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두 장의 초대장
여자가 제일 먼저 느낀 건 남자의 짙은 숨결이었다. 뜨거웠고, 박동했으며, 난데없는 박하 향이 났다.
남자의 입술은 여자의 점막을 헤집으며 그녀의 연한 살을 탐했다.
“흡⋯⋯!”
알폰소는 아리아드네가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쳤다. 매끈한 토끼 이빨을 넘어 들어가자 그 안에는 탐스러운 과육이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말캉한 여자의 상체가 단단한 남자의 상체에 꼭 밀착했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부드러움이었다. 이대로 하나가 되고 싶었다.
아무것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특정 외부 자극을 제외하면 말이다.
- 짝!
통각이 뺨으로부터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매웠다.
알폰소가 첫 따귀에도 그녀를 꽉 안은 채 놓아주지 않자 재차 두 번째 따귀가 날아들었다.
- 짝!
이는 아파서 놓는다는 차원을 넘어, 완벽하게 명확한 의사표시의 전달이었다. 알폰소는 결국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아리아드네가 분에 겨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 저하.”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아리아드네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눈물과 울분을 꾹꾹 눌러 담은 음성이었다.
“당신의 후원에 숨겨진 여자가 될 생각이 없으니.”
아리아드네는 달콤한 기만도 감미로운 거짓도 더 이상은 사양이었다.
단맛에 중독되어 매달려 있다간 죽을 자리에 가서야 자기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깨닫게 된다.
눈을 뜬 채로 지옥으로 달려가는 건 전생의 체자레 한 번으로 족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아리아드네의 엄중한 경고를 받은 알폰소는 입을 다문 채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날 사랑한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해줄 답이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널 사랑한다고, 지금도 이렇게 사랑한다고. 모자라는 구술 대신에 자신의 가장 정직한 언어로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아주 단호하게, 얽힌 타래를 잘랐다.
“비앙카 공녀님의 데뷔탕트 파티 전까지, 꼭 만나야 하는 일이 아니면 마주치지도 맙시다. 할 말도 없는데 실무회의에 앉아서 얼굴 내미는⋯⋯. 없어 보이는 짓도 그만둬요.”
알폰소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두 배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공사 구분합시다.”
그러면서 아리아드네는 손으로 알폰소의 입술이 닿았던 입가를 꾹꾹 문질러 닦았다.
그녀는 자기의 손가락이 눈물로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왕자의 눈길이 안타깝게 그녀의 손짓을 좇았다.
알폰소가 그녀를 눈으로 좇거나 말거나,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단호하게 뒤돌아서서 폭풍우 같은 기세로 ‘별들의 방’을 몰아쳐서 나갔다.
그리고 알폰소는 아름다운 대리석 홀에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제아무리 대륙을 넘어 이교도의 땅에까지 그 이름이 높은 명장이자 중앙대륙 최강의 기사래 보았자 혼자서는 이 높은 천고와 광활한 크기의 홀을 채울 수 없었다.
공기에서 느껴지던 생동감, 대기에서 느껴지던 운율은 그녀의 퇴장과 함께 싹 사라지고 죽은 대리석 홀에 석상 같은 그만 우뚝 남아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따귀를 맞은 왼짝 뺨을 어루만졌다. 아리아드네의 이야기에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 그가 이끌던 방향으로 그녀가 저항 없이 끌려갔다면 아리아드네는 남들의 눈에는 왕자의 숨겨진 연인, 나중에는 국왕의 정부, 그에 더도 덜도 아닌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사태는 결국 그가 저지른 짓이었다. 정확하게는.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본인이 결혼을 한 건지 안 한 건지는 지금 알폰소 본인도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은 한 가지였다. 지금 막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었다.
자신이 아리아드네를 원한다는 것. 그녀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가 없다는 것.
라리에사 대공녀 덕에 갈리코 왕국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라리에사가 지난 세월 내내 정숙하게 갈리코 왕국의 규방에서 그만을 기다렸던 것도 맞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예사크를 거쳐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돌아왔고, 과거의 은원은 과거의 은원일 뿐이지 그의 미래를 얽어맬 힘이 없었다. 동정과 사랑은 달랐다.
‘라리에사는 카를로 왕가의 왕자비 감이 아니야.’
아니어야 했다. 무력하게 저 문장을 곱씹었던 과거와 달리, 아니게 만들 힘이 이제는 알폰소에게 있었다.
