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남부인의 자긍심
“아, 안 되오.”
처음 듣는 비앙카의 목소리는 묵직하고 낮았지만 그 나이대 아이 특유의 앳된 어투가 살아 있어 은근히 귀여웠다.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선을 보여야 숙녀가 되는 거라고 배웠소.”
그녀는 애써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유모가. 전, 전통과 규칙은 존중하라고 있는 것이라고 했소. 남부의 아가씨는 아, 아름답고 상냥하기로 이름이 높으니 타란토의 딸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혀를 찼다. 타란토 공작가의 유모는 공작 영애이자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를 시골 남작의 딸처럼 키웠구나.
모양을 보니 제왕학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비앙카의 말투에서는 <상냥한 아가씨를 위한 대화연습법 교본>, <왈츠를 잘 추는 여성의 12가지 스텝> 류의, 20년 전쯤 유행이 지난 여성 전용 자기계발서의 향기가 났다.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사람을 시켜 알아본 바에 따르면, 타란토 공작부인 카타리나가 생전에 딸의 유모로 선택한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충성스럽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건 지난 15년간, 지아넬리 남작부인과 겐나로소 노자작의 콤비가 주인 없는 타란토 영지와 가문을 철통같이 틀어막고 잘 보호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 사실이기도 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타란토 토박이로, 매일의 일상을 잘 보살피고 카타리나의 딸이 헛바람이 들지 않게, 대지에 발붙이고 자라게 만들어 주기에는 안성맞춤의 인선이었을 것이다.
다만 타란토 공작부인 카타리나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이른 죽음이었다.
비앙카의 모친이 몰랐던 것을 한 가지만 더 꼽자면 남편이 그에 발맞추어 만만치 않게 빨리 사망해 비앙카에게는 그녀를 상류 사회로 이끌어 줄 아버지도, 새엄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발탁한 지아넬리 남작부인과 남편의 가신인 겐나로소 노자작이 똘똘 뭉쳐 왕실이 비앙카를 수도로 데려가는 것에 결사반대하고 그녀를 타란토 영지에서 꽁꽁 싸매어 기를 것이라는 미래도 그녀의 인지 범위 내에 없었다.
아세레토 대공이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죽은 직후에 일곱 살 난 비앙카에게 청혼을 할 거란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니 신이 아니고서야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다.
그렇지만 고 타란토 공작부인이 미래를 예견하지 못한 탓에, 결과적으로 그녀의 딸은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재물만이 그득한 시골 영지에서 20년쯤 뒤처진 촌스러운 숙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게 되었다.
타고난 회갈색 머리를 태양에 그을려 최대한 금발처럼 만든 비앙카 공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의 소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나, 나는 타란토의 자랑이 되어야 하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 뻔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중앙대륙 최고의 신붓감이 되어 모두 앞에 서야 한다.
그런데 비앙카 공녀는 어느 모로 봐도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 확실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수도 사교계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비앙카 공녀 본인도 그 사실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눈에 질식 직전까지 차오른 공포가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대변해 주었다.
아리아드네는 생각을 정정하기로 했다.
잃을 것밖에 없는 자리에 책임감만으로 굳이 서려 한다는 점에서는 비앙카 공녀는 도살장의 소보다는 인신공양으로 바쳐지기 직전의 제물과 좀 더 닮았다.
비앙카 공녀는 천천히 말했다. 체념과 책임감이 뒤섞인 어조였다.
“⋯⋯타란토의 무도회에는 흠집이 없어야 하고, 15년 만에 수도에 나타난 타란토의 공녀는 완벽해야 하오.”
송아지처럼 큰 눈망울에 물기가 서려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
“난 데뷔탕트 무도회를 아니 할 수는 없소.”
이 말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비앙카 공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가라앉은, 조용한 눈길이었다.
공감하거나 위로해주지 않고 지극히 중립적인 태도에 공녀는 불편감을 느꼈다.
