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마음에 안 차는 수하
눈앞의 남자는 기억에 없었다. 그런데 ‘엘코 경’이라는 이름은 기억이 났다.
그 사람 자체가 인상이 깊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알폰소 왕자가 갈리코로 떠나기 직전, 절절한 표정으로 입에 올렸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편지에서도 그를 언급하기를 잊지 않았다.
- “아리, 나는 갈리코에 가서 엘코 경을 돌려받을 생각이야.”
그가 산 카를로를 떠나던 날 그녀의 침실에 남기고 간 편지, 그러니까 그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써 주었던 마지막 편지에는 엘코 경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 “나 때문에 다친 사람을 그냥 손 놓고 두고 볼 수는 없어.”
수백 번 다시 읽었던 편지였다. 그 이름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눈앞의 키 큰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실 마르그리트 왕비의 내실에서의 기억은 솔직하게 말해 희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리뭉실했다.
강렬한 사건에 대한 느낌과, 어렴풋한 주변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신은 목숨을 구한 후 다가올 사회적 사망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알폰소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마르그리트 왕비는 놀랍게도 차분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자 왕자의 기사 중 한 명이 알폰소 왕자에 대한 충심으로 자신이 대신 갈리코 측에 자수하겠다고 나섰다.
사태 자체는 기억났다. 어떻게 잊으랴. 하지만 사람은 흐렸다. 그녀의 온 신경은 알폰소와 마르그리트 왕비님께 쏠려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보는 엘코 경은 다른 의미가 있었다.
저 사람이었다, 알폰소가 구하러 떠났던 사람은. 그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궁정 안을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도 단번에 이해가 갔다.
알폰소 왕자의 강력한 비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알폰소⋯⋯.’
네가 원했던 걸 이뤘구나. 네가 떠남으로 인해 우리의 관계는 망가졌지만 결국 저 사람은 구했구나.
아리아드네는 회한이라기엔 후회가 없고, 담백하다기엔 지나치게 눅진한 감정에 빠져 말없이 큰 키의, 회색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쪽 팔을 잃고 두 눈으로 앞을 못 보게 되었지만, 엘코 경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저자의 희생으로 인해 그녀 역시도 살아남았다.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만프레디 경이 웃으며 물었다.
“데 마레 백작님, 저 친구를 소개시켜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리아드네는 잿빛 머리카락의 구부정한 남자를 주의 깊게 살폈다. 감사하는 게 옳다. 감사해야 마땅한 상대다.
알폰소가 그를 살려서 데리고 돌아오는 데에 성공했으니 알폰소의 개인적인 목표의 달성이기도 했다. 역시, 축하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걸 승낙으로 받아들인 만프레디 경은 서글서글하게 엘코의 어깨를 탁탁 쳤다.
“엘코 경입니다. 알폰소 왕자님 휘하의 기사이자 심복이죠. 충성심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요!”
엘코의 얼굴에 어쩔 줄 모르는 미소가 걸렸다.
“엘코라고 합니다.”
만프레디는 데 마레 백작을 엘코에게 소개시켜주면서 내심 조금 걱정했다.
엘코는 그녀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는데, 본인 앞에서도 티를 낼까 봐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 앞에 선 엘코는 매우 정상적이었다.
되려 조금 기가 질려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수줍어 보였다.
“저 기억 못 하시죠⋯⋯. 저는 백작님을 전에 뵌 적이 있는데⋯⋯.”
아리아드네 앞에서 말까지 더듬는 엘코는 착한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악어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세련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사교적인 얼굴로, 누가 봐도 예법에 어긋난다는 흠을 하나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애티튜드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코 경.”
그런데 우아한 태도는 깍듯했으되 그녀는 그가 다가서려 하는 시도를 깔끔하게 차단했다.
‘만나서 반갑다’는 그를 전에 본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전에 어디에서 만났냐고 굳이 묻지 않는 것은 그와 더 친밀해질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 뉘앙스는 엘코 본인도 느꼈다.
⋯⋯무시당했다. 엘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가면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한 번 더, 완벽한 사교적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만프레디 경을 바라보았다.
“‘별들의 방’은 어느 쪽인가요?”
수도 귀족의 예법에 익숙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미묘한 의사표시였으되 그 뜻은 명확했다.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겠다.’
그녀의 이 말에는 되레 만프레디 경이 놀랐다.
명문 백작가의 삼남 출신인 그가 이 말을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었다.
실컷 자기 집처럼 편하게 보시라고 자랑한 것과는 달리, ‘별들의 방’에 들어가려면 알폰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 그, 그게. 왕자의 인장으로만 방이 열려서.”
만프레디 경은 진땀을 뺐다.
“그 전에 잠깐 정원이라도 보여드리려고 그랬죠.”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다가 상황이 곤란해졌다. 그렇지만 숙녀의 요청은 들어드려야 했다.
“그, 아 하필이면 날짜가 안 맞네. 지금 튤립은 지고 장미가 폈을 텐데, 그거라도 보러 가실래요?”
“그럴 필요 없어.”
나직한 목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흰옷으로 갈아입고 팔짱을 낀 채 아치에 기대어 있는 알폰소였다.
아리아드네와 나머지 일행이 그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왕자는 뚜벅뚜벅 걸어들어와 거리를 좁혔다.
“저하.”
“왕자님.”
만프레디 경과 엘코 경이 무릎을 굽혀 알폰소 왕자에게 예를 표했다. 알폰소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둘을 훑었다. 그런데 특히, 엘코 경에게 머문 시선이 더 길었다.
“데 마레 백작, ‘별들의 방’으로 내가 안내하지.”