* * *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알폰소 왕자가 홀로 ‘별들의 방’을 나서자 밖에 서 기다리고 있던 베르나르디노 경이 조심스레 다가와서 물었다.
“⋯⋯저하, 별일 없으신 거지요?”
그는 만프레디를 보내고 밖에 서서 왕자와 백작의 홀 투어가 끝날 때까지 대기하다가, 울면서 뛰쳐나간 아리아드네를 보고 말았다.
“제가 챙겨야 할 일이라도 있을까요?”
꽃이라도 보내던가, 아니면 대리로 사과하고 따귀라도 대신 맞던가.
알폰소를 물고 빨며 키운 베르나르디노 경이 생각하는 신하로서의 업무 범위는 다른 수하들이 생각하는 범위보다 넓었다.
따귀는 물론 주군이 이미 직접 맞았기 때문에 더 할 것은 없었다.
알폰소는 없다고 대답하고 가려다가, 베르나르디노 경이 해 주어야 하는 일 하나가 생각났다.
“외드 대공이 마지막으로 했던 제의가 어디까지였지?”
갈리코 왕국은 끈질기게 알폰소 왕자와 외드 대공의 독대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제까지는 목마른 놈이 우물 파라는 견지에서 계속 거절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목마른 놈이 뒤바뀌었다.
“제3국이 불편하시면, 국경선에서라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그거, 연락 넣어서 그쪽과 조율해 봐. 날짜, 시간, 정확한 장소. 받아보고 결정하겠다.”
베르나르디노 경은 적지않이 놀랐지만 놀랐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알폰소는 거기에 가타부타 조건을 더 붙이지도 않았다. 뒷말은 더 묻지도 않고 떠나려는 알폰소를 베르나르디노 경은 황급히 잡았다.
“아, 그거 외에도 여쭐 말씀이 하나 있는데요.”
“⋯⋯.”
알폰소의 이런 무응답은 지금 디노 경이 가져온 자기 시간을 할애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디노 경은 이걸 지금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면 알폰소가 꽤나 낙담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께서 수도로 복귀하셨습니다.”
왕자의 걸음이 멈췄다.
“알현을 원하시고 계시던데, 언제로 잡을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이럴 줄 알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디노 경은 주군의 속내를 본인보다도 더 잘 파악하는 신하였다.
* * *
‘별들의 방’에서 뛰쳐나온 아리아드네는 회랑을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자꾸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것과 동시였다.
그녀는 이 와중에도 예법에 맞게 가늘고 좁은 보폭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화나!’
더 일찍 밀어내지 못한 게 분하고 수치스러웠다.
‘얼마나 쉽게 봤으면!’
잔뜩 취한 알폰소를 정원에서 봤던 그 날, 그렇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빗자루라도 휘둘러서 내쫓아야 했다.
‘남자들은 결국 다 똑같아!’
올곧고 반듯하다고 생각했던 알폰소였다. 대륙 전체에 또 없을 유니콘이라고 생각했다.
다 가진 남자지만 여자를 물건으로 보지 않는다고, 여타 흔한 남자들처럼 여자를 수집품이나 전리품이나 장식품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그만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르긴 개뿔!’
남자는 젊은 여자를 보면 눈이 돌아가고 손을 대지만 자기 옆자리에 앉힐 여자는 자기 이익에 따라 선택한다.
믿었던 알폰소마저, 마침내 왕자비로 선택한 것은 갈리코 왕국의 뒷배를 가진 라리에사 대공녀였다.
자기는 헌신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전생과 마찬가지로 정부까지가 상한선이었다.
아니, 헌신과 사랑은 필요도 없었다. 그냥 지금과 똑같은 외모에 가슴을 좀 더 깐 드레스를 입었으면 정부 자리는 초면에도 덜컥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사벨라가 가진 건 외모뿐이 없었는데 그녀가 왕비 자리를 차지했던 걸 보면 아주 먼 옛날, 이사벨라가 했던 말이 맞았을는지도 모른다.
- “남자한테 목숨을 걸고 헌신해봤자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단다. 그들은 고마움을 몰라. 남자를 믿지 말려무나.”
신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다시 한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자기가 했던 행동들도 다 후회스러웠다. 좀 더 정숙하게 굴었었다면, 처음부터 차갑게 잘랐다면 최소한 이런 꼴에는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여성스럽지 못하게 군다고 타박하던 잔 갈레아초 할멈과 루크레치아의 목소리가 귓전을 웅웅 울렸다.
