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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17화 (317/733)

<제317화> 의심의 구체화

오타비오와 이사벨라의 싸움은 점입가경으로 흘렀다.

“솔직히, 네가 얼굴 빼고 볼 게 뭐가 있냐?”

“오타비오. 경고하는데 그 입 다물어.”

“추기경 집 딸이라고 잘난 척하는데, 어차피 너도 사생아잖아. 네가 귀족이야? 평민만도 못한 주제에 턱 빳빳이 들고 다니는 꼴 처음 봤을 때부터 우스웠어!”

이거야말로 이사벨라의 역린이었다. 그럭저럭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이사벨라는 이성을 잃고 한껏 비꽜다.

“일개 백작가 주제에 추기경 가문에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우리 아버지 의전서열이 너보다 세 단계는 앞이거든?”

그러나 오타비오도 할 말이 많았다.

“말 한번 잘했다. 그래서 네가 그 잘난 아버지와 연락해? 내가 추기경 장인어른 콩고물이라도 한번 얻어먹어 본 적 있어? 넌 몸 하나만 달랑 들고 왔잖아! 이 밥버러지야!”

오타비오는 씩씩댔다.

“너 때문에 지금 우리 집안이 망하게 생겼다고! 네가 기분 낸다고 카멜리아한테 화풀이 한번 잘못했다가!”

오타비오는 머리를 감싼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

“조상님들을 무슨 낯으로 뵌담! 이래서 누나가 말릴 때 들었어야 했는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얼굴 예쁜 거 하나 믿고 사치와 허영에, 성격은 독하고, 성품도 나쁘니 피해야 할 여자가 너라고 우리 누나가 그렇게 말렸었는데!”

밥버러지 소리를 듣고 침실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사벨라의 귀에 그 단어들이 쏙쏙 들어와 박혔다.

“솔직히, 네 배 속에 애도 내 자식 맞느냐고 물어보더라. 야.”

오타비오는 소파에 널브러진 채 고개를 숙인 이사벨라를 쳐다보았다.

“걔, 내 애는 맞냐?”

이사벨라는 상처 입은 얼굴로 오타비오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클레멘테 언니가 한 말이야?”

“내가 물어보는 말이기도 해.”

이사벨라의 머릿속에서 수녀원 접견실에서 그들의 첫 아이인 지오바나—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이었다—를 만들려고 노력하던 수많은 나날이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 관계는 매혹의 차가 도와줬지만 그 뒤부터는 수녀님이나 수녀원장님이 들어오실지도 몰랐는데 오타비오가 이사벨라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들이댔었다.

딱 걸리면 이사벨라는 정말 큰일 나는 거였는데 말이다.

“⋯⋯네 자식 맞아, 이 미친 새끼야.”

울분에 찬 이사벨라는 부부 침실 문을 홱 열었다. 나가기 직전 문틀을 잡고 잠시 뒤를 돌아본 그녀는 남편을 보며 씹듯이 말했다.

“오늘 이 말, 후회하게 될 거다.”

* * *

알폰소는 사실 데 마레 추기경과의 알현에 관해 아예 잊고 있었다.

당시 엘코는 라파엘이 언급한 ‘아리아드네가 보낸 황금’ 이야기는 그녀가 추기경에게 왕자를 도와 달라고 읍소한 것 정도에 불과할 거라고 말했었다.

왕자의 총신은 추기경의 됨됨이를 봐야 한다고 강변했다.

추기경이 어떤 사람인데 딸이 애원한다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겠느냐, 그렇다면 왕자님께서 아리아드네 데 마레에게 빚진 것은 없으니 라파엘의 헛소리에 굳이 구애받지 마셔라,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지였다.

알폰소는 그 말을 그냥 듣고 잊었다. 잊은 이유는 간단했다.

엘코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그게 설령 아리아드네의 하소연으로 추기경이 해준 돈이라고 해도 알폰소는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도와준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녀가 그를 도왔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대면한 추기경의 태도는⋯⋯. 그의 생각과는 매우 달랐다.

“에트루스칸 왕국은 루도비코 법황의 서거 이후를 전혀 준비해놓지 못했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의 두근대는 트레베로 행은 그야말로 대실패였다.

