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6화> 거죽의 중요성
비앙카 공녀의 초대장에는 공녀는 ‘다음 주쯤에 산 카를로에 도착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초대장 자체가 일주일 전에 쓰인 것이었다.
초대장은 타란토에서 공녀와 거의 동시에 출발해 공녀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황급히 타란토 공작가 측과 날짜를 조율했고 결과적으로 바로 이튿날 공녀와의 만남이 잡혔다.
그래서 지금 아리아드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타란토 공작가의 수도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병아리 모양의 노란 유리 장식이 있었다. 산 카를로 공방들을 뒤져 급히 구한 것이었다.
‘‘수선화의 성모’가 있긴 하지만.’
‘수선화의 성모’는 아리아드네가 회귀 초기 구해 놨던, 비앙카의 돌아가신 모친을 모델로 그린 진귀한 그림이었다.
당시 그 그림을 그렸던 화가,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는 그 이후로 승승장구해 중앙대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신진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그의 커리어 하이가 될 트레베로 대성황당의 증‧개축은 아직이었지만, 지금도 ‘수선화의 성모’는 충분히 값진 선물이었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가 그 그림을 가지고 가지 않은 것은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가 아직 최고로 성공하지 않아서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였다.
‘초면부터 너무 큰 선물을 들고 들어가면 너무 아부꾼처럼 보일 테니까.’
모든 것이 서툴렀던 전생의 그녀와 달리 아리아드네는 이제 권력자들의 속성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그들의 호감을 사는지, 어떻게 굴면 곧장 잘려나가는지 눈감고도 알았다.
‘진정성이 최고예요’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 이상의, 사소한 디테일이 분명히 더 있었다.
그러나 진정성은 마치 소금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조미료는 맞았다.
상대방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과 궁금증 없이는 애정을 돌려받을 자격이 없다.
마차 안에서 일 도메스티코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리며, 아리아드네는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비앙카 공녀는 어떤 사람일까?’
아라벨라가 살아 있었다면 비앙카 공녀와 동갑일 것이다.
좋아하는 건 병아리색에 체크 무늬라니, 아라벨라보다도 더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었다.
‘알폰소도 항상 비앙카가 착한 육촌 여동생이라고 언급했었고.’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에서 비앙카 공녀의 모습이 대충 갖춰지고 있었다. 공상의 원형은 아라벨라였다.
거기에서 출발해서 순한 성격,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노랑 병아리 공녀님이 포슬포슬 뛰어오는 상상이 완성되었다.
아리아드네는 기대감을 안은 채 타란토 공작가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그녀는 차 한 잔을 손에 쥔 채 비앙카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방문 밖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 “공녀님, ⋯⋯하셔야⋯⋯.”
그녀의 수행인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상황이 별로 순탄치 않아 보였다.
- “싫⋯⋯.”
정확한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공녀의 저항이 있었다.
순하다는 평가는 진짜였는지, 분노나 투정보다는 울상 내지는 애원 쪽에 가까웠다.
밖에서 잠시간의 설왕설래가 더 있고서야 문이 드르륵 열렸다.
“아효, 죄송합니다. 데 마레 백작님.”
새치가 섞이기 시작한 갈색 머리의 중년 부인이 방으로 먼저 들어왔다. 깡마른 체구에 꼬장꼬장해 보이는 부인이었다.
공녀의 유모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기소개도 생략한 채 사과부터 했다.
“우리 공녀님께서 하도 수줍음을 타셔서⋯⋯.”
응접실 문밖으로 스커트 자락이 삐쭉 보였다.
예상했던 병아리색 스커트가 아니라 짙은 회색 드레스였다. 아리아드네는 예의상 웃으며 답했다.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잠시만요, 제가 다시 한번 설득해서 모셔올게요.”
중년 부인은 재차 방 밖으로 나가 공녀를 달랬다. 하지만 공녀는 완강했다.
낑낑대는 소리, 울음까진 가지 않은 훌쩍이는 소리, 급기야는 약간의 짜증까지 들렸다.
약 10여 분 뒤에 공녀의 유모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와 아리아드네에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데 마레 백작님. 저희 공녀님께서 들어오시기가 싫다고⋯⋯.”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다시 한번 넘길 수도 있었지만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비앙카 공녀님께서 저를 초대해 주셨는데.”
심지어 꽤 급하게 날짜를 맞춘 초대였다.