그는 오른팔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 위에 사뿐히 왼손을 얹었다.
흰 예복을 걸친 탑 같은 거구의 왕위계승자 옆에 큰 키의 호리호리한 젊은 백작이 섰다.
그 모습은 그린 듯이 어울려서 엘코 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알폰소는 뒤에 남은 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에스코트해 긴 회랑을 걸었다.
아리아드네의 손을 팔에 얹고 회랑을 걸으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폰소는 자신의 감정이 왜 이런지 바로 느낄 수 없어서 그 찜찜함의 근원을 돌아보았다.
기사들의, 특히 엘코 경의 그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알폰소를 위해 팔도, 눈도, 기사로서의 긍지도 다 내다 버린 그였다. 예사크 전쟁터에서도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알폰소의 부대가 잡음 없이 돌아가게 된 데에는 엘코의 공이 컸다.
알폰소 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로 돌아와 자신의 일정 관리를 떼서 디노 경에게 맡김으로써 엘코에 대한 불신임을 내비쳤다.
엘코 경은 그때도 싫은 티 하나 내지 않았다. 충성심만은 그가 발군이었다.
그런데 동물적인 감각이 속삭였다. 믿지 마, 계속 봐.
이건 전장에서 칼날이 날아오기 직전에 작동하던 육감이었다.
* * *
“뭐? 왕자궁?!”
“네, 그렇습니다 공작부인.”
시녀 데보라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여우 같은 것! 쥐새끼 같은 것! 어쩜 쥐구멍을 찾아도 그렇게 빠져나간담?!”
루비나 공작부인은 타란토 공녀의 데뷔탕트를 쏙 훔쳐 간 왕자와 데 마레 백작을 사보타주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파티 장소로 왕궁의 홀을 노릴 테니 처음에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승인했다가, 데뷔탕트 파티가 임박해 올 때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갖다 대며 장소 사용에 협조하지 않는 게 그녀가 가졌던 첫 구상이었다.
그런데 알폰소 왕자와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타란토 공녀의 데뷔탕트 파티를 아예 처음부터 왕자궁에서 준비한다면 그녀의 계획은 쓸모가 없게 된다.
그녀가 가진 권한으로는 궁전 출입 자체를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거 말고는! 뭐 들어온 소식 없어?!”
“그 외에는 딱히⋯⋯.”
시녀 데보라는 다시 한번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최근 그녀가 제일 잘하게 된 일이 이거였다. 신발 앞코 쳐다보면서 멍 때리기.
“이런 만고에 쓸모없는 것!”
루비나 공작부인은 이를 갈았다. 수하가 무능하니 자기가 머리를 짜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쁜 짓을 할 때는 아이디어가 금방금방 떠올랐다.
“장소를 건드릴 수 없으면 참석자를 건드려야겠다.”
물론 루비나 정도에서 끼칠 수 있는 해악은 한계가 있었다.
루비나 공작부인이 평범한 데뷔탕트 아가씨의 무도회를 망쳐버리는 거야 식은 죽 먹기였다.
데뷔탕트 무도회의 가장 큰 목적은 결혼 상대 물색이다.
괜찮은 혼처인 남자 귀족들의 어머니를 공략해, 그 집안더러 저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압박을 넣으면 끝이다.
하지만 상대는 타란토의 비앙카였다. 어차피 비앙카의 급에 맞는 남자가 없었다.
타란토 공녀가 내국 귀족과 결혼한다는 건 그 귀족 집안 입장에서는 관짝에 누우신 조상님까지 벌떡 일어나 다 함께 잔치를 벌일 일이었다.
“아무리 혼처가 급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홀이 황량하면 그쪽 치들 입장에서도 당황은 하겠지.”
이득을 떠나, 체면 문제였다.
“아무도 안 온 데뷔탕트 파티에서 쪽 좀 팔아봐라.”
루비나 공작부인은 수도 사교계를 꽉 잡고 있었고, 타란토 공녀는 결국엔 지방 사람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란토 공녀에게 기대되는 혼처는 외국의 군주 가문이다.
그녀가 결혼해서 외국으로 가 버리는 경우, 데뷔탕트 무도회가 끝나면 타란토 공녀는 수도 귀부인들과는 아예 얼굴을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누구한테 줄을 서야 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지.”
타란토 공녀가 연 파티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공녀가 인덕이 모자란다는 둥, 사실 그 데뷔탕트 파티를 주최한 데 마레 백작이 인망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둥 같은 소문이 국외로까지 퍼진다면 금상첨화다.
“데보라!”
“예, 공작부인.”
“티 파티 준비를 해라. 내 편지지와 펜도 가져와!”
“다섯 장이면 될까요?”
“넌 뇌가 있어 없어?! 어깨 위는 순 장식이지?! 백 장 들고 와!”
시녀 데보라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아니, 티 파티에는 보통 대여섯 명밖에 초대 안 하시잖아요⋯⋯. 나한테 왜 그래⋯⋯.
“주방에도 연락을 넣어서 하루에 세 팀씩, 열흘은 티파티를 계속할 거니까 준비 단단히 하고 있으라고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비나는 이런 것까지 일일이 다 짚어줘야 하는 자기 신세가 답답해서 한숨을 쉬었다.
마르그리트는 이러고 안 살았던 것 같은데 자기는 얼추 그 위치까지 다 기어 올라왔는데도 박복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고, 짜증 나!”
이게 내가 정부라서 귀족들이 나를 무시해서 일어나는 일인가? 그런 것 치고는 다들 너무 설설 기는데.
루비나는 고민에 빠졌다. 심복이 필요했다. 아주 똘똘하진 않더라도 사람 말은 알아들을 정도는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