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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13화 (313/733)

<제313화> 상냥해야 할 필요성

집에 늘어져서 낮잠을 자던 이폴리토는 현관에서 소란이 나는 걸 심드렁하게 넘겼다.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또 손님들 몰고 왔나 보지.

그런데 소음이 좀 오래갔다. 그는 짜증이 나서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아리아드네도, 아리아드네가 타는 은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인들을 상대로 의기양양하게 꾸지람을 했다.

“아 대낮인데 좀 조용히 있자고! 무슨 왕후장상이라도 모시고 왔나 무슨 이따위 호들갑이야!”

이폴리토의 호통에 집사 니콜로가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그게⋯⋯.”

“이 아비가 못 올 곳에 왔느냐?”

마차 뒤에서 나타난 것은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꼬질꼬질한 몰골에 얼굴은 반쪽이었고, 두루두루 아주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이폴리토는 크게 놀라 외쳤다.

“아, 아버지!”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변명했다.

“오신다면 오신다고 미리 연락 좀 해주시지 않고⋯⋯.”

이미 심기가 상해 있던 추기경은 대뜸 쏘아붙였다.

“내가 온다간다 너한테 보고까지 해야 해?!”

찔끔해서 몸을 웅크린 이폴리토에게 추기경은 다다다 쏴붙였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쳐 자다가 굴러나온 모양인데 넌 밥이나 축내는 거 외엔 재주가 하나도 없지? 그 주제에 거들먹거리면서 하인들을 구박해? 아비도 눈에 안 보이지? 아주 그냥 내 집구석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구나!”

“아버지, 그게 아니고⋯⋯.”

“하는 일이 없으면 짐이나 들어서 옮겨! 아니, 면상도 보기 싫다! 썩 꺼져!”

이폴리토의 노동생산성이 좋지 못한 걸 아주 잘 아는 그였다. 데 마레 추기경은 집사 니콜로에게 짜증스럽게 손짓했다.

“난 올라가 있을 테니 짐은 자네가 알아서 풀게.”

“예. 알겠습니다 예하. 혹시 제가 딱히 주의해야 할 귀중품은⋯⋯.”

불똥은 집사 니콜로에게도 튀었다.

“귀중품? 들고 간 귀중품이 없는데 가지고 돌아온 귀중품은 있겠나? 내가 ‘법황의 홀’을 손에 넣었으면 트레베로에 있었겠지 지금 여기 왔겠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짐이나 풀어! 아무도 내 방에 들이지 마!”

“예, 알겠습니다 예하!”

추기경은 바싹 마른 몸을 힘겹게 이끌고 휘적휘적 이 층으로 올라갔다.

날벼락을 맞은 이폴리토는 눈을 뚱그렇게 뜨고 계단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 * *

왕자와 데 마레 백작이 ‘별들의 방’을 보러 단둘이 떠난 후, 만프레디 경은 엘코 경에게 물었다.

“이봐, 엘코 경. 실물로 보니까 그렇게 이상한 분 아니지?”

만프레디는 엘코가 데 마레 백작에 대한 이상한 편견이 있는 것 같아서 그걸 좀 해소시켜 주고 싶었다.

“상냥하시고, 예의 바르시고, 자네가 생각한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리고 만프레디는 진심으로 엘코가 자기와 동의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아리아드네는 엘코를 궁중 예법에 하나도 어긋나지 않게 정중하게 대했고, 가까이에서 그녀가 뿜어내는 개인적 매력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그 자태를 본 사람은 안 반할 도리가 없다고!’

그러나 엘코의 반응은 무시무시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안토니오 데 만프레디.”

항상 그에게 깍듯하던 엘코 경의 반말에 만프레디 경은 당황했다.

“뭐, 뭐?”

엘코 경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내 앞에서 잘난 척 하지 말라고! 역겨우니까!”

그저 사람 소개를 시켜줬다가 날벼락을 맞은 만프레디 경은 깜짝 놀라 몸을 사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엘코 경.”

“닥쳐, 닥치라고! 네가 내 위에서 윗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거 내가 몰랐을 줄 알아!?”

엘코는 그간 만프레디에게 쌓여왔었던 울분을 한 번에 다 쏟아부었다.

그중 많은 부분은 만프레디가 억울할 만 했다.

“구역질 나는 그 동정 어린 시선 내가 몰랐을 줄 아냐고!!! 검도 못 드니 이제는 내가 쓸모없는 평민 취급을 받아도 싸다 이거냐! 사람 버러지 취급하지 마!”

“엘코 경,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손대지 마 이 위선자 새끼!”

엘코는 위로하려고 다가오는 만프레디의 손을 확 쳐냈다.

그러곤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쿵쿵대는 발소리로 대회랑을 떠나 버렸다.

기겁한 표정의 만프레디의 시야에 역시 눈을 뚱그렇게 뜨고 있는 디노 경이 보였다.

“어⋯⋯. 어디서부터 보셨어요?”

“거의 처음부터.”

“저 친구 왜 저래요?”