루도비코 법황이 서거한 후 후속 법황을 선출하기 위해 개최하는 콘클라베에 참석하기 위해 트레베로로 떠난 그는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루도비코 법황이 도통 죽지를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의 독에 당해 쓰러진 법황은 죽을 듯 죽지 않을 듯 사람들—그의 쾌유를 비는 사람들과 데 마레 추기경 같은 자들 양측의—의 애간장을 태우며 장장 한 달을 끌었다.

그리고 종래엔 중독에서 회복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병석에서 일어난 법황은 당연히 승냥이 떼처럼 모여든 추기경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누가 제일 먼저 도착했는지, 누가 가장 군침을 흘리며 법석을 떨었는지를 세세히 추려냈다.

그러고는 복수를 다짐하며 추기경들을 해산시켰다. 흡사 닭 쫓던 개를 쫓아내는 닭 주인의 분노에 찬 몽둥이질을 연상케 했다.

“북해 연합 및 그쪽 공국 출신 추기경들은 당연히 강경한 신교파입니다. 신교파 추기경들은 똘똘 뭉쳐 신교파 법황을 추대하려고 합니다.”

추기경은 침을 튀겨가며 트레베로의 상황을 전달했다.

다소 과장이 들어가긴 했지만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갈리코 측 추기경들이 박쥐처럼 굴 것은 예상했던 바이지만, 살라만타 왕국과 그레도 왕국 출신 추기경들마저 이렇게 단합이 안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으로서는 카를로 왕가의 서포트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루도비코 법황이 못해도 15년은 더 살 줄 알았으므로, 에트루스칸 교구 차원의 대비는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지금부터 급하게 준비해서 경쟁자들을 제치려면 경쟁자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데 마레 추기경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범국가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왕가에서 힘을 보태 주셔야⋯⋯!”

“물론. 차기 법황은 구교파에서 나와야지요.”

알폰소 왕자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렇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섣불리 흥분하지 않았다.

이런 류의 말에는 항상 ‘그러나’가 붙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 파악을 해야 덤빌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뭐가 필요한지, 어디서부터 준비해야 할지 찬찬히 살펴 보십시다.”

열정적인 승낙도 아니되 거절도 아닌 말이었다.

그 뒤로는 대충의 세력분포와 구교파 추기경 중 이탈이 우려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인적인 문제로 이탈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외교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 동안 추기경의 이야기를 들어준 알폰소는 슬슬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 뒤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약간의 형식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런 이야기 내내, 알폰소는 데 마레 추기경의 기색을 슬쩍슬쩍 살폈다. 정말로 이상했다.

알폰소 왕자는 현재 정치적인 면에서 유불리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유일한 정통 왕위계승권자라는 점이 그가 가진 강점이었고, 아직도 왕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약점이었다.

왕세자 책봉은 레오 3세가 하는 것이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왕이 죽었을 때 왕세자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사람이었다. 발언권이 아예 없지 않았다.

즉, 데 마레 추기경은 알폰소 왕자 앞에서 거들먹거려야 정상일진저 지나치게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물론 법황의 자리가 탐이 나서 그런 것이니 상식적이다.

그러나 예사크 전쟁에서 10만 두카토를 지원해 준 그의 정치적 대부라면, 당당하게 그 이야기를 꺼내며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게 순리 아닌가?

그런 사람이 왕자와의 20분 티타임이 만족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예사크에서 구른 경험으로 그는 이럴 때는 입을 꾹 다물고 넘어가는 게 최고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여자 한 명에 대한 갈망이 굳이 쑤실 필요 없는 장작불을 쑤시게 만들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일전의 도움에 관해서는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데 마레 추기경이 아주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이걸로는 판단이 어려웠다. 기왕 시작한 거, 알폰소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추기경 예하의 도움은 제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상체를 돌려 알폰소 왕자를 보았다. 아주 묘한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별말씀을요.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추기경은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려 왕자의 알현실을 떠났다.

알폰소 왕자는 확신했다.

그가 예사크에 있을 때 라파엘을 통해 받았던 군자금 1만 두카토와 추후 따라왔던 총액 10만 두카토는 데 마레 추기경이 보낸 돈이 아니다.

* * *

엘코는 느닷없는 알폰소 왕자의 소환을 받고는 직감했다.

‘올 것이 왔구나.’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지만 심장이 두근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갈리코 수사가 건네주었던 서류를 챙겼다. 이게 오늘 그의 구명줄이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알폰소 왕자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왕자는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엘코.”

