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1화> 욕망을 갈무리하는 법
“⋯⋯아주 좋은 기회네요.”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의 말에 조용히 답했다. 라파엘이 힘을 써준 덕택에, 스쿠올라 디 그레타는 이제 슬슬 안착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그를 더 붙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라파엘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훌륭하게 마쳤다.
게다가 그녀가 라파엘에게 더 줄 수 있는 것 또한 없었다. 커리어, 명예, 귀족 사회에서의 입지, 아무것도.
“축하드려요.”
아리아드네는 찻잔으로 입술을 축였다.
어쩌면 잘 된 것일는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가 라파엘에게 줄 수 있는 건 단 하나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건넬 의향이 없는 것이었다.
공정한 거래가 불가능하다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런 것은 나중에 어느 쪽으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 된다.
아리아드네는 긴 생애 동안 이미 충분히 그런 상황들을 보아 왔다.
“언제 출발하기로 했나요?”
그녀는 빠르게 계산을 돌렸다. 그의 빈 자리를 다 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스쿠올라 디 그레타의 교장 자리는 애초에 라파엘 같은 고급 인력이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비슷한 사람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꾸려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매가 착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차분해진 기색은 다른 누구보다도 라파엘이 제일 먼저 알아챘다.
“내가 어디를 가나요.”
그는 예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내 자리는 여기인걸요.”
포슬포슬한 집토끼 같은 웃음이었지만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바로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가 남기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사실 바라지도 않았다는, 그런 몸짓이었다.
세심한 라파엘은 그 미세한 움직임 역시 포착했다. 그는 심장이 찌르듯이 아프다는 말이 그저 비유적 언어 그 이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스쿠올라 디 그레타의 학생들이 너무 예뻐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개중 인간적으로 정이 붙은 아이들 한둘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사람은 출신 성분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여겼다. 눈 앞의 여자만 빼고.
“내가 지금 자리를 비우면 아이들은 누가 챙기나요.”
누가 챙기든 아무 상관 없지만. 어차피 산수나 좀 배워서 상단에서 일할 애들 아닌가.
“하루가 다르게 배우는 친구들인데, 지금 좋은 선생이 붙는 것과 자습으로 때우는 건 천지 차이예요.”
될 놈은 낯에 밭을 갈다 가도 되고 안 될 놈은 개인 강사로 대륙 최고의 석학을 붙여놔도 안 된다는 게 라파엘의 지론이었다.
덧셈 뺄셈 따위는 사실 선생도 필요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서 책 하나 던져주면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무슨 말이건 할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 앞에서 자기의 검은 속이 들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정말⋯⋯. 괜찮겠어요?”
아리아드네가 조심스레 물었다. 라파엘의 귀에는 그 목소리의 거리감이 천둥처럼 울렸다.
그가 학교에 남아 있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까지 들릴 정도였다.
“저 때문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시면⋯⋯.”
“아니에요.”
라파엘은 그녀에게 장담하듯이 다시 한번 꾹 눌러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을 위해 남고 싶어요. 당신 옆에서 당신 목소리를 듣고, 웃음을 보고, 사소한 일상을 나누면서 살고 싶습니다.
성직자의 길로 떠나가면 돌아올 수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하루라도 더, 가망이 있는 상태로 살고 싶습니다.
정직한 마음의 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졌다. 여운이 썼다. 이 상태대로라면 절대로 전달하지 못할 이야기다.
라파엘은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왕자의 기사단 일원임이 틀림없는 무장한 남자들이 아리아드네의 서재 창문 밖으로 바로 보였다.
데 마레 저택에서 돌아다니는 왕자의 기사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놈들이 도대체 왜 여기서 돌아다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유부남 놈이 보낸 수하를 집 안에 들인 그녀에게마저도 약간의 원망이 들었다.
하지만 감히, 포로가 된 그가 그녀의 행사(行使)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녀가 그를 밀어내는 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무엇이든, 그대의 마음이 흡족한 쪽으로.”
