는 얼굴들이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아니, 아는 얼굴이야.’

그런데 여기 있어야 할 아는 얼굴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라파엘의 기억력에 갑자기 문제라도 생긴게 아니라면 여기 파견된 사람들 중 몇몇은 왕자궁 소속이었다.

도대체 유부남 왕자의 수하들이 여백작의 자택에서 할 일이 뭐가 있는가.

심지어 아리아드네는 최근에 그를 잘 만나주지 않았다. 라파엘의 기분이 점점 더 저조해져 갔다.

‘이거 때문이었어?’

다행히 기분 나쁜 구면들은 저택 외부에서 순찰을 돌 뿐이었고 저택 안에는 데 마레 가문의 식솔만 있었다.

그는 허튼 생각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한 번 마음에 스며든 기분 나쁜 생각은 잘 빠져나가지 않았다.

“라파엘!”

그러나 막상 서재에서 만난 아리아드네는 그를 기쁘게 맞이해 주었다.

“오늘 학교 일로 의논이 필요하다고 하셨었지요?”

스쿠올라 디 그레타 핑계를 대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으니까 대충 둘러댄 말이다.

“급해요?”

“급하다기보다는⋯⋯.”

스쿠올라 디 그레타에 관련해서는 라파엘에게 거의 전권이 다 쥐어져 있었다.

사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닭 잡는 데에 동원된 소 잡는 장인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간단한 글자와 산수를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요, 남는 시간에는 교재를 집필하다가 그만 학년별 커리큘럼의 수립까지 완료해 버렸다.

이제 새로 들어오는 선생은 라파엘이 남긴 자료에 기반해서 순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될 정도로 학교의 기반이 잘 잡혀 있었다.

“제의가 왔어요.”

“어떤⋯⋯?”

“제가 원래 꿈꾸던 자리에 대한 제안이 왔네요.”

* * *

“라파엘!”

“가스톤.”

파두아의 신학대학 동기가 라파엘을 찾아온 것은 다소, 아니 매우 뜬금없는 일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갑자기 방문하게 된 거야.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거의 5년 넘게 편지 한 통 없던 상대였다. 친구라기보다는 동창이라는 단어가 좀 더 어울렸다.

“나도 갑자기 대주교님의 명을 받고 내려온 참이야. 산 카를로라니, 상상도 못 해 봤는데.”

가스톤은 라파엘과 달리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모국인 갈리코 왕국으로 돌아가 그쪽 대주교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발데사르 가의 하녀가 놓고 간 따끈한 차를 양손에 감싸 쥐는 시간마저 아까웠는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구에랭 대주교께서 함께 일할 사람을 찾고 계셔.”

구에랭 대주교라면 갈리코 왕국의 실력자였다. 조만간 추기경 공석이 나면 승진할 사람으로 모두가 점찍는 자이기도 했다.

“젊은 수사, 주로 신학 연구 쪽에서 대주교님을 뒷받침하게 될 거야.”

젊은이들이 꿈에 그리는 자리였다.

말단 사제로 입직하게 되면 몇 년 동안은 오래된 책을 필사한다거나, 심지어는 수도원의 포도밭을 가꾸거나 하는 허드렛일로 차출되어 일하기가 일쑤였다.

서품을 받자마자 바로 중앙에서, 그것도 다들 선호하는 신학 연구 쪽에서 시작하는 건 몇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좋은 자리다.

하지만 라파엘은 크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난 아직 부제 서품을 안 받아서.”

사제 서품을 받고 수련을 모두 하고도 마땅한 자리가 안 나서 어디 수도원 구석에 처박혀 고서 필사하는 사람들이 한가득한데 진입 자격조차 없는 민간인에게 이런 제의가 왔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가스톤이 그를 특별히 챙겨준 거라기엔 둘은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안 받았어?”

가스톤은 진심으로 놀랐다.

파두아 신학대학의 해당 기수 동기 중 진지하게 공부했던 친구들은 전부 다 몇 년 전에 이미 사제 서품은 다 완료했기 때문이었다.

“난 자네라면 당연히 받아놨을 줄 생각했는데.”

“집안의 후계자 문제도 있고.”

“아, 자네에겐 또 그런 문제가 있었지.”

가스톤은 입으로는 납득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전혀 설득되지는 않았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애초에 집안의 후계 따위는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배짱으로 신학대학에 몰래 전과해서 들어왔었다. 동기들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자네도 알잖아. ⋯⋯이거 아주 귀한 기회야.”

그는 차로 목을 축였다. 다들 가고 싶어 하는 자리를 들고 와서 싫다는 친구한테 매달리듯이 설득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실 구에랭 대주교께서 자네를 직접 지목하셨어.”

“나를?”

라파엘의 붉은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이건 그도 생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도대체 왜?”

“내가 묻고 싶은 말일세. 짚이는 거 없나?”

이런 식으로 꽂아 넣는 자리는 보통 지체 높은 가문의 둘째나 셋째, 혹은 추기경의 사생아를 위해 만들어지는 보직이었다.

가스톤은 ‘부모님께 밉보인 거 있나, 가문에서 쫓아내시려는 건가’ 같은 농담은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들은 그 정도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정말로 발데사르 후작 내외가 라파엘을 치워버리려고 구에랭 대주교에게 청탁을 넣은 거라면 어떡하나.

라파엘 본인도 이게 왜 자기한테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구에랭 대주교? 확실해?”

“그럼 내가 설마 내가 모시는 사람 이름도 헷갈리겠어? 옆에 두고 크게 쓰고 싶으니 에트루스칸의 발데사르 후작가의 라파엘에게 의향을 묻고 오라고 하셨다네.”

가스톤은 몇 번이나 거듭 강조했다.

이건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젊은이에게는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질 만한 행운이다, 발데사르 가문이 훌륭한 가문이기는 하지만 갈리코의 대주교에게 끈을 댈 만한 가문은 아니다, 정말로 구애렝 대주교께서 자네를 좋게 보신 것 같은데 이런 기회는 놓치면 안 된다, 운운.

그는 설득의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심지어, 반년 뒤에는 감목대리 자리가 약속되어 있어.”

“감목대리⋯⋯?”

이 제의에는 라파엘도 적지않이 놀랐다.

감목대리는 자기의 교구를 정식으로 하사받은 구역의 직권자는 아니었지만 여러 교구를 묶은 구역에 대한 사목행위와 관리감독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책임은 없고 마음껏 남에게 훈수는 둘 수 있는 자리였다.

부패 성직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보직이기도 했다. 일은 쉽고, 거들먹거리기는 좋고, 양심만 버린다면 큰 부자도 될 수 있다.

“이걸 거절한다면 자네는 바보야, 라파엘.”

라파엘은 천천히 대답했다.

“⋯⋯확실히, 저걸 거절하는 성직자 지망생이 있다면 천하의 바보 천치가 맞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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