“저를 만나고 싶지 않으셨다면 도대체 왜⋯⋯.”
“아휴, 아뇨. 그 초대장은 제가 보냈습니다.”
“예?”
유모,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데뷔탕트 무도회가 열리기 전에 샤프롱을 서 주실 분을 미리 만나 뵙고 인사드리는 것은 당연한 예의입니다!”
“아⋯⋯.”
아리아드네는 입을 약간 벌리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면 이해가 됐다.
이 주종은 공녀가 어리고 유순한 반면에 유모가 성격이 몹시 센 모양이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응접실에서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어 다시금 타란토 공녀를 독촉했다.
“공녀님, 어서 안으로 들어오셔요!”
그러나 복도에 버티고 선 타란토 공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효. 실례합니다. 제가 가서 모셔올게요.”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비앙카를 을러도 보고, 달래도 보고, 물리적으로 끌고 오려는 시도까지 했으니 전부 다 실패했다.
결국 비앙카 공녀에게 먹힌 건 협박이었다.
“돌아가신 공작 각하와 공작부인께서 비앙카 아가씨가 자기 샤프롱에게조차 미리 인사를 안 올린 걸 아시면 공작가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며 부끄러워 하실 겝니다!”
비앙카 공녀는 그제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응접실로 입장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무겁게 질질 끌며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인 비앙카 공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자기 발만 쳐다보았다.
“⋯⋯.”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비앙카 공녀가 왜 외부인을 일절 만나지 않았는지 바로 깨닫게 되었다.
중앙대륙 최고의 신붓감이라고 일컬어지는 타란토의 비앙카는⋯⋯ 정말로 못생겼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추하게 생겼거나 못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교계에서 흔히 일컫는 매력적인 용모와는 정반대의 외모였다.
그녀는 부계를 통해 카를로 왕가의 피를 진하게 받은 모습이었는데, 큰 키, 두꺼운 흉통, 넓은 어깨와 큰 뼈대까지 카를로 왕가의 남자들을 쏙 빼닮았다.
아직 열다섯 살이었지만 웬만한 남자들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알폰소 왕자와 닮은 면이 많았지만 같지는 않았다.
살짝 튀어나온 매부리며 튼튼한 광대, 단단한 턱 근육 등 그녀의 육촌 오빠보다도 더 울퉁불퉁하고 남성적인 얼굴이었다.
그녀가 카를로 왕가를 닮지 않은 것은 색조였다.
황금을 녹여 만든 것처럼 달콤한 금발을 자랑하는 그녀의 육촌 오빠와 달리, 타란토의 비앙카는 갈색이라기에는 채도가 너무 낮고 잿빛이라기엔 너무 개성 없는 회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눈은 시궁쥐처럼 새카만 검정이었고 피부색은 한 톤 어두운 회색빛을 띠었다.
“⋯⋯만나서 반갑소⋯⋯.”
화려한 자수가 놓인 진한 차콜색 실내복을 입고 포르토 공화국의 유행대로 회갈색 머리카락을 최대한 금발에 가깝게 햇빛에 탈색한 비앙카는 입안으로 웅얼거렸다.
“타란토의⋯⋯. 타란토의 비앙카요⋯⋯.”
여기까지 말한 비앙카 공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약간 울먹이는 것도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급작스러운 울음에 당황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녀님, 괜찮으신⋯⋯.”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문장이 끝나는 것보다 비앙카가 바닥을 쳐다보며 울음을 터트리는 게 더 빨랐다.
“그래서 내가 데뷔탕트 파티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 * *
자기 결혼식 날 똥물을 맞은 카멜리아는 원한을 잊지 않았다.
- “카멜리아, 루비나 공작부인이 이사벨라에게 크게 화를 내셔서 이사벨라 처지가 좋지 않다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건 내 알 바 아님.”
- “카멜리아, 오타비오도 이사벨라한테 정떨어진 것 같다던데 진짜 왕궁 법정에 고소할 거야?”
“더 잘됐네. 고소도 당하고 부부싸움도 하고. 변호사 산 김에 이혼상담도 하면 되겠네.”
이사벨라 데 마레와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해주겠다고 할 때는 다들 손뼉을 치며 부추겼다.
그러나 막상 진짜로 저지른다고 하니 말리는 시누이들이 사방천지에 깔려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만둘 거였으면 시작조차 않았을 거였다.