그의 말은 다짐 같기도 했고 체념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구에랭 대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한 판 승부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었다.
* * *
알폰소, 아리아드네, 공작가의 대리인 삼자가 처음으로 모였던 그날 이후로도 타란토 공녀 비앙카의 데뷔탕트 무도회 준비는 계속되었다.
구성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왕자, 백작, 그리고 공작가의 대리인.
기안 및 실무는 데 마레 백작이, 주인공인 타란토 공녀와의 커뮤니케이션은 타란토 공작가의 수도 대리인이 맡았다.
조율할 것이 많아 기안자는 물론이고 중간자도 할 일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왕자는⋯⋯. 그냥 앉아 있었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위치에 있기는 했으나 정말로 무도회 준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성심성의껏 참여하려 했지만 그가 이 방면에 재능이 전무하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 “그건⋯⋯. 꼭 필요할까요.”
- “저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그렇게 하면 공녀님께서 우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비슷한 것이 되어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굳이 역할을 부여하자면 호위기사 비슷했다.
“왕자 저하. 제발 마차에 타시지요.”
공작가 대리인은 자기가 ‘제발’이라는 단어를 진짜로 입 밖으로 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제가 마차에 타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저하께서 말을 타고 마차 주변을 돌고 계시니 그게 마치⋯⋯.”
마치 왕위계승자를 개인 수족으로 부려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걸로 으스대는 사람도 있겠으나 공작가의 대리인은 소심한 사람이었다.
당장이라도 왕궁에서 왕족모독죄로 근위병이 쫓아온다면 할 변명이 없었다.
‘그러고 계시니 왕자님이 제 호위 같잖습니까’라는 말을 도저히 못 꺼냈던 공작가 대리인은 울상으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좀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 체했다. 내가 불편한 것보다는 공작가 대리인이 좀 불편한 게 나았다. 좁아터진 마차에 같이 타고 갈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도대체 뭐지?’
인생을 함께해야 할 여자가 있으니 나에게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던 남자가 내 주변을 계속 맴돈다.
알폰소는 자신의 백마를 타고 아리아드네가 타고 있는 하얀 마차 주변을 정말 적군을 경계하는 것처럼 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데 마레 대저택에는 왕자가 보낸 기사단원들이 기존 저택 경호원 사이에 섞여서 24시간 보초를 서고 있었다.
과연 실전에서 갈고 닦인 왕국군의 정예는 기강 면에서 백작가의 사병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보초를 서는 게 본인들 입장에선 완전한 허드렛일일 텐데 싫은 티 하나 내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아리아드네는 묻고 싶었지만 아직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라고 묻는 순간 그가 ‘아 그래, 내가 선을 넘게 친절했나 보군. 앞으로는 예의를 지키도록 하지.’라고 뒤로 싹 빠져버리는 게 두려웠다.
그냥 눈을 감고 있으면 이 순간만큼은 지속된다. 고백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친구가 되어 주변을 맴돌 수 있는 법이다.
그녀는 결국 자기도 모르는 새 라파엘과 똑같은 선택을 했다.
고래 등쌀에 등이 터진 새우만 불쌍한 목소리로 왕자를 불렀다.
“저하⋯⋯?”
알폰소는 공작가 대리인의 읍소를 깔끔하게 씹었다. 어차피 지금 목적지에 거의 다 왔기 때문에 내리고 타기도 번거롭다.
“왕자궁에 도착했습니다.”
알폰소 왕자 뒤에서 갈색 말에 올라타 동행하던 만프레디 경이 마차에 탄 일행에게 알렸다.
“베르나르디노 경께서 준비를 다 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들어가서 살펴보세요.”
그는 마차에서 내리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을 부축하며 집주인처럼 덧붙였다.
“편하게 보시면 됩니다, 편하게.”
진짜 집주인인 알폰소 왕자가 만프레디 경을 쏘아보았다. 만프레디 경이 아리아드네의 장갑 낀 오른손을 왼손으로 높이 잡고 있었다.