보통 그녀의 주변에는 이렇게까지 말하면 ‘아이고 우리 공녀님’이라고 말하며 그녀의 희생과 공작 부처를 일찍 잃은 타란토의 불운에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만 있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동정하는 대신에 반문했다.
“일반적인 데뷔탕트 무도회의 목적은 뭘까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날아온 질문에, 비앙카는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우, 우리 집안에 숙녀가 있고 이제 그녀를 사교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달라는 표시이오.”
아리아드네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이 공녀님 제법 똑똑하잖아. 당황해서 논점을 일탈하지도 않았고 감정이 폭주하지도 않았다. 대답도 또박또박 잘했다.
그러나 그녀는 흡족한 마음을 티 내지 않고 계속 비앙카를 밀어붙였다.
“어린 숙녀가 사교계의 일원이 되면 무엇을 하지요?”
“⋯⋯남편감을 찾소.”
“공녀님께서 데뷔탕트 무도회를 여셨을 때 공녀님의 남편감이 거기에 참석할까요?”
그 질문에, 비앙카 공녀는 벼락 맞은 것 같은 얼굴로 데 마레 백작을 바라보았다.
수도의 유일한 여성 백작이자 지난 20년간 유일하게 새로 창설된 작위의 소유자는 어린 공녀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자기 길을 자기 손으로 개척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묘한 위엄이었다.
“왕국에 둘밖에 없는 공작가의 후계자이시자 남부의 비옥한 타란토 영지의 주인이신 비앙카 공녀님께서 과연, 산 카를로 사교계에 나를 받아들여 달라고 파티를 열어 머리까지 숙이셔야 하는 위치인가요?”
“그건⋯⋯!”
이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이었다.
비앙카 공녀가 입을 벌리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다른 의미에서 입을 벌리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황급하게 새 차를 우려서 쟁반에 얹어 돌아온 지아넬리 남작부인이었다.
“데 마레 백작님⋯⋯! 지금 우리 공녀님한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르치시는 겁니까⋯⋯!”
* * *
아리아드네와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한참을 싸웠다.
아리아드네는 실익이 하나도 없는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느라 공녀가 만신창이가 되면 그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도회냐고 물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타란토 공녀에게는 모든 것이 다 번듯해야 한다고 맞섰다.
수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한테는 당연한 것이 남부 사람에게는 당연하지 않다고, 갖출 수 있는 것을 모두 갖추는 게 타란토의 자존심이라고!
이건 그동안 힘을 감추고 몸을 숙이고 있던 타란토가 중앙에 데뷔하는 것이고 공녀님 개인의 영광뿐만이 아니라 모든 타란토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지아넬리 남작부인도 ‘비앙카 공녀가 수도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라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참으실 수 있으시냐’라는 질문에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옛날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키운 병아리 공녀—지아넬리 남작부인의 눈에 비앙카는 조금 거대하고 칙칙해도 항상 병아리였다—를 지극히 사랑했다.
쓸데없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이 긴 것은 그저 그게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유일하게 아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라서였다.
공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실 오늘 갓 만난 아리아드네보다는 그녀를 끼고 키운 유모에게 더 컸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공녀님이 좋아하신다니. 해 봅시다.”
전투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1) 크고 화려한 데뷔탕트 무도회를 열기는 하되, 왕궁이 아닌 타란토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서 연다. 2) 무도회는 가면무도회로 한다.
무도회 장소를 왕궁이 아니라 타란토 공작가의 수도 저택으로 정한 것은 복잡한 머리싸움과 불필요한 방해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왕궁에서 가면무도회를 열려면 보안상의 이유로 레오 3세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합당한 처사였지만⋯⋯.
‘루비나 공작부인이 그 허가가 나오게 둘 리가 없으니까.’
데뷔탕트 무도회를 가면무도회로 치른다는 아이디어에는 비앙카 공녀가 가장 열렬히 화답했다.
“벼, 병아리 옷이 입고 싶네!”
“공녀님!”
“깃털이 있는 것으로, 가끔 수도에서 오는 간행물에 그려져 있는 것 말이야!”
