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엘코는 목에 핏줄이 터져라 외쳤다.
“그렇지만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왕자 저하!”
왕자의 집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왼팔을 짚은 채였다.
“갈리코 왕국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으로 라리에사 대공녀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외드 대공 합하는 군자금을 빌미로 라리에사 대공녀님과의 혼인을 강권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신사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엘코는 자신의 거짓말에 자기기 취해서 스스로의 말을 믿어버렸다.
외드 대공이 군자금을 대가로 결혼을 강권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군자금을 대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꼬락서니는 마치 집을 지키다 치매에 걸린 늙은 개 같았다.
“갈리코의 군사편제는 선진적이고 대공 합하의 통치는 참으로 합리적이십니다! 왕자님께서 중앙대륙의 패자가 되시려면 갈리코와의 혼인동맹으로 그 위치를 공고히 하셔야 하옵니다!”
하지만 엘코는 집 지키는 개만도 못했다.
치매에 걸린 노령견은 평화로운 은퇴를 시켜주면 되지만 엘코는 아득바득 현역에서 권력을 붙들고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 수하는 쓸모없는 것을 넘어 유해하다.
- 척!
“억!”
엘코는 알폰소가 던진 서류에 얼굴을 맞고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는 비명을 너무 헤프게 내지른 것을 후회해야 했다.
곧바로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린 알폰소의 주먹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크헉!”
엘코는 왕자의 집무실 한쪽 구석으로 날아가 하나 남은 팔로 얼굴을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그 위에 엄준한 알폰소의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
“내가 이것으로 네 단죄를 갈음하고 네 목을 지금 당장 치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는.”
왕자는 차가운 눈으로 엘코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나를 위해 팔과 눈을 잃었기 때문이다.”
군주에게 들어가는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중죄이다.
심지어 타국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 자기 마음대로 숨겼다? 이건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알폰소는 바닥에 구겨져 있는 엘코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위해 미래를 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평생을 책임져 주는 것이 자신의 당연한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엘코를 내려다보는 그의 마음에는 생각보다 연민도 죄책감도 크지는 않았다.
의외로⋯⋯.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분노였다. 알폰소는 이 분노의 연유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분수를 지키지 못한 죄로 널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야.”
알폰소 왕자의 저 말에 엘코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왕자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얼마나 동정심이 많고 너그러운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목을 치다니.
이 정도 꼬리만 밟힌 게 아니라 갈리코와의 본격적인 내통과 그의 내밀한 흑심 등 모든 것이 밝혀져도 기껏해야 직위를 박탈하고 왕궁에서 쫓아내는 게 최대치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 나를, 고작 그 여자 때문에 이 내 목을 치겠다고? 나야말로 왕자님의 제일가는 최측근, 중앙대륙 제일가는 미래 군주의 오른팔 아니었나?
“오늘부로 너는 일체의 업무에서 배제한다.”
그 말을 들은 엘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말인즉슨 엘코를 모든 권력에서 배제해 산 송장으로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엘코는 다른 기사들처럼 훈련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행정업무에서 배제된다면 왕자 근처에 접근할 길이 요원해진다.
그는 무릎으로 기며 알폰소에게 다가갔다.
“왕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왕자님!”
그의 하나 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한 번만 선처해 주십시오, 왕자님! 제가 부모도 여자도 자식도 없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다 왕자님을 위한 충성에서 그런 것입니다! 잘못 생각했습니다 왕자님! 왕자님! 왕자님!”
그러나 알폰소는 집무실 바닥에 종잇장처럼 눌어붙어 있는 엘코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엘코가 건네준 서류는, 분통이 터지게도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완벽했다.
숫자 하나, 일자 하나하나가 기분 나쁘게 알폰소의 눈앞에서 춤을 췄다.
방에서 나온 알폰소 왕자는 곧장 다른 기사를 불렀다.
“앞으로 당분간 엘코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기사는 부복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저하.”
* * *
이사벨라는 바톨리니 백작가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두텁게 짠 직물이며, 장식 대신 넓은 볼에 가득 담긴 싱싱한 과일이며, 목가적으로 꾸몄지만 돈 냄새가 물씬 나는 방이었다.