만프레디 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알폰소 왕자를 돌아보았다.
“왕자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그는 아리아드네가 마차에서 안전하게 내릴 때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알폰소에게 물었다.
“아침을 덜 드셨어요? 왜 기분이 저기압이시지?”
알폰소는 두툼한 입술을 깨물었다.
눈치가 더럽게 없는 건지 더럽게 빠른 건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만프레디. 내일 훈련 때 두고 보자, 만프레디. 살려 두지 않겠다 만프레디.
“맞다, 저하. 분부하신 것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자기의 운명을 모르는 만프레디 경은 깐족거렸다.
“내 지시?”
“그⋯⋯.”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는지 만프레디 경은 알폰소 왕자의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말 타고 들어오시면 땀 날 테니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두라고 하셨잖아요.”
저 말마저 대놓고 나불거렸다면 내일 훈련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알폰소는 성검이라도 빼 들고 만프레디를 쫓아갔을 것이다.
연병장까지 달아나면 거기서 구보 40바퀴 정도 돌리면 딱이겠다.
다행히 만프레디는 이 말을 아리아드네의 귀에 들리지 않게 전했고—본인은 몰랐지만—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알폰소는 미간을 찡그린 채 답했다.
“20분 안으로 돌아온다.”
“예이, 예이.”
알폰소 왕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이제 정말로 만프레디의 세상이었다.
그는 아리아드네와 공작가의 대리인을 왕자궁 내부로 안내하며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사용하실 만한 홀은 두 개가 있습니다. 한 번 둘러보시고 더 마음에 드시는 쪽으로 골라 주세요.”
오늘 데 마레 백작과 타란토 공작가의 대리인은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 장소로 왕자궁을 개방해 주겠다는 알폰소 왕자의 제안에 따라 홀을 살펴보러 왔다.
데뷔탕트 무도회 준비에 있어서 첫걸음은 아무래도 장소를 정하는 것이었다.
완벽한 베뉴란 존재하지 않았고, 장소 선정에는 많은 사항을 고려해야 했다.
‘꼭 왕궁에서 해야 할는지⋯⋯.’
아리아드네는 막상 왕자궁에서 파티를 연다는 아이디어에 크게 설득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왕궁을 빌릴 수 있다는 이야기에 공작가의 대리인은 크게 기뻐했다.
왕궁이 타인의 파티를 위해 공간을 개방하는 일은 몹시 드물었으므로, 외부에 타란토 공작가의 위세를 드러내기에 제격이었던 것이다.
아리아드네 역시 공작가의 그런 생각은 십분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이것보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만프레디 경이 이끄는 일행이 왕자궁의 메인 홀인 ‘별들의 방’으로 향하는 회랑을 걷고 있을 때였다.
만프레디 경이 아리아드네에게 생소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 왜 벌써 돌아왔어?”
남자는 만프레디 경에게 답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개인적인 용무가 일찍 끝났습니다.”
별 볼 일 없는 그 남자가 아리아드네의 눈길을 끈 것은, 우선 신체의 이형(異形) 때문이었다. 그는 팔 한쪽과 눈 하나가 없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그에게 특이한 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기억에 남지 않았다.
왕궁은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출입할 수 없다. 상서롭지 못하다는 것이 그 오랜 전통의 이유였다.
사용인은 장애가 있다면 궁을 떠나야 했고 신하도 예외가 아니었다.
굳이 예외를 찾자면 직계 왕족이나 아니면 아예 왕궁 광대 정도일 텐데, 저 남자는 둘 중 아무것도 아니어 보였다.
저 평범한 남자가 계속 거슬리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는 아리아드네 쪽을 절대로 보지 않으려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눈으로 훑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도 느껴지는 눈알의 움직임이 있는 법이다.
그의 시선이 불쾌해서 아리아드네는 여름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렸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는데, 좀 더 바깥바람 쐬고 오지 그랬어, 엘코 경.”
만프레디 경이 웃으며 외팔이 남자의 어깨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