디노 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가 오지랖 부리다 똥 밟았네.”

“⋯⋯제가 잘못한 거 아니죠?”

잘못이야 했지만 잘못에 대한 반작용이 지나치게 컸다. 엘코는 왕궁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됐다.

“자네는 너무 순해서 문제야.”

그렇게 말을 하는 베르나르디노 경도 사실 남 탓할 계제가 아니었다.

웬만한 조직이라면 저렇게 구는 놈은 윗선에서 아그작아그작 밟아 놨을 것이다.

꼭 기사단이 아니라 그냥 동성들이 많이 모인 단체라면 무릇 그럼이 마땅하다.

‘그 군기 대장은 내가 해야 할 텐데.’

베르나르디노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전투가 낫지 남이랑 그런 식으로 기 싸움을 하는 건 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만프레디 경이 디노 경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왜 화가 났을까요?”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나? 자네는 그래서 문제라니까?”

“아니,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갑자기 저러니 궁금하잖아요.”

만프레디 경은 엘코가 급작스럽게 분노를 터트리기 직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 후에 갑자기 펑 터졌으니 데 마레 백작님을 보고 그런 거 맞겠죠? 친하게 지내자는 얘기 안 해서 화가 났나?”

나이 마흔 가까운 노총각인 디노 경은 의외로 이런 곳에선 가차 없었다.

아니,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사교계에서 오랫동안 달달 볶이다 보니 그는 부인들의 계산법에까지 통달한 아저씨였다.

“소개한 자네가 잘못했어. 그분이 미쳤다고 엘코랑 격의 없이 트고 지내시겠나?”

순진한 총각인 만프레디 경은 아직도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예? 하지만 저희에겐 잘 대해주셨지 않습니까. 구휼원 봉사활동으로도 이름이 높으시고요. 전 그래서 데 마레 백작께선 신분이나 지위고하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으시는 줄⋯⋯.”

“그건 상대방이 결정할 사항이지 자네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지 않나?”

만프레디 경은 갑자기 깨달은 듯 눈을 끔벅였다.

“그건 그렇죠⋯⋯.”

디노 경은 한숨을 쉬며 가르쳐 주었다.

“자네가 엘코한테 헛된 희망을 불어넣은 거야. ‘너도 저런 대단한 사람이랑 이만큼 친해질 수 있다’ 하고. 근데 막상 데 마레 백작께서 엘코가 바랐던 만큼 반응을 안 하시니 엘코가 뒤집어진 거 아닌가.”

만프레디 경의 눈이 다시 한번 휘둥그레졌다.

”그럼 제가 잘못한 거네요?“

”그렇지. 자네가 잘못한 거지. 친분 맡겨놨어? 자네가 뭐라도 돼? 엘코한테는 난 저 사람이랑 친한데 너는 못 친해진다고 뻐긴 셈이 됐고 자네를 호의로만 대해 주신 백작께는 민폐를 끼쳤고 아주 두루두루 잘못했구먼.“

만프레디 경은 울상이 되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엘코면 왕자님의 심복인데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소개한 게 그렇게 못 할 짓이었어요?”

왕자의 심복에게 접근해 왕자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사람은 왕궁 벽면에 붙은 대리석 패널만큼 많았다.

들이대서 신세를 고쳐보려는 여자들도 제법 있었다.

“데 마레 백작이?”

엘코를 상대로? 그건 마치 레오 3세가 돈이 궁해서 카스틸리오네 남작 앞에서 아양을 떤다는 소리와 비슷한 말이다.

자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는지 깨달은 만프레디 경은 황급히 정정했다.

“아니, 꼭 엘코 본인이랑 잘되려고 한다는 뜻이 아니라! 왕자님 주위 사람이 왕자님께 잘 말해주길 바라서 잘해주실 수도 있죠.”

“그런 걸 찾는 여자면 이미 좋은 여자가 아니야.”

옛 히스토리를 전혀 몰라서 지금 베르나르디노 경이 시아버지의 마음으로 데 마레 백작을 뜯어보는 중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만프레디 경은 어리둥절했다.

데 마레 백작이 좋은 여자인 게 여기서 왜 논점이 되는 거지?

혼돈에 빠진 만프레디를 두고 디노 경은 혀를 차며 떠났다.

“하여간에. 오지랖 그만 부리고. 가서 일이나 하게.”

“일 없어요! 왕자님 수행이 오늘 제 일정입니다!”

사서 부른 불행이었다.

“그으래? 마침 기사단이 사용할 마구를 주문해야 하는데 말야⋯⋯.”

“힉! 왕자님 나오시면 제가 에스코트, 아니, 수행해야죠!”

“저하께서 무슨 탑에 갇힌 공주님이야?! 아니면 자기 집에서 길도 못 찾는 바보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일이나 해!”

“히익!”

* * *

베르나르디노 경과 만프레디 경의 시야에서 벗어난 엘코는 혼자 남아 울부짖었다.