병아리 옷은 아리아드네도 반대였지만 그건 유모가 잘 말려줄 것 같았다. 공녀와 유모는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일단 큰 고비를 넘긴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는 그저 저 소녀를 맨몸으로 사교계의 이리 떼들 앞에 세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어느 정도는 과거의 자신을 보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안 봐도 선했다.
생각보다 덩치가 크다는 둥, 뚱뚱하다는 둥, 시골에서 올라와 식이 제한을 적절히 못 시켰을 거라는 둥. 심심하고 악의에 찬 사람들의 입담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한 번 트집을 잡히기 시작하면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외모 논란은 태도 논란으로, 태도 논란은 교육 논란으로, 교육 논란은 성품 논란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애초에 불타오를 건수를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성실한 하급 귀족 출신으로서 내가 사교계의 규칙을 준수한다면 사교계도 상식선에서 화답할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보통의 영애에 한한 이야기였다.
타란토의 비앙카는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거물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알았고 다른 의도를 가지고 비앙카를 찌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비앙카 공녀의 외모를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가장 큰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외양에 있다는 건 못내 곤란한 일이다.
아리아드네는 전생에 비앙카의 혼사가 어떻게 되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왜 그녀의 외모가 한 번도 이슈가 된 적이 없는지 깨달았다.
전생에서의 비앙카는 끝까지 ‘남쪽의 은둔자’였다.
일단 그녀의 혼담을 주선해야 할 레오 3세가 병석에 누운 이후로는 중앙에서 발굴해 오는 이렇다 할 혼담이 없었다.
반면 섭정공이 된 체자레는 비앙카를 어디에도 내세우지 않았다.
그의 정통성이 부족했던지라, 까딱 잘못하다가는 비앙카의 남편이 그녀를 매개로 에트루스칸 왕국의 통치권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독신 생활은 비앙카 공녀에게 감금이었을까, 의외의 자유였을까.’
당시엔 엄청난 권력자, 혹은 권력 지형에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거물이 남부에 은거해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아깝게.
그런데 지금 막상 비앙카 공녀를 자기 눈으로 보니 수도에 올라와 야단법석을 떨며 호화로운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고 중앙대륙 각지의 군주 가문에 초대장을 보내 외교 사절들이 신붓감을 실물로 보게 하고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남편감을 찾는 일이 과연 그녀에게 좋은 일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공녀는 중앙 정치에서 살아남기에는 지나치게 물러 보였고 이성과의 무언가를 기대하기에는 제 나이치고도 순진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녀는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를 무사히 치르게 도와줄 길안내자였지, 비앙카 공녀의 인생 안내자나 타란토 영지의 책사는 아니었다.
일단 이 공녀님이 무사히 데뷔탕트 파티를 치르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아리아드네 본인은 여기서 적당히 친분을 쌓고 개평이나 좀 챙겨서 나가면 된다.
비앙카 공녀가 나중에 결혼을 누구와 어떻게 하게 될지, 그 결혼생활이 행복할지는 본인 팔자에 달린 일이었다.
그렇다. 역량보다는 팔자였다.
“드레스는 고르셨어요?”
자기는 꿈에도 모른 채 본의 아니게 드레스 관련한 악역을 맡아버린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일단 병아리는 아닌 거로!”
“이런.”
아리아드네는 애써 사려 깊은 척을 하며 비앙카 공녀를 바라보았다.
공녀는 데 마레 백작이 자기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지만 분기탱천한 유모의 기세를 보고는 이내 포기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공녀의 포기에 안도했다.
“다음에 뵐 때는 바다 건너온 최고의 옷감을 모두 선보일게요. 보면서 고르시지요.”
무어 제국의 수입품 중에는 귀여운 스타일이 많이 없다.
안타깝게도 공녀의 취향은 이번에는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천만다행인 일이다.
아리아드네는 이제 좀 바빠질 예정이었다. 당일의 동선을 짜야 했고 초대 손님 리스트를 제대로 뽑아야 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받아먹을 정치적 개평이라면 이 초대 손님 리스트에 있었다.