젠장. 나는 망하게 두고 너는 이렇게 잘 먹고 잘살겠다고? 그럴 수는 없다. 그런 법은 없다.
“언니께서 1만 2천 두카토를 좀 빌려주셔야겠어요.”
이사벨라는 뻔뻔스레 덧붙였다.
“가족 좋다는 게 뭐예요?”
클레멘테는 그 말에 잠깐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1만 2천 두카토⋯⋯.”
바톨리니 백작가는 아주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그런 거금을 현금으로 융통할 능력은 없었다.
남편의 허락이고 자시고 그냥 액수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 어떤 귀족이라도 그럴 능력은 없을 것이다.
수도에서 그게 가능할 사람은 왕족을 제외한다면 아리아드네 데 마레, 보카네그로 상회, 그리고 카스틸리오네 남작가 정도가 전부였다.
“⋯⋯그건⋯⋯.”
죽어도 거절을 못 하는 클레멘테도 도저히 수락할 수가 없는 액수였다.
제아무리 호구라도 그렇지 저런 약속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클레멘테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이사벨라의 눈에는 그 입 모양이 ‘그게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처럼 보였다.
뭐 아니래도 상관없었다. 이사벨라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죠. 1억 2천 두카토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클레멘테는 차마 긍정은 못 하고 이사벨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눅은 들었지만 불만은 숨기지 못하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사벨라는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모은 채 앉아 있던 여성스러운 자세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녀는 테이블을 건너서 성큼성큼 걸어와 클레멘테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런데 말이야. 네 평판과 결혼생활을 구해내는 값으로는 완전히 싸지 않아?”
이사벨라는 검지를 들어 클레멘테의 이마를 뒤로 확 밀어젖혔다.
“오타비오한테 내 욕했더라? 뭐? 사치와 허영이 심해? 바람피울 게 뻔해? 지오바나가 오타비오 애일 줄 어떻게 아냐고?”
느닷없이 반말을 듣고 기분 나쁘게 머리통이 뒤로 밀린 클레멘테는 깜짝 놀라 양팔을 후다닥 펄떡였다.
“저기, 바람피운 게 누군데 나한테 덮어씌워? 그쪽이 그러시면 안 되지.”
기에서 완전 밀린 클레멘테는 더듬더듬 변명부터 주워섬겼다.
“⋯⋯아니, 그게, ⋯⋯내가 진짜로 그러려던 게 아니고⋯⋯.”
“본인이 결혼생활에서 애가 안 생기니까 남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근데 그쪽은 즐거운 불륜 생활에서도 애가 안 생겼잖아? 이쯤이면 남편이 아니라 본인한테 문제 있으신 거 아니야?”
“오, 이사벨라, 제발⋯⋯.”
클레멘테는 이사벨라의 손을 붙들고 애걸했다.
“⋯⋯목소리 좀 낮게⋯⋯. 오해야⋯⋯. 나는 그렇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변명은 됐고.”
이사벨라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냥 행동으로 책임져.”
그녀는 클레멘테의 이마를 밀었던 손가락을 떼네어 올케의 드레스 소매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내일 저녁까지 1억 2천 두카토 마련해 와. 안 그러면 네 남편한테 캄파 후작의 진짜 내연녀가 누구인지 다 불어버리고 말겠어.”
클레멘테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허옇게 질렸다. 그녀는 짐짓 의연하게 말했다.
“그, 그이는 절대 네 말을 믿지 않을걸.”
마지막 허장성세였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그저 어깨를 으쓱 해 보였을 뿐이다.
“그거야 그 양반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이사벨라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다 까발릴 거야.”
클레멘테의 낯빛이 한 톤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최근에도 바람을 피우다가 꼬리를 밟힌 적이 있다.
이사벨라가 캄파 후작의 일을 들추어낸다면 바톨리니 노백작은 진지하게 그때의 상황을 알아볼 것이다. 그러면 파멸, 파멸뿐이다.
“⋯⋯대신.”