이사벨라가 캄파 후작의 내연녀라고 소문냈을 때도 그랬지만, 카멜리아는 복수에 있어서만은 실행력이 끝내주는 여자였다.
아버지의 인장을 빌린 그녀는 가주의 도장을 쾅! 찍어 콘타리니 백작가에 파발꾼을 보냈다.
몸을 갓 푼 이사벨라는 그렇게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에서 보내온 청구서를 받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관용어구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미친 거 아니야? 아니, 완전히 미쳤어!”
카스틸리오네 남작가가 보낸 내용증명에는 이번 달 말까지 1만 2천 두카토를 일시 변제하지 않으면 왕궁 법정에 콘타리니 백작가를 고발하겠다고 쓰여 있었다.
“받을 돈이 있으면 있는 거지 그깟 돈 좀 못 갚았다고 사람한테 이렇게 수치를 주는 일이 이 나랏법 상 가능해?!”
이사벨라가 이렇게 노발대발하게 만든 것은 내용증명에 붙은 그다음 내용이었다.
변제 요청 뒤에는 고발과 동시에 가산을 빼돌릴 수 없도록 빨간 딱지를 붙일 집행관을 보내겠다고도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속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뭘 잘났다고 떠들어!”
오타비오가 서슬이 시퍼렇게 소리 질렀다.
“너만 아니었어도 이 꼴이 나진 않았어!”
오타비오는 이사벨라가 카멜리아의 결혼식에서 깽판만 안 쳤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거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지만, 이사벨라는 너랑 결혼만 안 했어도 내가 이런 꼴을 당하진 않았을 거라고 알아들었다.
이사벨라는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마주 대거리했다.
“그래? 후회해? 사랑한다고 내 발치를 질질 울면서 쫓아다녔던 게 어제 같은데, 나 말고 카멜리아랑 결혼할 걸 후회해?”
그런데 듣고 보니 이것도 썩 나쁜 안이 아니었다. 카멜리아가 안 받아 줘서 문제지.
“그래!”
오타비오는 시원하게 내질렀다.
“후회한다, 후회해!”
콘타리니 대저택은 엄청나게 넓었지만 젊은 부부 둘이 목청을 있는 대로 세워 서로 비명을 질러대자 방 서너 개 너머에 있는 아기가 소리를 듣고 울음을 터트렸다.
“애애애애애애!”
목젖을 떨며 우는 신생아 소리가 났다. 이사벨라는 더 화를 냈다.
“쟤는 또 왜 저래!”
“네가 소리 지르니까 그렇지! 넌 엄마가 돼서 걱정도 안 되냐?”
“나 혼자 질렀냐! 나 혼자 낳았냐!”
이사벨라는 첫 딸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신생아의 새빨간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 같았다.
이사벨라는 백 년에 한 명 나올 미인이었고 오타비오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는데 양수에 불은 아기는 엄마도 아빠도 전혀 닮지 않았다.
그나마 이사벨라에게 위안이 됐던 건 그 아이가 ‘아들이다’라는 사실이었다. 왜 아들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굴을 보니까 도저히 딸 같이는 안 생겨서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던 이사벨라의 안도는 산파의 외침으로 인해 바로 산산이 조각났다.
- “예쁜 아가씨입니다, 마님!”
이사벨라는 그 순간의 절망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아들만 낳으면 오타비오와의 사이가 파탄 나도 콘타리니 백작부인으로서의 입지는 탄탄했다.
그런데 딸이라니, 이 집안에 내 자리는 없구나.
이사벨라의 그 불안은 헛것이 아니었다. 오타비오는 이사벨라에게 마저 소리쳤다.
“너 같은 거랑 결혼한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다!”
“뭐라고?”
이사벨라는 약이 올라서 응수했다.
“이 이사벨라 데 마레가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 같은 거랑 만나주는 게 언감생심 감지덕지 하지, 네가 후회를 한다고?”
“와, 너 혼자만 잘났지?”
오타비오는 분노에 차서 외쳤다.
“사람들이 나 안 말린 줄 알아? 멀리 갈 것도 없어, 우리 누나도 나한테 ‘걔는 아니’라면서 얼마나 반대를 했는데!”
“뭐?”
이사벨라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누가 너를 말렸다고?”
말릴 사람이 따로 있지.
“클레멘테 언니 말이야?”
돈 나올 구석이. 생길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