디노 경은 엘코가 분수에 넘는 기대를 했다는 사실은 기민하게 알아챘지만 그 기대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것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가히 처절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대낮부터 자기 방에 틀어박힌 그는 알아듣기 어려운 괴성을 질렀다.

“그 여자가 나를 못 알아봤어!!!”

그는 발로 벽을 차며 다시금 포효했다.

“그 망할 년이 나를 못 알아봤다고!!!”

엘코는 처음에는 ‘저 여자가 알면서도 수줍어서 뒤로 빼는 거다’라고 정신승리를 하려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라도 눈앞의 저 사람이 자기를 정말로 기억했는지, 모르는 척 하는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대회랑에서 마주쳤을 때 그 여자의 첫 시선은 정말로 생소한 사람을 대하는 캐주얼한 무관심이었으니까.

“이럴 거면 대체 왜 나한테 그 마차에서 웃어준 거야!!!”

그는 예전,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여백작이 아니라 그저 추기경의 사생아였을 무렵 알폰소 왕자의 명을 받아 그녀를 호위했었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그녀가 입었던 옷 색깔, 아니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나랑 왜 그 마차에서 단둘이 있었던 거야!!!”

개 같은 여자, 단둘이 탔던 그 마차에서 나한테 눈웃음까지 쳤으면서!

게다가 더 나빴던 건 그 취급을 당하고도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자기를 아시지 않냐고 어필하던 본인의 모습이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했다면 자기가 이제껏 벌인 짓 따위는 새카맣게 묻어 두고 같이 도망가지 않겠느냐고 제의했을 것이다.

받아주기만 한다면⋯⋯. 그렇지만 그를 보던 그 차가운 눈빛은⋯⋯.

“으아아아아아!!”

엘코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가치 있는 단 한 명의 여자가 그에게 무가치함의 낙인을 찍었다.

그렇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감. 힘없고 하찮은 자라는 패배감. 그 허망한 빈자리는 분노가 메웠다. 그는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자각하지 못했다.

* * *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에스코트를 받아 ‘별들의 방’에 들어섰다. 좀 전 회색 머리 남자의 잔영이 아직까지 남았다.

‘시선이⋯⋯. 기분 나빴어.’

단순히 기분 나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녀의 몸매를 훑는 남자는 익숙했다.

랑부예 구휼원장이 된 이후, 그러니까 성녀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후로부터는 그런 놈들이 거의 없었지만 농장에서 자란 어린 시절에는 안 그런 남자를 찾는 편이 더 빨랐다.

전생에서는 그런 시선에 좀 더 오래 시달려야 했다.

체자레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궁을 장악하기 전까진 그녀를 쉽게 보고 건드리는 놈들이 흔했다. 체자레를 쉽게 본 탓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집요한 눈길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단순한 성욕이나 눈요깃거리로 삼는 그런 류의 시선이 아니었다.

좀 더 본질적인 욕망이었다. 순간적이지만 완전히 소유하고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씹어 삼키고 싶어 하는 그런 종류의 욕망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이는 집착이라면 로맨틱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 회색 머리 기사는⋯⋯. 미안하지만 그녀로서는 알폰소의 수하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저렇게 선을 넘는 사람과 얽혀서 좋은 꼴을 봤던 적이 없었다.

“홀은 어때?”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는 아리아드네의 옆모습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알폰소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별들의 방’이야. 왕세자에게 허락된 연회 공간이지.”

그가 왕궁에 있었을 땐 연회를 열기엔 너무 어렸고, 이젠 정치적 입지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왕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엔 부담이 있었다.

“한참 동안을 먼지 속에서 잠자고만 있었어.”

왕위계승권자가 하나밖에 없는데 왕세자 책봉을 굳이 안 하고 버티는 것은 전적으로 국왕의 의지다.

알폰소는 적극적으로 부왕과 날을 세울 의향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왕위는 그의 것인데 무리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를 위해서 이 홀을 열고 싶었다.

어렵게 따낸 비앙카의 구이다타 자리인데, 그녀에게 좋은 건 다 주고 싶었다.

“⋯⋯아름답네요.”

여기는 처음이었다. 전생에 왕궁에서 살았을 때도 여기는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체자레는 자신의 처소로 국왕의 본궁을 사용했고 왕자궁은 꽁꽁 잠가두었기 때문이다.

비앙코 대리석이 가늘게 세공되어 사방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홀이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 역시 ‘별들의 방’의 대리석 세공처럼 섬세하게 아름다웠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악단이 연주로 공간을 가득 메우는 거야.”

알폰소는 자신의 왼손으로 잡은 아리아드네의 오른손으로 허공에 큰 선을 그려 보였다.

“파티의 주인공은 정중앙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거지.”

알폰소는 그들이 지금 막 들어선 문을 흘긋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들어선 것처럼.”

단둘만이 남은 거대한 홀에서, 탑처럼 크고 단단한 몸을 가진 남자가 태양에 그을린 피부 아래로 붉은빛을 감추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흘긋 옆을 돌아보았다.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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