이사벨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클레멘테를 쳐다보았다. 노려보기와 가늠하기 사이 어딘가에 있는 시선이었다.
“네가 정말로 1만 2천 두카토를 구해오면 캄파 후작의 일은 깨끗하게 잊어줄게.”
이사벨라는 손을 탁탁 처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
“이걸로 끝. 더는 없음.”
여기까지 말한 이사벨라는 방긋 웃으며 상쾌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클레멘테가 돈을 구해올 거라는 믿음은 크게 없었다. 후하게 쳐줘서 반반이었다. 1억 2천 두카토는 그렇게나 큰돈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결코 혼자서 죽진 않을 거였다.
그녀는 다시 해사하게 웃었다. 표정도 말투도 착한 올케 모드로 돌아가서였다.
“언니, 그러니까 힘내봐요. 자유의 몸이 되고 싶잖아요. 내일 저녁까지예요.”
내일 저녁까지 클레멘테가 돈을 못 구해오면 뭐 진짜 캄파 후작의 첩이 되러 가던지 귀중품만 싸 들고 집에서 도망을 치던지 다른 방도를 강구해 봐야지.
* * *
사면초가에 빠진 클레멘테는 이사벨라가 떠난 응접실에 홀로 앉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작은 몸집과 가느다란 뼈대가 흡사 공포에 떠는 소형견 같았다.
하지만 클레멘테는 유서 깊은 백작가의 딸이었고, 지난 10여 년간 또 다른 백작가의 안주인 노릇을 해왔으며—‘훌륭하게’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무엇보다도 연쇄 불륜꾼임에도 불구하고 여태 안 들킨, 나름대로 저력 있는 여자였다.
그러니까,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도 한 칼을 숨긴 사람이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상대들을 머릿속에서 주르륵 훑었다.
남편의 도움이 모종의 이유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그간의 불륜 상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후순위로 미뤄두었다.
1만 2천 두카토를 한 번에 댈 수 있는 남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1500 두카토, 누구는 2000 두카토, 이런 식으로 쪼개 빌리면야 어떻게든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 갚을 기약이 없는 돈이었다.
터질 폭탄을 뒤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에, 전부 다 없애 줄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그게 되는 사람이 산 카를로 바닥에 몇이나 있겠는가. 곰곰이 생각하던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바로 하인을 불렀다.
여주인의 지령을 받은 하인 여러 명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저택 바깥으로 뛰쳐나갔다가 돌아왔다.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그분’의 일정을 파악한 그녀는 이제 ‘그분’이 자신을 만나주실 수 있으신지 알아보라고 하인을 내보냈다.
한두 시간이 지나고, 하인이 긍정적인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다. 기적적인 일이었다.
“지금 일정이 비셔서 한 시간 안으로 도착하시면 가능하실 수도 있답니다!”
클레멘테는 바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외출복을 덮어쓰다시피 하고 일 층 현관으로 굴러 내려갔다.
“마차를, 마차를!”
클레멘테가 일으키는 소란을 들은 바톨리니 노백작이 2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난간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클레멘테,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오?”
이사벨라가 방문한 시간은 점심시간 즈음이었지만 ‘그분’의 일정을 알아보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지금은 이미 저녁 먹을 시간도 훌쩍 지난 다음이었다.
바톨리니 노백작은 인지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기실 그는 아내가 혹여나 바깥에서 밤을 새우며 젊은 남자와 붙어먹지 않을까 꼼꼼하게 그녀를 뜯어보는 중이었다.
차림새도 수수했고 얼굴도 민낯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클레멘테는 최소한 오늘만큼은 결백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행선지를 밝혔다.
“루비나 공작부인을 좀 만나 뵙고 오려고요!”
“응? 공작부인을?”
“예, 저희 친정에 난리가 났잖아요.”
“그랬지.”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는지 한번 부탁을 드려 보려고요. 금방 다녀올게요!”
사실 루비나가 맨입으로 클레멘테를 도와줄 리는 없을 거였다.
하지만 클레멘테는 루비나가 이사벨라를 정말, 정말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게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이야기였다. 혹시나, 이거라면 루비나 공작부인이 자기를 도와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