다 헛소리라고 치부했지만 약해질 때 기어들어 오는 속삭임을 원천 차단할 방도는 없었다.
잘못 배웠고 잘못 컸고 잘못 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도 모르겠지만 두 번째 인생도 실패였다.
타란토 공녀의 샤프롱 자리 따위, 욕심내는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랬으면 알폰소와 얽힐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의 도움 따위 필요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모든 일을 되돌릴 수만 있으면 데뷔탕트 무도회의 반쪽 샤프롱 자리 따위 반납하고 집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거칠게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산차가 애써 발라준 입술연지가 엉망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한 타이밍 늦게 들었다.
‘어차피 입술에 남은 것도 없겠네!’
얼마나 쉽게 봤으면. 얼마나 하찮다고 생각했으면. 얼마나 존중하지 않았으면.
그녀는 손등으로 입술을 힘주어 문질렀다. 어찌나 세게 문댔는지 따가울 정도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화가 났고 가슴이 아팠다.
⋯⋯키스가 황홀했어서 더 그랬다. 그렇게 좋지만 않았으면 진작에 밀어냈을 거였다.
그렇게 달콤한 향기가 나지만 않았으면, 그의 두툼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묻고 머리를 비운 채 쓰러지고 싶지만 않았으면 애초에 썩 꺼지라고 화낼 수 있었을 거였다.
자신도 그를 원했다는 점에서 두 배로 창피했다.
피부를, 손가락 발가락을 타고 올라와 몸 중앙으로 퍼져나가던 그 열기를 부정할 수 없어서 지표면에서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마차를 타고 데 마레 대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이는 지워버리려는 행동임과 동시에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입술에 닿는 그의 촉감이 상상될 때마다 그녀는 입술을 문질러 씻었다.
단단한 뼈마디가 있는 손등과 두툼한 그의 입술은 감촉이 완전히 달랐다. 그걸 알게 될 때마다 서러워서 또 문질렀고, 문지를 때마다 또 서러웠다.
아리아드네는 이 짓을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했다.
“아가씨, 잘 돌아오셨어요⋯⋯. 히끅! 입술이 이게 뭐예요?”
그녀를 맞이한 산차는 기겁하며 놀랬다. 다행히 아리아드네를 맞이하러 현관에 나온 것은 산차 하나뿐이었다.
전할 소식이 있어 다른 하녀들을 물려 두었던 탓이다.
산차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자기 스카프를 둘러 아리아드네의 하관에 가려주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속삭였다.
“아니, 왕궁에 가서 키스라도 하셨어요? 입술이 왜 그래요?”
“아냐!”
거세게 반발한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말이 객관적 사실관계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게, 키스하긴 했는데, 그거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냐!”
최악의 상황에서까지 발휘되는 객관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산차의 눈이 두 배로 더 똥그래졌다.
“네? 키스를 하긴 하셨다고요?”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속상했다. 아리아드네는 울기 직전이 되어 끝내 성질을 내고 말았다.
“더 묻지 마!”
생략된 뒷말은 ‘내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이었다.
정말이지, 오늘 자기가 한 거한 바보짓에 대해 누구한테 자기 입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면 우는 건 당연하고 나가 죽어 버릴 터였다.
다행히 산차는 표정만 봐도 아리아드네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았다. 그녀는 더는 묻지 않고, 어쭙잖은 위로를 하는 대신 아예 주제를 바꿔 주었다.
“참, 아가씨! 초대장이 왔습니다!”
“무슨 초대장?”
“타란토 공녀에게서 온 초대장이에요!”
그 소식에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거센 바람에 싹 씻겨나간 것처럼 깨끗해졌다.
이 모든 난장판은 다 비앙카 공녀와 가까워질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 기회가 실체화되어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일할 때 살아나는 여자였다.
산차는 메모를 아리아드네에게 건넸다. 최근 통용되는 봉투에 밀봉된 초대장이 아닌, 옛 사교계의 전통대로 엽서처럼 쓰인 초대장이었다.
“다음 주쯤에 산 카를로에 도착하실 예정인데, 무도회 전에 백작님을 만나고 싶으시답니다!”
전생의 비앙카는 남주의 대영지에 은거한 고요한 은둔자였다.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아 당시 섭정공의 약혼녀였던 아리아드네조차도 그녀를 직접 보지 못했다.
초대장을 든 아리아드네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드디어, 그 베일을 벗길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