낮게 가라앉은 저음이었다. 엘코는 재빨리 대답했다.

“예, 저하. 부르셨습니까.”

괜히 말이 많아졌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점심은 드셨습니까?”

알폰소는 묵묵히 엘코를 바라볼 뿐이었다. 입이 말라갔다. 엘코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알폰소는 엘코를 눈으로 쓸었다. 그의 오른팔이 있던 자리에는 헐렁한 빈 옷소매만 남아 있었다.

곧바로 엘코를 추궁하려던 알폰소는 그걸 보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코. 나한테 뭐 할 말 없나.”

엘코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목덜미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엘코가 딱딱하게 굳은 채 얕은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본 알폰소는 인상을 굳혔다.

자기 입으로 고백할 기회를 그가 스스로 저버렸다. 알폰소는 직접 물었다.

“예사크에서 받은 정체불명의 군자금의 출처. 왜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지?”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엘코는 극적으로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박았다.

“왕자님을 지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울부짖었다.

“왕자님의 자율을, 왕자님의 결정권을 지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알폰소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뭐라고?”

엘코는 알폰소의 말을 묻어버릴 듯이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받았던 10만 두카토의 군자금은 사실 갈리코 왕국의 라리에사 대공녀가 보낸 것입니다!”

알폰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일단, 라리에사는 그럴 능력이 없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언성이 높아졌다.

“라리에사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10만 두카토의 군자금을 보내!”

엘코는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아버지이신 외드 대공께서 보내신 돈이지요.”

그렇지만 여전히 앞뒤가 안 맞았다. 이게 라리에사가 보낸 돈이라면 그녀의 성정에 생색을 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의 팔다리에 쇠사슬이라도 감아서 신랑의 예복을 입혀 갈리코 왕국으로 압송하려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풀리지 않는 의문은 더 있었다.

“외드 대공이 보낸 돈이라면 도대체 왜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라 라파엘을 통해서 온 건가? 심지어 갈리코 왕국은 포르토 공화국을 통해 병참을 모두 책임지고 있지 않았나? 거기로 보내면 되지 않나.”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이 왔다. 엘코의 손이 덜덜 떨렸다.

“외드 대공 측에서 추후 밝히길.”

엘코는 미리 준비해 수십 번 연습했던 시나리오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었다.

“왕자님께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필리프 4세의 눈을 피해야 했다고 했습니다.”

검토, 또 검토했다. 이 해명의 논리에는 물샐 틈 하나 없다.

“그래서 포르토 공화국이 담당하는 보급로를 통하지 못하고 성황청의 갈리코 왕국 지부를 통해 에트루스칸 왕국의 성황청으로 돈세탁을 한 것입니다. 라파엘은 이 과정에서 우연히 심부름꾼으로 발탁되었을 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한 문단을 다 외워 엘코는 가지고 온 서류를 알폰소 왕자에게 건넸다.

알폰소는 거칠게 그 서류뭉치를 받아 빠르게 내역을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눈으로 서류 안의 오류를 찾으며 왕자는 물었다.

“그 말이 맞다고 치자. 그럼 외드 대공은 왜 아직까지도 나에게 군자금에 대한 청구서를 보내지 않았지?”

정녕 그 군자금을 보낸 사람이 외드 대공이라면 그는 지금의 알폰소를 만든 정치적인 후원자가 된다.

국경에서 만나자고 비는 것이 아니라 몽펠리에로 오라고 당당하게 요구해도 알폰소가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그는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알 길이 없사오나.”

엘코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게 맞았다.

외부에서 보기에 엘코는 알폰소 왕자의 총신이지 갈리코 왕국과는 그 어떠한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저한테는 이미 몇 차례 독촉이 있었고.”

기어코 알폰소의 목소리가 호통으로 변했다.

“자네가 뭐라고 그걸 자네 선에서 끊어!”

“송구하옵니다, 저하.”

엘코는 바닥에 재차 머리를 찧었다.

“다 제 충심의 발로였습니다.”

- 쿵! 쿵!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 거세게 이마를 찧었다. 대리석 마루에 선홍빛 피가 흘렀다.

“갈리코 왕국 측은 군자금을 빌미로 여러 차례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혼인을 이행할 것을 촉구해 왔으나 제가 잘랐습니다. 왕자님께서 배우자감을 자유 의지로 고르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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